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년실에는 AI가 둘 있다

by 청블리쌤

우리 학년실에 AI가 둘이라는 소문이 있다. 남자 하나, 여자 하나.. 각각 M(Male) 1, F(Female) 1이라고 불린다.


업무처리가 정확하고 빠르다고 붙은 별명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뭔가를 물으면 대답은 바로 하지만 먼저 말을 하지는 않으며, 평소에 선생님들의 대화에 거의 참여하지 않고 둘이서 조용히 일에 집중하며 컴퓨터 업무관련 도움을 청할 때 바로 달려가 도움을 드리는 속성이 더 크게 반영된 것 같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경쟁하듯 각자의 업무를 처리하고, 학년실의 업무를 덜어주는데, 일을 하는데 거리낌이 없어 적어도 둘 사이에서는 일을 떠넘기는 양보가 미덕일 정도다.

둘의 공통점은 퇴근시간을 넘기면서까지 업무를 하지 않고 칼퇴 하는 것, 시간 절약이라도 하듯 봉지커피믹스를 마시는 것, 무슨 일이든 마감시간이 아니라 개시 시간에 (심지어 개시 시간 전에도 미리) 제출하는 급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 MBTI의 극강 "I"라는 것... 그래서 동학년 3년만에 AI들끼리 겨우 개인적인 대화를 시작했다고 한다.


여자 AI는 중3 담임을 오래 해서 입시에 대해 물어보면 바로 답이 나온다.

남자 AI는 고입 서당개 3년, 풍월만 좀 읊는다.ㅋㅋ


그런데 11명 담임쌤 중 나 혼자 남자다ㅋㅋㅋ

얼마 전 졸업선물에 필요한 학생 개별 영문이름이 필요하다는 학년회의를 하는 도중, 난 바로 구글설문으로 입력양식을 만들고 각반 학생들에게 공개할 링크를 회의가 끝나자마자 담임쌤들께 바로 공유해 드려서 회의 마치자마자 쌤들은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바로 입력을 받았다. 물론 입력 후 뒷정리는 내 몫이었다. 내가 자초한 기쁨이자 즐거움이었다.

이런 일을 해도 선생님들은 더 이상 놀라지 않는다.

어떤 분은 영문이름이 필요하다는 회의 도중에, 원리는 잘 모르지만 내가 뭔가 해줄 것 같다고 생각하셨다고 했다. 학년초에 비상연락망 작업도 비슷한 원리로 해드렸던 기억을 떠올리시면서...

업무에 빠르고 정확하다는 것은 단지 엑셀, 한글, 구글드라이브 등의 프로그램에 능하다는 의미만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단순노동을 최소화하면서 효율적으로 작업할 것인가 기획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디지털 문해력을 기반으로 그런 생각과 경험이 축적되면 순식간에 기획하면서 바로 실행이 가능해진다.

쌤들은 우리를 AI라고 언급하면서, 실수할 때 폭소를 터뜨리신다. 우리에게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 영역이지만, 그분들께는 즐거움이다. 인간다운 모습에 오히려 위로를 받으시는 것 같아서, 때로 놀림을 받는 것 같으면서도 불쾌하지 않다.

"AI도 모른다, 못한다.. AI도 틀릴 때가 있네"가 주는 위로.. 그래서 때로는 일부러라도 실수를 많이 하고 싶을 정도라서 실수하는 게 덕분에 두렵지 않다.

물론 제 기능(?)을 다 할 때면 쌤들께 도움이 되고 있는 것이니 이 또한 나쁠 게 없다.

그런데 보기보다 난 실수를 많이 한다. 빠르다는 건 인정하지만, 정확하다는 건 동의할 수 없다. 속도를 선택하면서 희생한 영역이다. 내 성격상으로도 어쩔 수 없다.

정확성은 속도를 빠르게 하면 교정할 수 있는 시간 여유와 차후의 기회를 얻어 다듬어갈 수 있으니 난 미리 실수하는 편을 선택한다.

정확성은 단번에 이루는 게 아니라 점진적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난 공부도 이렇게 해왔고, 학생들도 이렇게 학습코칭한다. 애초에 완벽에 대한 부담은 갖지 말고 실수를 통해 점점 다듬어 가도록.

둘이니까 서로 보완도 된다. 한 번은 메일머지로 고등학교 설문지 개별출력하는 방법을 선생님들께 공유했더니... 여자 AI는 바로 익혀서 다음 번 고입지원확인서 작성 때 양식에 반영해서 선생님들께 널리 퍼뜨렸다. 놀라운 학습능력이었고 배워서 남주는 철학의 발현이라서 놀랐다.

대부분의 쌤들은 배울 생각 없이 편리함을 누리셨고, 덕분에 AI들은 행복했다.

학교 현장에 이런 명언이 있다.

“능력자가 될 수 없다면, 능력자 옆에 있어라”

협력하면 되니까 모두가 모든 영역에 다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는 거다.


그렇지만 난 누군가에게 아쉬운 부탁을 잘 못한다. 그래서 나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업무를 빨리 익히고 내가 알아서 하려 한다. 덕분에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많아져서 감사하다.

나를 인정해 주고 우쭈쭈해주시는 것은 덤이다. 올해는 학년실에 누님들이 많아서 그 우쭈쭈에 기분이 더 좋았다.

쌤들은 내년에도 두 명의 AI가 다 가동하는 드림팀이 유지되기를 원하셨다.

날 원하는 분들이 있다는 것,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건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알고 보면 난 그다지 유능하지도 않은데...

keyword
작가의 이전글수능영어 1등급이 안 나오는 9가지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