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에도 꽃이 핀다 4화
극 중에서 씨름을 은퇴하려는 남자 주인공 백두에게 씨름부 코치직 제안이 들어왔다.
자신이 없어 씨름판을 떠나는 백두가 그 제안을 현실적으로 고려할리는 없었다. 형들이 동생인 백두에게 코치직을 수락하라고 설득한다.
형 : 아이 도대체 왜 망설이는데? 니는 이런 자리가 쉽게 나는 줄 아나?
백두 : 내는 장사 묵은 적도 없는데 그, 코치를 우예 하는데?
형 : 그거랑 이거랑은 하등의 상관이 없다니까? 아버지가 그렇게 숱하게 장사를 지내셨지마는 응? 여 가르치는 거는 영 파이다 아이가? 응? 그, 뭐이? 그, 그, 전달력, 응? 전달력, 그, 이해시키는 거, 응? 야? 뭐지, 그 이해시키는 거 뭐지?
형 2 : 아버지는 티칭이 안 된다. 티칭이 안 되는 기라.
형 : 그래, 티칭! 티쳐, 어.
이와 비슷한 장면이 시장의 아주머니들의 대화에서도 이어진다.
장사를 여러 번 지내서 실력을 인정받은 다른 인물과 장사 타이틀도 없이 은퇴를 선언한 백두 중에서 누가 더 코치가 어울릴지 대화하는 장면 중에 한 아주머니가 이렇게 얘기한다.
지가 잘하는 거랑 남들 가르치는 거랑 그거는 또 다른 거거든.
아니, 이제껏 우리집 가시나를 거쳐간 과외선생님을 봐도 서울대 나온 아가 제일 못 가르치더라, 어?
‘아니, 이게 와 이해가 안 가지?’
‘아, 이거를 와 모르지요? 어머니’
이카면서...
영어를 가르친다고 학생보다 영어를 더 잘 하는 건 아니다. 적어도 미국에서 몇 년 살다 온 제자보다 영어 스피킹을 더 잘할 수는 없다.
육상코치가 전성기 때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코치로서 현재 선수보다 더 빠르게 뛸 수는 없다.
위의 대화는 스포츠에 관한 것이었지만, 교사로서 난 티칭에 대해서 생각했다.
목회자이신 아버지는 정작 장남인 내게 목회의 길을 권한 적이 없었지만, 대학교 때 나는 거룩한 부담감으로 기독동아리 전국수련회에 참가하여 목회자 진로를 놓고 기도하며 진지하게 고민하기로 마음먹었다.
수련회 프로그램 중에 그 당시 이랜드 그룹의 사목(회사목사)이셨던 분의 특강이 있었다.
내 마음의 고민을 알기라도 하듯, 목사님은 놀랍게도 목회자의 조건에 대해서 언급하셨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거룩한 헌신 등의 늘 듣던 본질적인 조건 말고 예상을 뒤엎고 이런 조건을 이야기하셨다.
"20분 동안 한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언변이 있어야 한다"
충격이었다. 인간적인 연약함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워주시니 내적인 헌신과 소망으로만 그 길을 걸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현실적인 기준의 조건이라니...
어린 시절 새벽에 월드컵 중계를 아버지와 함께 보고 있었는데, 새벽기도 시간이 되어 아버지가 교회를 가시는 걸 보고 난 목사는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였다면 축구 중계를 중간에 끊고 새벽기도를 인도하러 갈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TV를 끄고 억지로 교회를 데려가지 않으셨던 것도 지금 생각하니 놀랍다. 물론 내가 자발적으로 따라나섰다면 아버지도 기뻐하셨을 것이지만.
그리고 아버지는 팝송이나 가요를 집안에서 틀어놓지 못하게 하셨다. 그래서 늘 우리 집은 클래식 음악만 넘쳐흘렀다.
나랑 동생들은 각자의 공간에서 아버지 몰래 가요와 팝송을 들었다.
그러면서 나는 절대 이런 음악과 노래를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니 목회를 하면서 찬양을 듣는 것이 더 복된 일이겠지만, 가요와 팝송을 멀리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인데, 그 당시에는 목회자의 길은 세상과 담을 쌓는 희생이 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수련회 기간 동안 포기하고 헌신할 내적 소명에 귀를 기울이기를 원했는데...
이렇게 간단한 테스트 하나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었는지...
물론 내적 소명과 거룩한 헌신을 전제로 하신 말씀이었을 것이다. 그 조건에 충족이 된다고 해서 모두가 목회자의 길을 걷는 건 아닐 것이니...
난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다고 믿었다. 아무래도 20분 동안 의견과 마음이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건 내 능력 밖이었기 때문이다.
목회자의 길에 대비한 나의 부족한 능력에 괴로워할 이유도 없었고, 거룩한 헌신에 대한 부담감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렇게 난 교사의 길을 확정지었다. 수련회의 기간은 정말 목회자로 헌신하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아니라는 것을 확인받으려는 시간이었을지도.
물론 학생들에대한 사랑과 헌신의 소명의식이 전제가 되긴 하지만 이 설득의 능력은 교사에게도 절실하게 필요한 능력이었다. 공부하기 싫은 아이들을 설득하고, 잘 모르겠다는 아이들을 설득하며, 착각 속에 괴로워하는 학부모님들을 설득하고, 현실적인 진로와 학습코칭으로 설득하는 등... 설득의 연속이다.
그리고 가르친다는 건 늘 벽에 부딪히는 일이다. 모두가 내가 준비한 말 그대로 다 흡수하지 않는다. 손실률과 반사율이 생각보다 너무 크다는 것도 교사로서 치러야 할 좌절의 아픔이다.
그러니 교사는 내가 뭔가를 많이 알고 있다는 것보다, 어떻게 전달하고, 어떻게 이해시키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
아주머니들의 대화에서 서울대 학생이 제일 못 가르친다는 건 일반화할 수 없다. 서울대에 갔다면 자신만의 언어로 자신의 지식체계를 누군가에게 전달할 능력을 이미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게 자신의 지식체계에서의 언어인지, 남들에게 전달되는 언어인지는 분명 다를 것이다.
교사 자신의 지식을 뽐내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면, 교사는 어떻게든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게 그들의 언어로 전달하고 설득하고 이해시켜야 한다.
그래서 재수 등의 아픔을 겪은 교사가 더 유리할 수도 있다.
예전에 한 국어쌤께 국어 잘하는 비결을 물었더니, 자신은 국어를 계속 잘해와서 어떻게 잘하는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존경이나 감탄이 나오지는 않았다. 자신이 잘 하고 잘 아는 것 자체만으로, 그 날것만으로는 아이들의 입맛에 맞는 요리가 나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고, 교사라는 신분은 하기 싫어도 눈높이를 맞추는 노력을 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게 왜 이해가 안 되지? 이걸 왜 모르지? 이런 의문이 생기면 안 되는 것이다. 특히 자신이 그런 이해의 어려움을 겪지 못했다면 학생들을 만날 때 그런 의문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중학교 와서 고등학교보다 수준은 더 낮아졌고, 학급 간의 영어실력 격차는 더 커진 상황에서 모든 아이들을 다 이해시키고, 설득하지 못하는 나 자신의 무능함과 무력감에 빠져 자조하듯 글을 쓰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는 것...
사실 교사의 자질은 많이 안다는 것, 전달력이 뛰어나고 잘 가르친다 것으로 결정된다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의식적으로 학생들과 학부모님들의 입장이 되도록 애쓰는 것이라 믿고 싶다. 그래야 나의 부족함이 느껴져도 끝까지 힘을 낼 수 있을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