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마가복음 4:3-9)
마가복음 4장은 누구나 다 아는 씨앗의 비유다.
우리는 이 비유를 말씀과 복음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만 주로 생각한다. 물론 자신을 돌아보며 좋은 땅이 되고자 애쓰고 노력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 또한 주권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었다.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만 생각한다면, 좋은 땅이 아닌 땅에 대해 선을 긋고 정죄하고 판단하기 쉽다. 자신을 돌아보며 성장을 지향하기보다 이미 교회에 나와 말씀을 듣고 있는 기득권을 가진 것 같은 사람들은 가시밭이 아닌 것에 안심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천국은 겨자씨 비유처럼 미완성으로 주어진다. 그러나 그 미완성은 성장과 완성이 전제가 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시작은 너무도 초라하고 비천해 보인다는 것이다. 훗날 열리게 될 열매와 성장의 결과를 기대하기에는 언제일지 모르는 막막한 기다림의 과정을 통과해야 하고 그 결실에 대한 확신조차 가질 수 없는 경우, 기다림 자체는 희망의 과정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뭔가 당장 성취를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결과물을 당장은 보여주지 않으시면서 그저 씨앗을 뿌리고 계시기도 한다.
이미 거의 완성된 거목을 끌어와서 당장의 만족을 구하는 세상의 원리와는 다른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불안함 속의 기다림을 원하지 않는다. 그 불안함에 벗어나고 싶은 절실함으로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학생들이 즐거움을 무한정으로 보류해둔 사교육 시장에 갇혀 지내는지도 모른다.
씨가 뿌려진 장소는 다르지만 당장은 아무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 이 대목에서 믿음과 소망이 필요하다. 그 은혜를 구해야 한다. 우리의 계산과 능력으로는 단 한순간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하심은 때로는 너무 비효율적이다. 씨가 뿌려진 네 종류의 땅 중에 한 군데만 제대로 성장을 이루었으니 25%의 성과에 지나지 않은 결과물이 그 비효율성을 증명한다. 그러나 그걸 우리는 은혜라고 한다.
처음부터 싹수가 보이는 곳에만 복음이 전해진다면 누군가에는 영영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의 의미이기도 하다. 십자가는 돌밭 같은 땅을 옥토로 성장하게 하는 통로인 것이니...
이러한 하나님의 낭비(?)는 모든 이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가 된다.
어차피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도 성장을 면제받은 것이 아니다. 모두가 각자의 은혜의 분량대로 끊임없이 성장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뤄간다. 그것은 의무라기보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으로 시작된 기쁨이며 즐거움의 사명이다.
놀라운 것은 모두 받을 만하기 때문에 우리의 노력으로 더 큰 은혜를 누리는 것이 아니듯 현재 우리의 초라한 모습이 하나님의 은혜를 단 한 부분이라도 막아설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초라한 모습이라도 움츠려들지 않으며 자신의 속도와 주어진 분량의 성장을 매일 이뤄간다.
1만 성도 파송을 앞둔 이찬수 목사님의 절실함이 담긴 설교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께서 교사인 나에게 위로와 방향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시는 것 같아 놀랍고 감사할 때가 많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생각하며 이 말씀을 적용해보았다. 교사의 말을 잘 듣고, 수업에 잘 경청하는 좋은 땅에 있는 아이들만 바라며, 그들과의 교감을 누리는 교사의 행복은 우리가 의도적으로 추구해야 할 목표가 아닌 것이다. 그저 덤으로 주어지는 축복임을 인정해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교사의 교육의 외침과 노력이 허공에 흩어지거나 영향력 없는 곳에 떨어진다. 정말 준비가 안 된 아이들을 교육할 때 느끼는 벽은 교사에게 좌절감을 안기기에 충분하다. 때로는 교사의 정체성이 흔들리기도 하며 교사를 계속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구심까지 갖게 된다.
그러나 교사들은 다 알고 있다. 자신들의 교육의 성과를 당장 거둘 수 없어도 씨앗이 뿌려지고 있 다는 사실을... 그러나 당장 그 작은 신호나 표시라도 구하고 싶은 유혹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어 학생들의 반응에 일희일비하는 것은 교육경력이 쌓여도 여전히 계속된다.
교사는 어쨌거나 비효율성을 추구해야 하는 숙명을 지닌 사람들이다. 교사들은 자신의 불안감이나 좌절감을 넘어서 학생들의 고통과 아픔을 들여다보며 멈추지 않는 비효율적인 교육을 계속한다.
난 늘 학생들에게 찌질함을 강조한다. 찌질한 교사라는 말을 듣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가 찌질함이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그 찌질함은 나도 모르게 스며든 말씀의 영향력이었음을 실감했다. 그 찌질함과 초라함은 미완성으로 주어진 기회와 성장의 시작이며 기적의 시작이기도 하다.
우리의 출발은 늘 초라해야 한다. 그래야 성장이 지속될 수 있으니...
그런데 그 찌질함이 많은 아이들에게 위로를 주기도 한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할 수 있을 때까지만 가도 괜찮다는 것이 아이들에게 큰 위로가 될 정도로 우리 사회가 아이들을 몰아붙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당장의 효과를 기대하지 못해도 이후의 성장을 바라보며 때로는 어리석게 보일 수 있는 비효율성을 이어간다. 그 어리석은 비효율성으로 학생 중 그 누군가는 삶의 희망을 얻고 기회를 얻고 성장할 이유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바라볼 때, 과거의 모습과 관계없이, 현재의 모습 그대로를 품으며, 성장을 이룬 미래의 모습을 기대하는 교사와 부모의 마음이 아이들을 끝없이 성장시킨다.
그 축복과 은혜의 통로가 될 수 있음이 오늘도 난 감격스럽고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