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역사 강연 하나 추가, 그럼에도...

by 청블리쌤

2012년 사대부고 마지막 해에 학교 내 전 교직원 대상 연수를 한 적이 있다. 교내 선생님 중에서 사례 발표를 하는 거라서 뭐 대단한 자리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선생님들 앞에서 강의를 한다는 건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상상치도 못하게 대박을 쳤다. 선생님들은 많이 웃으시며 재미있어하셨다. 무엇보다 선생님들 사이에 극강 “I”였던 내가 무대에 섰을 때의 또 다른 페르소나 반전에 놀라는 분들이 많았다.


그래서 다음 해 신입생 대상 오리엔테이션 강사로 섭외되었다. 다음 해 학교를 옮겨야 해서 내가 가르칠 학생들도 아니었음에도 수락했다.


운 좋은 한 번의 히트가 다음 성공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고, 준비 안 된 조기 성공은 이후 허망한 실패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현실도 외면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의 막연한 자신감만 차올랐다.


결과는 대망신이었다.


신입생들은 나의 강의에 거의 반응하지 않았다. 평소 고1 첫 수업시간마다 학생들의 반응이 뜨거웠던 오리엔테이션 내용을 거의 그대로 반복했음에도 전혀 먹히질 않았다. 역시 과거의 성공에 젖어 충분한 현실인식이 안 되었던 거였다.


대중들이 반응을 보이는 경우는 일단 후광효과가 있을 때다. 높은 인지도로 시작하면 일단 절반 이상의 성공으로 시작되는 셈이다. 물론 그 높은 인지도는 노력과 재능으로 쌓아 올린 것이니 분명 공짜는 아니다.


인지도가 없더라도 내용이 임팩트가 있으면 즉각적인 반응이 나온다. 보통은 첫 시작의 농담부터 빵 터지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세 번째 경우는 친밀감이 형성되어 있는 경우다. 그냥 자신의 선생님임을 받아들였다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집중해 주는 것이다.


난 생전 처음 보는 아이들 300명을 대했고, 첫 순간부터 농담이 터지지도 않았고, 그래서 난 소통과 교감의 여유를 찾지 못했고, 혼자서 라디오방송하듯이 시간을 겨우 채웠던 처참한 기억으로 남았다.


결론을 놓고 보면, 난 마땅히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강사 제의를 거절했어야 했다.


그런데도 실패를 기억하지 못하고 대구국제고 개교할 때 첫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강사제의를 수락했다. 완전 망하진 않았지만 온전한 교감을 이루 는데는 실패한 것 같은 아쉬움이 남았다.


평소 하는 수업을 죽 쓰면 다음 시간이라는 회복의 기회가 주어지지만, 이벤트 같은 강의는 단 한 번의 기회밖에 없다. 뿌듯함이나 비참함 중의 결과를 그냥 받아들어야 한다. 물론 그 결과는 시작하는 순간 거의 결정된다.


그리고 떠오르는 망한 기억은 올해 5월에 있었던 교회에서의 강연이었다. 너무 넓은 연령대의 스펙트럼을 극복하지 못했고, 농담도 제대로 시도하지 못했었다.


역시 애초에 목사님의 제의를 거절했어야 했다. 나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리고 어제 또 그런 망한 기억의 역사를 남겼다.

섭외하시는 선생님과 한때 같은 학교에서 동학년을 했었다는 옛정에 나의 교만함이 만나서 환장 콜라보를 이루었다.


분명 이제와는 완전히 다른 무대임을 예감했었음에도, 난 기존에 성공적이라고 느꼈던 그 과거의 성취에만 기댔다. 섭외한 선생님으로부터 참여하시는 선생님들의 정보를 들었을 것이지만, 그조차 나의 자만심으로 제대로 듣지 않았던 것 같다.


어제는 대구시의 한 마이스터고등학교 저경력교사들 연수였다. 전문교과 선생님들의 전문성과 교육의 방향은 내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였음에도 교사라는 공통성에 기대어, 그들의 필요에 가닿지 않을 이야기들을 내 중심적으로 안일하게 준비했다. 아니 애초에 준비를 제대로 했어도 내가 다가갈 수 없는 영역이었을 것이다.


난 그들에게 새로운 세계에 대해 오히려 배워야 하는 입장이었다. 아니면 나의 허공을 가르는 메아리 같은 이야기 말고 선생님들의 입장을 공감하고 들어주는 토론식 진행을 했어야 했다. 이조차 섭외하는 쌤이 내게 힌트로 던졌던 것이었다.


두 시간 중 첫 시간 강의 후, 다음 시간에는 준비한 내용을 다 덜어내어 급마무리 후 질문을 받았고, 예정보다 일찍 마치는 걸로 내 실패를 조금만 만회하였다.

모든 선생님들께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나의 생각을 공적으로 전한다는 것은 정말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나는 재미 여부를 떠나서 어떤 상황에도 본질이 변하지 않는 전문성으로 강의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음도 확실하게 자각했다.


전문성보다 재미와 감성, 감동을 추구한다고 생각했는데, 문제는 그게 나만의 재미와 감성에 그칠 수 있다는 위험성이었다.


어차피 50여 회를 넘어선 학부모, 교사 대상 강의도 이젠 막을 내릴 때도 되었지만, 그 끝을 자연스럽게 기다리기보다 자발적인 현실 인식으로 거절의 미덕을 발휘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강연 나가기 전인, 어제 오전에는 학교에서 학년부장선생님으로부터, 이제 중학교 마지막 시험이 끝난 우리 중3 아이들을 위한 공식적인 강연을 의뢰받았다. 어제 망한 강연 후에 요청을 받았다면 거절했을지도 모르겠는데... 너무도 흔쾌히 수락을 해버려서 번복하기는 어려울 것 같으니... 철회의 고민보다 더 잘 준비해야겠다는 다짐이 더 현명한 일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수락 직후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강의 제목과 내용을 전해 드렸다.


따뜻한 고1 봄날을 맞이할 예비 고1 윈터스쿨 가이드

1) 중고등학교 차이(진로와 고교학점제의 핵심)

2) 지금 준비 안 하면 후회할 것들

3) 각 과목 학습법

4) 학생부 관리의 핵심

5) 대입 전략의 기본


부장님은 전체 학생들을 두 그룹으로 나눠서 한 시간씩 시청각실에 모아서 진행하자고 제안하셨다. 교내 강사이니 강사료는 책정할 수 없음을 미안해하셨지만, 내가 그 사실을 모르는 바도 아니고 우리 아이들인데 강사료 여부로 결정할 일은 아니었다.


그 당시 유일한 걱정은 40분 내에 이 이야기를 다 눌러 담을 수 있을지 여부였는데, 지금은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단 한마디라도 가슴에 새겨질 임팩트 있는 이야기로 전달할 수 있을지 여부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더 든다.


강의를 망치는 것은 나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혹 재미없어서 집중을 잘 못했거나, 혹 잘못된 메시지나 기분 나쁜 감정이 전달되는 일이 생긴다면, 강의를 안 하는 것만 못한 민폐를 저지르는 것이니까...


이전의 후회나 아쉬움이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이후의 강의에서는 되풀이되지 않기를... 그냥 앉아서 기대만 하지 말고, 세심하고 철저하게 준비할 수 있기를...


기말 끝난 세기말적 분위기에 편승하는 중3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니, 모두가 다 진지하게 들을 거라 기대하지는 않지만, 단 한 명이라도 좋은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면 교사로서 시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학년부장님께서 말씀해 주셔서, 정말 감동했다. 한 영혼의 의미, 그 소중함을 품고 계신 것 같아서...


그래서 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수락했다. 부장님과 나의 진심이 아이들에게 전달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적어도 나의 노력 부족으로 아이들에게 좋은 영향이 가닿지 않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라는 다짐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순간이다. 단지 직전의 강의나, 10년도 더 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망쳤다는 나 자신의 자존감 회복을 떠나서...


그저 아이들을 위한 일이라는 사실에만 집중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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