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평함이 가능하지 않다면
균형과 견제의 중립성
공평함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한 미션이다.
누군가를 위한 결정은 누군가에게 손해가 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학교에 모든 이들을 세심하게 배려하고, 사소한 불편함도 없도록 하기 위해 애쓰는 시간계 선생님이 계시다. 그래서 시간표를 짤 때는 안쓰러울 정도로 마음과 몸이 많이 힘들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이들의 요구를 최대한 들어주어도 결국 누군가는 불편할 수 있는 결과가 나오게 마련이며, 최선을 다하고 진심을 다했으면서도 섭섭한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보이셨는지 옆자리 선배 선생님이 내가 시간표를 짜면 좋을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 자리는 어차피 아무리 열심히 하고 아무리 잘해도 누군가에게 욕을 먹을 자리이니 나는 왠지 기준과 원칙을 정해놓고 시간표를 돌리고 나서는 신경을 쓰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사교성이 없지만 연연해하지 않고 혼자서 잘할 수 있는 일에만 선택과 집중을 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냉정하게 선을 긋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 그렇게 추론할 법도 했다.
그러나 내가 상처를 잘 받고, 소심하다는 포인트를 놓치셨다. 그러나 그 선택과 집중에는 나의 소심함이 자리하고 있다는 건 잘 드러나지 않을 수 있으니 섭섭한 마음은 전혀 없다.
내 모습이 어떠하건 상관없이 그 대화를 통해 좋은 의도로 일을 했더라도 모든 이들에게 이해를 받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차피 욕먹을 거면, 어떻게 해도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면, 내 소신껏 나의 역할을 하면 되는 거다. 비판이 두려워 눈치만 본다면, 내가 할 수 있은 일을 아예 시도조차 못할 것이다.
난 소심하지만, 누군가의 비판에 대해서도 늘 상처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적어도 나의 부족함을 바로 인정해 버린다. 난 완벽할 수 없는 사람이니, 어떤 결정이든, 어떤 활동이든 부족함이 드러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 부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누군가에게 끼친 불편함에 대해 이해를 강요할 생각은 없다. 나의 부족함은 내 사과의 필연적 이유다. 그러나 난 그 이상 할 수 없고, 실수를 아예 안 할 수도 없다는 존재임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런 마음으로가 아니면 학생들 앞에도 설 수 없다. 내가 완벽하고 훌륭하고 완벽한 교사가 될 때까지 준비를 해야 한다면, 난 평생 준비만 하다가 결국 교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부족함과 실수를 인정해야 함께 성장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두려울 것이 없다.
나의 자존감은 나의 부족함을 들켜버렸을 때 추락하는 것이 아니다. 추락하는 건 자존심이겠지만, 자존감은 오히려 사실과 진실을 받아들일 때 지켜지는 것이다.
그 부족함과 실수가 다시 시작하는 용기를 갖는 지점이 되도록 해주는 것이 자존감이다.
사과는 변명이나 방어를 위한 타협이 아니라 개선의 의지다.
그리고 부족함을 받아들이면, 일단은 더 잘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할 수 있다.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세상도, 그런 결정도 없다. 그 딜레마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정치인 것 같다. 정치인들은 국민들을 대표해 중요한 결정을 해준다.
그 결정에 영향을 주는 건, 정치인들 개인 입장도 반영될 수 있겠지만, 더 크게 일반화하면 보통은 진보와 보수, 좌우의 프레임으로 바라보는 것이 보편적인 시각이다.
국민들은 자신의 성향과 시각을 대표해 줄 만한 정치인들에게 투표권을 행사한다.
같은 현상을 놓고도 해석하는 시각은 다르다. 정치뿐 아니라 언론도 좌우 프레임으로 시각이 나뉘기도 한다.
각 성향의 프레임에 갇히면 결국 원론적으로 모두를 위한 결정은 없는 거다.
시각이 다르다는 것은 균형을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한쪽으로 편향되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 견제가 없이 한쪽으로 치우친다면, 그런 성향을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곧 양극단이 생길 것이다. 우리 사회는 늘 극단의 경계에서 견제와 균형을 지향하며 발전해 왔다.
그리고 개인은 자신의 가치관과 시각을 형성해야 한다. 개인이 가진 다양성이 구성원이 되어 균형과 발전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교사는 정치적 중립성이 의무다. 특히 교사가 학생들 앞에서 자신의 시각과 성향을 중립에서 벗어나 강요하거나 영향을 줘서는 안 된다.
교회 목사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런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공적인 자리에서 학생들이나 교인들 앞에서 공식적인 편향 발언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난 내 생각과 유사한 성향이 언급되더라도 설교 시간에 정치적 발언을 하는 것이 몹시 불편하다.
그래서 수업시간에도 한쪽으로 치우친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 극도로 조심한다.
단, 한쪽 편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중립적으로 다양한 입장을 학생들과 공유하며, 각자의 가치관과 세상을 보는 시각을 스스로 형성해가도록 도와야 한다.
그러고 보면 교사가 지켜야 할 것은 정치적 중립성만은 아니다. 교사가 가진 지식체계를 복붙하듯이 그대로 모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개별적으로 자신만의 지식체계를 형성하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나의 지식체계와 방향에 반항하듯 의문을 품는 것을 존중하며, 그런 인문학적 소양도 함께 키우도록 배려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교사를 능가하는 학생들이 배출되며, 학생과 교사가 함께 성장하고 발전할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