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예비 고3 딸과의 상담

(현타를 마주하며 스마트폰을 맡기다)

by 청블리쌤

둘째 딸이 드디어 자신의 스마트폰을 내게 맡겼다. 폰 때문에 새벽에 잠 안 자고, 늦잠 자고는 오후에 친구랑 공부하려고 카페 갔다가 수다만 떨고 집에 와서는 현타가 왔다고 힘들어했다.

그런 일이 오늘 하루만의 이벤트가 아니었기 때문에 마음속으로는 내키지 않지만 결단을 내린 거였다.

그럴 것을 난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휴대폰을 최대한 늦게 해주고, 스마트폰도 늦게 해주려 애썼던 거다. 학생이든 어른이든 스마트폰과 싸워 이길 사람은 거의 없다. 이긴다고 해도 휴전과 같은 긴장상태는 계속된다.이미 너무 애를 써서 이미 정신적으로 소모가 된 상태일 수도 있으니 온전히 집중하기도 어렵다. 큰딸은 진짜 공부하려고 할 때는 2G폰도 집에 놓고 나갔다.


둘째 딸은 얼마 전 언니 동아리 선배와 전화상담을 했다. 그 동아리 선배는 중학교까지 거의 공부를 하지 않아 간신히 인문계 고등학교를 갔는데 어느 순간 각성해서 성균관대 공대를 정시로 진학했다. 그런 서사가 누군가에게는 힘이 될 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그저 따라 하기에는 버거운 부담이 되기도 하겠지만, 딸은 어쨌거나 좋은 자극을 받았던 것 같다. 물론 그 자극은 유통기한이 있긴 하지만, 뜨거운 열정을 다시 불러일으키지는 못해도 한 번씩 인상 깊은 말들은 조금씩 영향을 줄 수도 있을 거다.


딸은 그때 들었던 말 중에 기억나는 말을 인용했다. 상위권 대학을 가려 할 때 경쟁상대는 같은 학교의 친구가 아니라 이 순간에도 자신처럼 치열하게 공부에만 몰입하는 N수생이라는 말이었다. 딸은 자조적인 어조로 자신은 정시파이터이면서 N수생은커녕 학교의 다른 친구들만큼도 열심히 안 하고 있다면서 깊은 좌절감을 표현했다.


난 딸의 속상해하는 이야기 끝에 잔소리 같은 조언을 덧붙였다.




아직 저녁이라는 시간이 남았는데 오늘 하루가 망가진 거라고 속단하지 마라.


늦잠 잤고, 치과 다녀왔고, 오후에 친구와 놀아서 오늘 하루는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못하겠다고 주저앉고 싶은 건 당연하다. 후회도 막 밀려오고, 그 후회의 파도 중 가장 큰 비중은 주변 친구들만큼도 공부하지 못하여 당장 성적과는 관계없이 외적인 노력 자체를 증명하지 못했다는 현실 인식일 것이고...


그래도 아직 기회가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자. 완성의 관점으로 봤을 때, 오늘은 이미 진 게임을 하게 되는 거니 당연히 의욕이 솟질 않겠지. 남은 시간 몰입해 봤자 물리적으로 주어진 시간은 반 토막 정도도 안 되니까... 그렇다고 너의 완벽한 계획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공부한 것만이 성공의 기준이 된다면 대부분의 날들은 좌절로 보내야 한다. 목표도, 계획도 중요하지만 그건 너가 움직여야 할 방향과 동기를 일깨우는 것이지.


서울방면으로 가기 시작했다면 목표지점인 서울까지 못 가고 대전이나 수원까지 갔더라도 넌 어쨌든 성장하고 좋아진 거란다. 계획을 완수했다는 것에만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매일 공스타에 양적인 시간으로 기죽이는 친구들의 페이스를 의식하지도 말길..


후회는 현재에 더 충실하게 해주는 약간의 영향력만 남기고 떠나 보내야 한다. 너에게 똑같은 시간이 다시 주어져도 완벽하게 계획대로 할 것임을 어떻게 장담하겠니? 그리고 계획대로 못한다고 의미가 전혀 없는 시간인 것도 아닌 거고... 혹 다시 돌아가도 후회를 남기게 될지도 모른다.


아빠가 중학교 가서 후회 안 하는 고등학생들이 되는 걸 도울 기회를 가진 것으로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중학생들은 너무 해맑아서 당황했다는 얘기 기억나지? 근데 그건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문제가 생기기 전에는 보통 움직이려 하지 않지. 대개 문제가 생겨야 절실함의 동력을 얻을 수 있거든. 그런 의미에서 후회는 지금 현실인식이라기보다 이 순간 그냥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징징거림일 수 있는 거다.


수능 칠 때 1교시를 망했다고 2교시부터 포기해서는 안 되는 거잖니. 1교시를 나만 망한 거 아니라면 혼자 좌절해서 2교시에 최선을 다하지 못한다면 정말 바보짓을 하고 있는 것이니까. 언니도 2교시 수학시간 후에 좌절감으로 수능장에서 뛰쳐나오려고 했잖니. 그래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봐야 재수를 하더라도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서 끝까지 자리를 지킨 덕분에 기대 이상의 대학을 간 거고.


수능은 실력만이 아니라 그 모든 태도와 전략과 평상시의 노력을 같이 평가하는 거란다. 1교시를 망해도 2교시라는 기회에 감사하고, 또 다른 기회에 감사하고...

오늘은 망했어도 내일이라는 기회에 감사하고... 내일 완벽하게 할 수 없어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지만, 그런 양면의 가능성을 다 가진 것을 기회라고 하는 거고, 그 기회는 불안함을 가장한 설렘일 수 있는 거란다.


멈춤과 절제도 너가 꾸준히 훈련해야 한다. 예전에 아빠가 있던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일부러 휴대폰을 압수당하곤 했단다. 아예 2주간 맡아달라고 대놓고 부탁하는 애들도 있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본인 스스로 절제하며 옆에 스마트폰이 있어도 공부에 집중하는 것이지만, 아예 물리적으로 스마트폰과 경쟁을 하지 않도록 조치하는 것이 더 현명할 수도 있는 거지. 뭐 하러 그런 경쟁에 쓸데없는 소모를 하겠니. 너에게 이제 아빠가 강요하지 않은 너의 절실함이 생긴 것이니 기쁜 마음으로 맡아줄게. 친구들끼리 어디 놀러 가거나 학교행사 있어서 사진을 찍어야 할 때 원할 때는 가져가는 걸로 하자고? 좋다. 이렇게 너 스스로 마음먹고 실행한 것에 칭찬을 해주고 싶다. 스마트폰과의 전쟁에서 드디어 네가 패한 것이 아니라, 아예 전쟁 자체를 무시하기로 한 전략은 승리에 가까운 결단과 실행이란다.


요즘 읽는 소설이 너무 재미있지만 읽을 때마다 죄책감이 든다고? 그럴 수 있지. 그러면 공부할 시간에 책을 보는 게 아니라 놀 시간에 책을 본다고 생각하렴. 그리고 아무리 궁금해도 시간이 되면 끊어 버리는 절제... 그것도 훈련해야 한단다. 뭔가를 더 하려고 잠을 안 자는 것도 멈춤과 절제가 더 필요한 대목이지. 정상적인 컨디션일 때도 공부에만 몰입하기 어려운데, 잠자는 패턴이 무너진 경우라면 더 힘겨운 생활을 해야 한다는 건, 너가 늘 몸소 체험했을 거고. 그래서 폰을 맡긴 거겠지.


아무리 새벽에 공부가 잘되어도 수능 응시하는 낮 시간에 모든 생체시계까지 맞춰야 하는 거잖니. 능률과 효율을 떠나서 낮에 집중하려는 노력 없이는 새벽에 아무리 실력을 쌓아도 결국 실력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것이니 그런 현실을 고려해서 멈춤과 절제를 계속 훈련하면 좋겠구나.


너무 일찍 성적이 오르면 지키는 것이 더 큰 부담이고, 잘해야 본전이니 설렘보다 불안함을 안고 안일함과 싸워야 한단다. 그러니 길게 보고 가자.


너가 공부 자체가 재미없거나 못 견디는 건 아니잖니. 남들과 비교해서 열심히 안 하고 있다는 불안함일 뿐... 물론 스스로 생각하기에 너만의 절대적인 목표에도 미치지 못한다면 계속 애쓰고 노력할 필요는 있지만... 양적인 증명으로 안심하려 하거나, 다른 애들보다 우월감을 느끼려고 하거나, 당장의 성적이 그런 성취감의 증거로만 사용되려고 한다면 더 위험한 거란다.


오늘 중 대부분의 시간을 날렸든, 더 많은 시간을 확보했든.. 중요한 건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하지 않는 거란다. 남들과 비교할 이유도, 공부 잘되었던 너의 다른 날들과 비교할 이유도 없다. 때로 양적으로 늘 부족한 것 같아도 폭풍집중력으로 그 이상의 질적 성취를 이룰 수도 있는 일이고... 그러니 눈에 보이는 것에 맞추려 하지 말고, 그저 사소하고 초라해 보여도 조금씩이라도 더 알아가는 즐거움만 누리렴.


폰을 하면서 시간을 널널하게 해야 한다면, 그렇게 해서도 진도를 따라가며 생활이 가능한 대학을 진학해야 행복한 거란다. 아빠는 너의 매 순간의 선택을 존중하지만(그게 더 무섭다고? 그렇지. 더 두려운 일이긴 하지. 선택에 대한 책임은 본인의 몫이라는 냉철한 현실), 너 스스로도 그런 선택을 존중하며 지내면 된다. 그러다 여력이 조금씩 더 생기고, 능률과 효율이 더 오르고, 더 성장하게 된다면 결국 그렇게 매 순간 즐거워하다가 도달한 그곳에서 행복해하면 되는 거구..


수능이 이젠 남의 일이 아닌 예비 고3이 되었지만, 그래서 현실이 믿기지 않고 더 불안할 수 있겠지만, 매 순간 주어진 기회를 생각하면 정말 길고 오랜 시간이란다. 그만큼 더 행복하기를 바라고, 지금 이 순간에만 할 수 있는 몰입의 기회를 누리기를 바란다.


오늘 낮에 망했다고 밤잠을 안 자가면서 다음 날을 또 망치지 않도록, 매순간 절실함을 유지하되 모든 순간 실수나 후회없는 완벽한 성과를 기대하지 않도록 하렴. 그 전에 어떠했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든 결국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 뿐인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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