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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유형

by 청블리쌤

진짜 좋은 리더는 자신의 두드러지지 않으면서 다른 이들에게 기회를 폭넓게 주는 사람이라고 한다.

의학 드라마에 보면 실제 수술을 간절히 원하는 인턴들이 등장한다.


어텐딩(미국 의대 임상교수 명칭)이 인턴을 온전히 믿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당연히 자신들보다 뛰어나지 않으며 실수를 할 가능성도 높다.


그렇다고 인턴들에게 수술의 기회나, 간단한 시술의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면 의술은 전해지지 않을 것이다.



교생 지도를 하면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지도교사가 더 뛰어난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당장 자신처럼 할 수 없다는 답답함이다. 그렇다고 수업을 맡기지 않는다면 그분들은 실제 교단에 서기 전까지 단 한 번의 실제적인 준비의 기회도 얻지 못할 것이다.


교직 경력 25년이 더 지나도록, 시험문제 편집은 내가 거의 다 해왔다.


저경력교사일 때는 젊은 교사의 타자능력과 컴퓨터활용능력이 더 뛰어날 수도 있다는 편견의 프레임으로 마땅히 내가 해야 했고, 나이가 들어서는 후배를 배려한다는 명분으로 내가 빨리 잘할 수 있다는 이유로 내가 맡아서 하는 게 마음 편했다. 그러니 나만 편집의 달인이 되어 가는 느낌이다.


나하고 동학년을 하면, 하는 동안에는 편하지만, 1년 후에는 바보가 된다는 소문도 괜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을 못 믿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를 너무 믿기 때문이었다.


그건 나의 조급함과 성질급함의 속성이 반영된 나의 아집이었다. 그러면서 심지어 다른 이를 배려한다는 착각에까지 빠져 있었다.


정해진 속도에 맞추지 못해도, 때로는 마감을 넘겨도, 혹 치명적인 실수를 하더라도 상대가 헤매며 힘겨워하더라도 기다려주고 배려하고 동일한 기회를 나눠야 했다.


교사의 입장에 있다면 학생들을 대할 때 당장의 완성에 대한 유혹과 당장에 이르지 못하는 답답함을 받아들여야 할 숙명을 가진다. 소위 교사의 스포가 학생들의 성장과 배움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도 심각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다 감당하려 하고, 더 애를 쓰는 모든 행위가 상대를 배려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학창시절 지각의 경계에서 늘 스릴을 만들어 낸 여동생의 지각을 막기 위해서 난 여동생의 가방을 들고 함께 뛰어주며 독려했다. 그러나 그런 동작은 이벤트로 그치지 않았다.


여동생과 최근에 이런 이야기를 했다.


그때 내가 잔인하게 가방을 집어던지면서 버스를 놓치든 말든, 지각을 하든 말든 알아서 하라는 불친절함을 보였다면 오히려 행동의 교정이 생기지 않았을까? 그때로 돌아가서 시험해 볼 수 없으니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한두 번의 친절로 그치지 않았으니 나의 친절은 좋은 의도와 상관없이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가정 내에서도 잡다한 일과 신경 쓸 일을 내가 먼저 나서서 하니까 아내가 점점 바보가 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자기보다 일찍 천국 가면 안 된다는 걸 계속 강조한다.


나이가 들어서 이제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무시할 수 없게 되자 난 심각해졌다.


당장의 성과와 능률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었다.


낭비를 해야 했고, 내 마음과는 다르게 불친절하고 배려가 없다는 소리를 들었어야 했다.


무심함이나 무관심은 헤매는 걸 안타깝게 지켜보기만 하면서 응원하는 마음으로 지켜보는 것과 비슷해 보이지만 완전히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는 걸 점점 더 실감하고 있다.


어찌 보면 가스라이팅일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다 해주면 나를 더 의존하게 될 것이니까...


물론 학생들을 교육할 때는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그 순간을 위해 애써야 한다는 목표를 명확하게 하니까 그래도 상황이 그다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래도 자꾸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내가 할 수 있다고 무조건 해주거나, 다른 이들을 대신해서 봉사하고 노력하는 것이 좋은 일이 아닌 것을 넘어서 아주 나쁜 일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좀 더 민감하게 살펴야겠다.


부모로서 난 딸바보가 되었던 것을 다소 후회한다. 짝사랑 같은 느낌이어서가 아니라, 딸들 자신의 자발적 변화와 자기주도적 성장의 기쁨을 내가 좀 가로챈 건 아닌가 하는 자책 때문이다.


뭘 해줘서가 아니라 안 해 줘야 더 성장하게 되는 역설, 당장의 가시적 결과만 고집하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사교육시장은 그래서 점점 더 커져만 간다. 학생들은 배우기 위해서도 학원을 가지만 때로는 부모의 죄책감을 은폐하기 위한 공간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자녀들은 잘 견디며 자신의 행복을 찾아갈 것이다. 그렇게 믿고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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