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떠났지만, 내가 만났던 학생들이 수능을 칠 때면 기도하는 마음으로 수능 시험감독을 하곤 했었다.
고3 담임할 때는 수능 끝난 날, 감독을 다녀와서 반 학생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돌렸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위로는 특별하지 않았다. 그냥 학생 이야기를 들어주고 애썼다고 얘기해 주는 게 다였다.
수능 본 학생들에게 금기어는 수능을 잘 쳤냐는 질문이고, 수험생들에게 금기 질문은 어느 대학을 진학했냐 하는 것이다.
큰딸이 수능 칠 때 교회나 학교에서 많은 이들에게 엄청난 응원의 선물을 받았다. 결과가 나왔을 때 그분들께는 결과를 일일이 알려드렸다. 먼저 물어보기가 어려웠던 많은 분들이 기뻐하셨고 난 더 감사했다.
그러나 제자들이라도 먼저 결과를 묻기는 어렵다. 게다가 학교를 떠나서 더 이상 학교에서 마주칠 일이 없다면 더욱 그러하다. 담임이 아니었던 학생들이라면 그저 각자 꿈의 길을 잘 가고 있다고 믿는 것이 마음 편했다.
그런데 어느 해 수능이 끝나고 한 학생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담임반 학생도 아니었고, 고1 때 영어교사였을 뿐이었는데... 물론 영어멘토링 학습코칭의 멤버로 상담을 해주면서 교감했던 제자이긴 했다. 그렇다고 100여 명의 멘토링 학생들이 모두 내게 보고하듯 결과를 알려주는 것은 아니었으니, 결과와 상관없이 그 연락 자체가 이미 반가웠다.
그 문자의 내용
선생님 잘 지내셨어요? 수능 끝나고 정신이 없어서 선생님께서 수능 잘 치고 연락 달라고 하셨던 말씀이 이제야 생각 났네요ㅠㅠ 죄송해요ㅠㅠ 올해 워낙 만점이 많아서 아쉽긴 하지만 전과목에서 수학 하나 틀렸어요ㅎㅎ 수능 다가올 즈음에 한동안 영어모의고사 점수가 떨어져서 불안정했었는데 선생님이랑 1학년 때 멘토링할 때처럼 다시 꾸준히 문제 풀고 준비했더니 수능 때는 영어 실력 발휘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ㅎㅎ 다 선생님 덕분이에요ㅎㅎ 당분간은 등교도 해야 하고 면접 준비도 해야 해서 안되겠지만 늦으면 다음 봄에라도 꼭 선생님 뵈러 가겠습니다 그때까지 건강히 잘 지내세요
감격스러움으로 문자를 확인하고 이렇게 답해주었다.
내가 기억하고 응원하던 **에겐 놀랍지 않을 결과일 수도 있겠지만 그걸 이뤄내기 위해 **이가 애썼을 날들을 생각하니 뭉클해지네 이런 순간에도 날 기억해 주고 약속을 지키는 너의 인성도 감동이구 남은 과정도 마저 잘 이뤄내길^^ 수고 많았다 U deserve it!
그리고 제자는 서울대에 진학했다.
학생들에게 이 제자의 사례를 자주 언급한다.
특정 과목이 불안해질 때 조급함으로 이불 땡기기 하듯 한 과목만 몰두하는 게 아니라 평정심과 자기 확신을 가지고 늘 하던 대로 균형을 유지하면서 조금씩이라도 매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 제자가 영어가 불안해져서 영어에만 집중했다면 다른 과목의 밸런스도 붕괴했을 것이다. 비중을 조정할 수는 있지만 과목 간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꾸준히 일상처럼 이어가는 노력이 중요한 것이다.
그게 영어멘토링 학습코칭할 때 강조했던 거였다. 멘토링 학습 내용을 미뤄두었다가 학원숙제처럼 전 날에 다 하려 하지 말고, 매일 꾸준히 하라고 했다. 분량을 채웠더라도 조금씩이라도 매일 꾸준히 한 흔적이 없는 학생들은 경고를 주고 탈락시킨다고 초반에 엄중히 경고도 했다. 무료로 진행하는 과정이니 추가 신청, 탈락 등에서 자율권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등학교에서는 대다수의 학생들이 거의 끝까지 살아남았다.
특히 상위권 학생들은 영어는 늘 뒷전으로 밀리게 되어 있는데, 내가 제시한 최소한의 시간 투자, 그것도 되도록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라는 전략적 학습 방향이 학생들이 학원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불안해하지 않으면서 꾸준한 자신감을 이어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영어뿐 아니라 다른 과목을 꾸준히, 자기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는 감사의 인사도 많이 들었다.
제자처럼 평정심과 자기확신을 가지고 조급해하지 않고 학습을 이어갈 수 있으려면 되도록 이른 시기에 사소한 노력으로 찌질한 습관부터 형성해야 하고, 그 습관을 확정 지어가는 확신 속의 자신감으로 "마음의 의지를 몸이 기억할 때까지" 점차 성취를 이뤄가야 한다.
그 걸음은 초라해 보이지만, 그 걸음이 모였을 때 얻게 된 소소한 성취의 기억이 지속적인 행복의 성장 걸음을 보장해 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억지로 더 애쓰지 않아도 좋은 성적으로도 보상받게 될 것이다.
성적 자체가 목표가 되고, 성공이나 행복 자체를 추구할 수는 없는 거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즐기듯 해내면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성취와 성공과 행복을 누리면 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