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은 삶의 모든 영역에 큰 영향을 준다. 학생들의 자존감의 정도가 어떤 분야에서든 성취의 수준을 결정한다는 것을 늘 확인한다.
학생은 주로 공부로 평가를 받지만, 공부 영역이 아니라도 자신의 존재가치를 드러내는 학생들은 자존감이 높다.
공부 아닌 분야 중 가장 주목을 받는 분야는 예체능이다.
노래, 댄스, 악기 연주, 스포츠, 미술 등에서 두드러진 성취를 하는 학생들은 예고로 진학을 하기도 하며, 혹 성적에서 약간 아쉬움을 느끼더라도 그들의 자존감에 큰 타격은 없다.
성적이 좋은데도 이런 분야에서도 두각을 드러내는 학생들을 일명 '사기캐(사기캐릭터)'라고 한다.
동아리나 학교 축제는 성적으로 억눌려 있는 학생들의 자존감을 키워주는 중요한 행사다.
씁쓸하게도 교육특구에서는 부모의 재력도 의외로 자존감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다. 교육특구 여고에서 살아남으려면, 성적이 좋거나, 이쁘거나, 집이 잘살거나...
그리고 집안의 재력은 성적과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있기는 하다.
학생들은 늘 비교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자존감을 지켜나가기 정말 어려운 상황에서 나름 애쓰고 있다. 자존감을 지키는 것은 어찌 보면 생존의 문제일 수도 있다.
학원을 가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학원으로 발길을 돌리는 이유는 가서 친구를 만난다는 사소하지만 중요한 이유 외에도, 자존감을 지키려는 학생들의 불안감 때문일 수도 있다.
충분히 성적이 좋은 학생들도 자신이 목표하는 성적을 이루기 전까지는 미완의 존재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러나 학생들이 제대로 공부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자존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학생들의 노력은 진정한 자존감이 아니라 외적인 증명으로 그치려 할 때가 많다. 학원을 남들 못지않게 많이 다니고 있고, 학원 숙제의 양으로 승부하고, 수학 선행을 어디까지 나갔고, 영어모의고사는 몇 학년 걸 풀고 있고, 수업시간에 노트 필기를 얼마나 예쁘게 잘 하는 등, 눈에 보이는 성취들로 위안을 받는다.
물론 의미 있는 학습과정일 수도 있지만 대개 각자의 이해와 깊이의 수준에 관계없이 진행된다는 것이 문제다.
두 딸을 학원을 보내지 않으면서, 난 아이들의 자존감을 다른 의미에서 채워주려 늘 애썼다.
부모로서 학원을 안 보내기는 쉽지 않은 결정적 이유는 학생들이 스스로 할 수 있기까지의 시행착오의 과정을 그냥 넋 놓고 지켜만 볼 수는 없다는 조급함과 양적 팽창에서조차 밀리면 질적 성장에서도 당연히 밀릴 것 같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두 딸이 학원을 안 가고도 학교 공부가 가능했던 건, 불안감의 실체를 보여주고, 멘탈관리해 주고 학습코칭을 해주었던 아빠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난 주변의 친구들과 지인들의 컨설팅을 자주 해주기도 했다. 심지어 부모가 학교 교사인 경우도...
얼마 전 친구 선생님 아들, 딸을 만나 컨설팅을 해주었다.
예비 고1인 아들은 절실함을 안고 나를 만났다. 그 절실함은 국영수과 학원을 다니며 그 많은 숙제까지 감당하는 것으로 위로를 받고 있었다.
물론 안 하는 것보다 무조건 낫기는 하지만, 그 아이에게서 온전한 주도성을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학원에서 배우고 나서 스스로 정리하고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숙제까지 하고 나면 지쳐서, 그리고 의무를 다했다는 일종의 안도감으로 학원 외의 시간에는 그저 쉴 수밖에 없었다.
이후의 필요한 학습방향을 얘기해 주었는데, 문제는 이미 빡빡한 일정에서 그걸 할 물리적 시간 자체가 없다는 것이었다. 학원을 그만두고 내가 이야기하는 방법을 실행하기에는 내 이야기의 신뢰도를 스스로 확신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시키는 대로 학원 가고 학원 숙제하는 것 외에 자신이 주도적으로 해낼 수 있을지에 대한 스스로에 대한 믿음도 갖기 힘들어 보였다. 그건 학원에만 의지하는 거의 모든 학생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속성이다.
학원을 그만두고 자기주도학습을 바로 하려고 시도하면 거의 바로 금단증상 같은 것이 나타난다.
학원을 다니는 건 일종의 중독 현상이다. 보통은 학부모와 학생이 동시에 중독된다.
두 딸을 학원을 안 보낼 수 있었던 이유는 애초에 단 한 번도 학원의 문턱을 넘어서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시행착오를 받아들이고 여유 있게 기다릴 수 있었다. 학원에서 수준에 맞지 않는 어려운 것을 감당하느라 지치고 힘들지 않으니, 시간과 에너지를 정말 자신에게 필요한 것에 몰두하는 데 사용했다.
큰 딸은 그 여유로 음악과 연애를 했고, 둘째는 실용댄스를 했지만, 그것도 아이들 삶의 일부여야 하고, 행복의 근거여야 하니 난 불만이 없었다.
자존감은 공부할 때에만 키워지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와의 컨설팅도 내가 높인 문턱이 아님에도 시작 지점부터 문턱이 높다.
아무리 친해도 부모 입장에서 내게 부탁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나와 정말 친하게 지냈던 선배교사에게 내가 먼저 아들 컨설팅을 제안했음에도 거절당한 적도 있다. 학교에서도 모든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내 영어코스와 멘토링과 수업에 대해 전적인 신뢰를 하지는 않으니 충분히 이해가 된다. 지금 우리나라는 공교육보다 사교육의 신뢰가 당연해 보일 정도니까.
그리고 부모 욕심이 아닌 아이의 자발적인 요청이 있어야 만난다. 그런 주도적인 출발 없이는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나서 마음이 열렸더라도 학습코칭 받은 내용을 일상에서 지속하는 건 또 별개의 문제다.
내 코스를 진행하면서도 주변의 친구들이 어려운 수준의 영어모의고사를 학원 숙제로 해가는 친구들을 보면서 불안해하던 친구 딸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한 번씩 내게 전화를 해서 멘탈 코칭을 해줘서 결국 스스로 코스를 완성하고 영어학습의 자립을 이루었다.
한 번은 블로그 이웃 한 분께 청블리 영어코스를 안내해 드렸고, 학생과 직접 상담이나 컨설팅을 하지 않고도 과정을 스스로 다 마친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자기주도성이 갖추어져 있을수록, 학원에 대한 의존성이 낮을수록, 자존감이 높을수록 지속의 가능성은 더 높아졌다.
그래서 사교육을 넘어설 공교육의 가능성을 두고 학교에서의 나의 역할에 주목하지만, 학생들에 대한 기대가 클수록 현실적인 좌절의 깊이는 커져간다.
공부는 각자가 하는 것이고, 그 방법과 방향을 일러줄 수는 있지만, 내가 강제할 수 없다는 것을 한계로 느끼고 있는데... 그렇다면 학생들의 지속적인 학습을 보장하는 요인은 무엇인지... 그렇게 고민하다 내린 결론은 그 기저에 학생 자존감이 자리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을 확인시켜준 좋은 책을 만났다.
허규형 정신과 의사의 <나는 왜 자꾸 내 탓을 할까>라는 책에 자존감에 대한 분석이 나온다.
자존감의 세 가지 요소는 자기효능감, 자기조절감, 자기안정감이라는 것이다.
내 영어멘토링 코칭을 한 학기 이상 살아남은 학생들에게서 발견된 것이 자기효능감이었다. 학원에서 억지로 숙제를 통해 책 한 권을 끝낸 것과는 사뭇 다른 성취감을 아이들은 느꼈다. 학습의 주체가 본인이며, 그렇게 과정을 끝냈을 때의 자신감은 이후 다른 과목 학습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내가 평소에 아이들에게 심어 준 것은 사소한 성취였다. 과정에 충실해서, 자신의 출발점과 속도를 지키는 일이었으니 감당할 만한 길이어서 아이들이 포기하지 않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이는 자기조절감으로도 이어진다. 내가 강조하는 것은 조금씩이라도 매일 학습하는 꾸준한 습관일 뿐, 학습분량이나 속도는 스스로 조절한다. 물론 동일한 단어시험범위로 매주 단어시험을 치기도 하지만, 100%의 완벽함을 요구하지 않는다. 단, 준비가 덜 된 스스로의 수준을 자각한다면 남들보다 범위의 단어를 한두 번이라도 더 읽을 것만 격려한다. 어쨌거나 그 모든 학습과정과 분량을 조절하는 것은 본인이어야 한다.
자기안정감은 불안함을 극복하는 능력이다. 모든 학생들이 다 자기안정감을 갖춘 건 아니어서, 그때 멘토교사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당장의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최종 결과로 받아들이지 않아야 할 이유를 끊임없이 이야기해 준다. 그런데 그 자기안정감은 본인이 이뤄가는 사소한 성취로도 확고해져간다. 자기효능감과 관련해서 꾸준하게 뭔가를 해나갈 수 있다는 것에 의미가 부여된다. 학원에서 진행되는 과정과는 완전 다른 느낌이다.
오히려 학원은 이 세 가지 요소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다.
자신의 두려움이나 준비도에 관계없이 진행되는 진도로는 자기효능감은 개발되지 않으며, 학원 숙제나 진도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두려움이 자기조절감을 다소 마비시키고, 늘 어렵고 끝도 없어 보이는 너무 막막한 학원과정은 자기안정감을 가질 여유를 갖지 못하게 한다. 학원을 계속 다니려면 오히려 이 세 가지 요소가 작동을 하지 않아야 할 수도 있다.
내 영어코스의 목적은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을 수준에 맞게 학습하고, 원리를 깨우치고 이해 중심의 학습으로 프레임을 전환하고, 습관형성을 도와서 하루빨리 하산시키는 것이다. 영어를 자기주도적으로 취미와 힐링으로 해낼 수 있도록...
교사의 역할은 지식만 전해주는 것이 아니다. 자존감을 높여 결국 학생 스스로 즐거움 배움의 성장을 이루도록 돕는 일이어야 한다. 그 과정이 행복하도록, 그리고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성과를 받아들이며 함께 기뻐하는 일이어야 한다.
이는 사교육으로도, AI로도 대체할 수 없는 인간 교사의 역할이다.
아래 <나는 왜 자꾸 내 탓을 할까>의 자존감 관련 인용 글을 읽으면서 마무리하려 한다. 자존감을 키우는 저자의 비결도 공개되어 있다.
자존감은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먼저 자기효능감이다. 자기효능감은 자신이 어떤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 기대와 신념이다. 이러한 자기효능감이 높으면 어떤 일을 시작할 때 두려움이 적고 일을 하면서 어려운 점이 생겨도 끈기 있게 이겨낼 힘이 있다. 반대로 자기효능감이 낮으면 일을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첫 발을 내딛기 자체가 어렵다. 설사 간신히 시작했다 하더라도 중간에 중단하기 쉬운데, 스스로 중단하는 것이 끝까지 하고도 부족한 결과물을 내는 것보다는 나을 수 있다고 합리화한다. 어차피 ‘티끌 모아 티끌’ 아니겠냐는 생각이다.
자존감의 두 번째 요소는 자기조절감이다. 내 삶을 스스로 조절하고 있다는 느낌을 뜻하며, 자기통제감이라고도 부른다.
자기효능감이 높으며 자기 일을 잘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존감이 낮은 사람을 관찰해 보면 자기조절감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어렸을 때부터 시키는 대로, 정해진 대로만 살아가다 보니 내 생활을 스스로 통제하고 조절한다는 느낌이 부족한 것이다.
자존감의 세 번째 요소는 자기안정감으로, 내 인생이 편안하고 안전하게 유지된다는 느낌을 뜻한다. 지금 내 상황을 불안하고 위태롭다고 생각하면 자기안정감이 무너질 수 있다. 자존감을 이루는 다른 요소가 높아도 자기안정감이 낮으면 기분 변화가 크고 충동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나’와 ‘현실의 나’의 차이가 벌어질 때 자존감 문제가 발생한다. 특히 기대하는 나에 대한 기준이 너무 높을 때 문제가 생긴다. 예를 들어 무조건 시험에서 1등을 해야 하는 사람은 2등을 했을 때 좌절감과 괴로움이 크다.
어렸을 때부터 높은 기준을 강요받으면 이런 경향이 심해진다. “1등 성적표를 받은 날이었어요. 칭찬받을 생각으로 집에 갔는데 부모님께서 칭찬은커녕 하나 틀린 수학 문제를 지적하며 혼내시더라고요.” 놀랍게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꽤 자주 듣는다. 이렇게 계속 부모님께 지적을 당하다 보면 부모님의 기준이 내재화되어 주변에서 누가 이야기하지 않아도 높은 목표를 이루도록 스스로 다그치게 된다.
현실의 나를 너무 낮게 평가해서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
좋지 않은 결과를 얻으면 또 다시 자책하고 자존감은 떨어지게 된다.
두 가지 경우에 모두 해당되는 사람도 많다. 기대하는 나에 대한 기준이 높은데 현실의 나에 대한 평가는 낮아서 더욱 삶이 괴로운 사람들이다.
...
자기조절감이 낮은 사람들을 보면 과정이 아닌 결과를 통제하고 싶어 한다.
... 결과를 조절하지 못했다는 패배감이 자존감을 낮춘다.
...
자존감이 낮다는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기대를 낮추거나 스스로에 대한 평가를 높이는 것이다. '반드시 이만큼 해내야 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만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야. 목표를 이뤄내면 좋겠지만 그보다 낮은 목표라도 괜찮아. 길게 보자.'라고 생각을 바꿔 보자. 스스로에 대한 평가를 높이는 가장 쉽고 효과가 좋은 방법은 '칭찬 일기' 쓰기다. 아주 작고 하찮은 일이라 생각되더라도 잘한 일을 매일 세 가지씩 써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