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켈러의 예수, 예수>
예전만큼 거리마다 성탄절 노래가 울려 퍼지지 않는다. 저작권 문제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은 소음 규제 때문이라고 한다.
어쨌거나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의 생일로 기념하는 날임에도 종교와 관계없이 거의 전 세계의 축제 같은 날이 되었다는 것이 의아하지만, 크리스마스 시즌에 가장 인기 있는 곡은 기독교적인 메시지가 담긴 찬송가가 아니라, <Last Christmas>, <All I Want for Christmas>와 같은 단지 크리스마스에 얽힌 실연이나 사랑 노래이니 정말 성탄절의 의미가 제대로 전해지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고 팀 켈러 목사님의 <Hidden Christmas>라는 책의 몇 구절을 발췌하여 정리해 보려 한다.
우리말 번역판 제목은 <팀 켈러의 예수, 예수>
프롤로그 : 소란한 축제에 가려진 한 사람을 찾아서
Christian holyday 중 세상의 가장 큰 holiday이기도 한 것은 크리스마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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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의 불빛을 강조하는 풍조는 희망이 세상 바깥에서 온다는 기독교의 믿음에서 기원했다. 또 선물을 주는 행위는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신 예수님께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예수님은 모든 영광을 버리고 인간으로 오셨다. 어려운 형편의 이웃을 향한 관심은 하나님의 아들이 사회 상류층이 아니라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셨음을 환기시켜 준다.
Chapter 1 눈먼 세상의 빛, 예수
크리스마스는 감상을 최대한 배제한 가장 현실주의적인 인생관이다. 크리스마스는 “힘을 내! 다 함께 힘을 합하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어!”라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어둠의 세력에 무관심하지 말고 오직 저항하라고 가르치지만, 그렇다고 그 세력을 우리 힘으로 이길 수 있다는 환상을 부추기지도 않는다. 기독교는 ‘우리가 최대한 애쓰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낙관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미래의 디스토피아만 내다보는 비관론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문제가 아주 심각해서 우리 스스로는 치유나 구원을 이룰 수 없다. 세상은 심히 어둡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사 9:2). 이것이 크리스마스가 선언하는 메시지다. 보다시피 세상에서 빛이 솟았다고 하지 않고 세상에 빛이 비친다고 했다. 그 빛은 바깥에서 왔다. 이 세상 바깥에 빛이 있으며,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그 빛을 가져오셨다. 아니, 좀 더 확실히 말하면 그분이 바로 빛이시다(요 8:12 참조).
그렇다고 기독교는 무력함을 말하고, 인간의 노력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희망과 빛은 바깥에서 왔다는 것을 받아들인 이후의 인간의 노력은 그제서야 의미를 부여받고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는 메시지다. 크리스마스는 그 희망을 비춰주는 상징 같은 날이다. 그분이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희망이기 때문이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내 안에 있지 않다. 자신의 부족함과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해결의 시작이다.
성 어거스틴이 남긴 유명한 고백이 있다. “주님 안에서 안식을 얻기까지는 우리 마음에 평안이 없나이다”. 성 어거스틴은 사람이 다른 무엇을 즐거워하는 것 같아도 그 기쁨의 실제 근원은 하나님이라고 믿었다. 당신이 사랑하는 대상은 그분에게서 왔으며, 그분의 낙관이 찍혀 있기에 사랑스럽다. 모든 기쁨은 정말 하나님 안에 있으며 나머지 즐거움은 다 파생적이다. 알든 모르든 정작 당신이 찾으려는 대상은 그분이기 때문이다.
파생적인 즐거움은 한계가 있고 공허하다. 학생들은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컾크"를 꿈꾼다. 커플 크리스마스를 줄여서 이렇게 부른다. 그런 아이들에게 사랑은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타이밍이 되면 자연스럽게 시작되는 것이니, 당장 곁에 있는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를 더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라고 조언한다. 누리고 있을 때는 정작 모르는 사랑이다.
그 사랑에 대한 갈구도 본질적인 기쁨과 즐거움의 힌트도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에 담겨 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가 곧 빛이 임한 방식이다.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며, 이 아기에게 붙여진 다섯 가지 칭호는 놀랍게도 하나님께만 해당된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인데도 아기로 태어나신다. 이런 주장은 다른 어떤 주요 종교에도 없다. 그분은 인간이시면서 또한 하나님이시다.
그저 ‘예수 탄생을 축하한다’는 흔한 크리스마스 인사로는 이 놀라운 탄생의 의미를 다 담아내지 못한다. 놀라서 말을 잃고 바라보며 경의와 사랑과 찬송에 젖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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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도 고생을 겪으셨고 용기를 내셔야 했다. 친구들에게 버림받고 억울하게 고문당하다 죽는다는 게 무엇인지 그분은 아신다. 크리스마스는 당신이 겪는 일을 그분도 아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께 아뢰면 그분이 다 이해해 주신다.
낮아지는 섬김의 사례는 인간들끼리도 감동인데,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이야기는 인간의 이성과 상상을 초월한다.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라고 했다. 이 빛은 선물이다. 은혜의 선물로 기꺼이 받아야만 당신의 것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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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는 선물을 받는 때이기도 한데 어떤 선물은 받아들이기가 참 어렵다. 선물의 성격상 당신의 자존심을 삼켜야 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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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는 우리가 철저히 잃어버린 바 된 존재라서 내 힘과 노력으로 나를 구원할 수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 아들의 죽음이 아니고는 그 무엇으로도 구원받을 수 없음을 뜻한다. 우리 스스로 분발해서는 행복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다.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선물을 받으려면 내가 죄인임을 인정해야 한다. 은혜로 구원받아야 한다. 자기 삶을 통제하는 권한을 내려놓아야 한다. 내키지 않더라도 아주 낮은 데로 내려가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는 밑바닥까지 내려와 우리를 사랑하셨다. 이 얼마나 위대한 사랑인가!
성탄절이 비워냄으로 더 넘치게 채움 받는 역설을 마주하며, 그 사랑과 은혜를 감사하는 날이라면 더 감격스러운 기쁨의 날이 될 것이다.
Chapter 2 울고 있는 인생의 생명줄, 예수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영웅담과는 거리가 멀다. 평범한 사람들은 물론 죄인과 범죄자들도 가감 없이 다 포함되어 있다. 물론 이 족보의 완성은 예수님이며, 그 부끄러운 족보의 의미를 팀 켈러 목사님은 이렇게 설명한다.
착한 사람은 받아들여지고 악한 사람은 배제되는 게 아니다. 누구든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받아들여진다. 당신도 예수께서 이루어 주신 일을 믿음으로써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예외가 아니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을 수 없는 사람도 없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회개하고 믿으면 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창녀와 왕, 남자와 여자, 유대인과 이방인, 서로 다른 민족이나 인종, 도덕적인 사람과 부도덕한 사람이 모두 대등하다. 똑같이 잃어버린 죄인이고 똑같이 사랑받고 받아들여진다.
마태복음 1장은 “낳고”의 연속이다. ‘누구는 누구를 낳고 누구는 누구를 낳고…….’ 그래서 지루한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어디에나 편만하여 성경의 족보에서조차도 그분의 자비가 뚝뚝 떨어진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신다. 우리는 다 그분의 가족이다. 히브리서 2장에 보면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을]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11절)라고 했다.
이것을 다른 측면에서 볼 수도 있다. 모든 문화는 구성원들에게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을 얕보고 자신들의 우월성을 스스로 자랑하도록 몰아간다. 어쩌면 그 상대는 인종이나 계급이 다른 사람들일 수 있다. 어쩌면 당신은 교육 수준이 아주 높은 ‘먹물들’이라고 해서, 아니면 아예 배운 게 없는 ‘무식쟁이들’이라며 상대를 경멸할지 모른다. 또 어떤 사람들의 정치적 관점이 나라를 망친다고 생각하여 그들을 깔볼지도 모른다. 이런 모든 예에서 당신은 여태 배운 대로 상대를 속되고 부정한 괴짜로 보면서 자신만은 괜찮다고 여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관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세상은 혈통과 돈과 인종과 계급을 중시하지만 그분은 이 모두를 뒤집어엎으신다. 예수님의 교회 밖에서 애지중지되는 그것들이 교회 안에까지 들어와서는 안 된다. 그분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바깥세상에서 퍽이나 중요한 것들이 나의 집에서는 그렇게 중요해서는 안 된다.”
남들과 비교해서 자신의 우월함을 수치와 객관적인 데이터로 증명하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예수님의 가치관은 가진 자들에게, 가지려 하는 자들에게 큰 도전이 되었다. 그 도전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한 바리새인들의 이야기가 성경에 많이 언급된다.
예수님은 부끄러운 족보를 완전케 하셨다. 인간의 노력과 명성과 가진 것으로 얻어낸 완성이 아니었다. 오히려 부끄러움을 인정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이었다.
약속이 이루어지는 데 오랜 세월이 걸렸다. 심지어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시기 직전 400년 동안에는 메시아는커녕 선지자 하나도 그 백성에게 보내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잊으신 듯 보였고 아무도 오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분은 오셨다.
당신의 시간표로 하나님을 판단할 수는 없다. 더디어 보일 수 있으나 그분은 결코 약속을 잊지 않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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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무난하다고 여기는 기간이나 계획대로 움직이는 경우가 사실상 전무하다. 그분은 우리의 의제나 일정에 따르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침묵에 대해 인간은 조급함과 불안함으로 반응하지만 믿음은 기다림이다.
Chapter 3 우리 중 하나가 되신 하나님, 예수
그분과 “함께"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 본문과 복음서 전체에 따르면, 그 말은 우리가 예수님의 임재 안에 있어 그분과 대화하고 그분께 배우며 매 순간 그분의 위로를 받는다는 뜻이다. 성육신의 목적은 그분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다. 형언할 수도 없고 접근할 수도 없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인간이 되셨다. 즉 우리가 알고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되셨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으로 이 사랑을 알 수 있다.
이는 마땅히 우리를 충격에 빠뜨릴 일인데도 우리는 무덤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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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구약시대와 다르게) 이번에는 왜 불꽃이나 회오리바람이 아니라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을까? 이번에는 심판하러 오신 게 아니라 심판을 당하러 오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의 죗값을 치르고 인류와 그분 사리의 장벽을 허물어 우리와 함께 계시러 오셨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아기 예수의 이미지는 절대 당연하지 않다. 우리는 늘 충격으로 반응해야 깊은 감격과 감사가 넘칠 것이다.
Chapter 4 가장 낮은 데로 내려오신 왕, 예수
오직 예수님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약자를 위해 왔다.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사람들을 위해 왔다. 나는 그들의 행위를 봐서가 아니라 내가 이룬 일을 통해 그들을 구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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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생애의 정점에 이르러 그분이 오르신 곳은 왕좌가 아니라 십자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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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나 필요하다. 문화적 권력의 중심부도 거기에 포함된다. 즉 영향력과 재능과 재력과 아름다움을 갖춘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에도 그리스도인들이 필요하다. 그런데 크리스마스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는 그런 사람들에게 매료되거나 그들 쪽에 유리한 편견을 품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 가운데도 섞여 살면서 그들을 이웃으로 사랑하고 섬겨야 하지만, 그러다 보면 유혹이 따른다. 그래도 우리는 그들을 사랑하고 섬길 뿐, 멋과 권력의 ‘중심부’에 들려는 욕구나 갈망일랑 버려야 한다.
크리스마스는 인종과 혈통과 부와 지위가 결국 중요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난한 자들에게만 아니라 유복한 자들에게도 호불호의 편견을 품어서는 안 된다. 지위와 재산을 숭배하는 속물이 되어서는 안 되지만, 그런 사람을 상대로 우월의식에 빠져서도 안 된다.
크리스마스 정신을 깨닫는 그리스도인은 이 모든 것에서 해방될 수 있다. 예수께서 성공의 세상적 개념을 전복하셨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제목처럼, 오히려 세상의 가장 큰 holiday라서 역설적으로 진정한 의미가 <숨겨진 크리스마스>에 대해 팀 켈러 목사님은 복음에 바탕을 두어 우리에게 은혜와 감격을 회복시키는 선물을 하고 있다. 일독하며 은혜받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