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요한복음 10:11-15)
양을 돌보는 일에서 선한 목자와 삯꾼의 결정적인 차이는 sacrifice일 것이다.
여기서 선한 목자는 목숨까지 내어놓는 그리스도를 지칭하며, 실제로 목숨을 내어 놓는 희생을 하셨다.
양은 연약하고 순수한 존재로 인식되지만, 실은 눈도 어둡고 겁은 많으면서 고집은 세다고 한다.
그러니 목자의 희생은 마땅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양이 의외로 목자의 인도를 순순히 무조건 따를 준비가 되어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목자로서 헌신하면서도 힘이 나고 의미를 부여받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인도를 잘 따르는 양의 존재라면, 목자로서 감정 노동을 포함한 어느 정도 이상의 희생은 필연이다.
교사는 문자 그대로 목자도 아니고, 예수님처럼 목숨을 내어줄 각오로 학생을 대하지도 않지만, 이 대목에서 교사로서 최소한의 노력과 헌신을 떠올렸다.
난 혹 삯꾼 교사로 머물고 있는 건 아닌지.
성경에 따르면 선한 목자는 자신의 양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목자도 양을 알고 양도 목자를 안다는 것이다. 교감과 친밀감으로 이뤄진 관계성이 핵심이다.
관계성이 없고 그저 고용되어 삯을 받는 것으로 한정된다면 목자라고 할 수 없다고 단정한다.
삯꾼은 굳이 희생하려 하지 않을 것이며 귀찮음을 무릅쓰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학생들이 귀찮아지면 교사를 그만두어야 할 때라는 멘토 선생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살았다.
귀찮다는 것은 내가 손해 보고 싶지 않다는 의도의 발현이다. 사소한 희생조차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나도 학생을 모르고 학생도 나를 모르며, 서로 교감이 이뤄지지 않는 먼 거리에 있다면 귀찮음을 무릅쓸 이유도, 그런 일들을 부탁할 이유도 없다.
의외로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주는 것은 사소한 것으로도 충분할 때가 많다.
아주 오래전 학교에서 토요일 오후 늦게까지 모의 논술 감독을 마치고 귀가하려는데 학생 한 명이 논술 답지에 이름을 썼는지 확인하고 싶다며 내 퇴근길을 막아섰다. 난 가던 길을 돌이켜 그 학생의 답지를 찾아서 확인시켜주었다. 평소에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던 학생이었지만 전교생 이름을 다 외우고 있던 나는 그 학생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면서 요청에 응했다.
별거 아닌 사소한 일이었지만, 그 학생은 나의 그 사소한 행동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했다. 이후 자신의 이름을 알 거라고 상상도 못했는데 이름 불러 주셔서 감동했고, 귀찮으셨을 텐데 짜증 내지 않고 친절하게 응대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손편지까지 내게 전해주었다.
난 하나도 귀찮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억지로 연기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한 번씩 고비를 맞게 된다. 이런 일까지 해줘야 하나 하는 생각이 자꾸 들기 시작했다. 중학교 와서는 더 그런 느낌이 든다. 아이들의 요구는 그동안 내가 겪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굳이 내가 알 필요가 없는 일까지도 내게 와서 고자질을 하고, 자신들끼리 좋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이나 각 교과쌤들의 수업권을 넘어서는 영역까지도 나의 역할을 기대한다. 그런 민원과 같은 요구에 응하다 보니 평소에 더 힘써야 할 분야에서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게 되기도 한다.
중학생들은 고등학생들보다 교육효과가 더디게 나타난다. 발달 단계의 차이이며, 그에 따른 기다림의 길이 차이이며, 교육적 성장과 변화의 주체인 학생들의 절실함의 차이일 뿐, 교육효과는 느리더라도 분명히 일어나고 있을 거라고 머리로는 인정하면서도 담임으로서 무력감으로 지쳐가기도 한다.
그럼에도 귀찮음을 넘어서 헌신으로까지 이어지는 건, 그저 막연한 노력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학생들을 더 잘 알아야 하고 이해해야 한다. 그로 인한 친밀한 관계로 인한 교감이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신영복 교수의 책에서 층간소음을 극복하는 방법 중 하나는 그 집 아이와 친해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 친밀함으로 소음은 더 이상 신경이 거슬리는 객관적인 데시벨을 넘어설 수 있다.
귀찮은 것을 그렇지 않은 척할 수 없고, 힘든 일은 아니라고 부인하며 열정을 스스로에게 강요할 수 없다. 결국 귀찮고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의 현장을 지키는 것은 학생들에 대한 사랑과 이해와 교감으로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일이다.
소신껏 교육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학부모님들 중 어떤 분들은 더 이상 같은 편이 아니라는 현실인식이 때로 주저함을 가져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삯꾼에 머문다면 모든 일이 그저 버텨야 할 반복적인 일상 그 이상은 아닐 것이다.
업무에도 진심을 다해야 하지만, 교사는 어린 영혼들을 상대하는 업무 이상의 의미가 있다. 돈으로 경제적 논리로, 계산값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사람을 대하는 일이 모두 그러하다. 난 지금 이 순간 누구에겐가 귀찮음을 무릅쓰고 있으며, 오히려 그 힘든 일을 즐거움으로 감당하고 있는가? 그것이 지금 이 순간 정말 사람들을 진정 아끼고 사랑하는지를 증명하는 나 자신의 평생 미션 같은 질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