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o’s company, three’s a crowd.
둘이면 동행, 셋이면 군중이다.
둘 사이에 눈치도 없이 한 사람이 더 끼어들면 어색해지는 안 좋은 상황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 추가 설명
Two’s는 Two is의 줄임말이다.
그리고 a crowd와 달리 company 앞에 a가 없는 것은 동행이나 동반을 의미할 때는 셀 수 없는 명사이기 때문이다. 앞에 a를 붙이면 회사 등의 의미가 된다.
난 늘 이런 식이었던 것 같다. 3명 이상의 모임을 넘어서기에는 MBTI의 극강 I에 해당하는 성격이다.
둘 이상의 사람이 옆에 있으면 내가 누군가에 하는 말이나 전체를 향하는 말에 극히 조심하게 되었다. 제 삼자가 평가단이 되어 나의 말을 판단할 거라는 과한 자의식이 작용하거나, 모두에게 해당되거나 이로운 말을 해야 한다는 강박 같은 생각에 난 그저 청중이 되는 안전한 쪽을 선택했던 것 같다.
학년실에서 선생님들끼리 대화가 이어지는 상황에서도 난 늘 침묵을 지켰다. 교직경력이 쌓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러면 수업은 일대 다수인데 어떻게 할 수 있냐고?
내게는 수업이나 강연도 일대일 느낌이다. 거의 나 혼자서 떠들기 때문이다.
내 수업은 이제껏 interactive 하지 못했다. 그 이유도 위의 사실로 설명이 될듯하다. 교감을 하다 보면 셋 이상의 무리에서 대화를 이어가는 상황과 비슷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생님들 사이에 말이 없는 것으로 인식되던 내가 우연한 기회에 선생님들 대상으로 강연을 하고 나서 거의 모두가 놀라움을 표현했다. 반전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너무 쑥스러움이 많고 말도 없는 내향적인 내가 무대에 서면 돌변했기 때문이다. 이번 주 우리 학교에서 강연하고 나니 선생님 한 분이 평소 모습과 앞에 섰을 때의 모습이 가장 다른 넘버원이라고 하셨다.
언젠가 강연에서도 강연이 시작되는 순간 목소리 톤부터 달라졌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이번에 진로상담교사로 발령받는 친구쌤과 통화를 했다. 고등학교에서 고3 담임으로 맹활약을 하던 친구는 중학교에 내려오게 되어 고등학교로 올라갈 방법을 찾았지만, 좌절되었고 두 번째 중학교 부임지에서 진로교사를 운명처럼 받아들였다. 그리고 진로교사로서 발령지는 여전히 중학교였다. 고등학교에서 입시에 필요한 역할을 해주고 학생들에게 진심을 전하며 상담을 해줄 수 있는 역량에 비해 중학교 진로교사는 그 무대가 좁아 보였다. 그래서 친구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고등학교에 비해 절실함과 현실 인식도 부족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무력감을 느끼지 말고, 그냥 정말 그대를 필요로 하는 단 한 명의 학생을 만난다고 생각하라고... 그 우주 같은 한 학생의 인생은 절대 사소하고 작은 것이 아닐 것이니... 어쨌거나 우리의 진심은 일대일 만남을 통해 인격적인 변화에 더 큰 영향을 줄 것이니..
그러면서 가능성은 적지만 혹 내가 수석교사가 되었다면... 앞에 나서서 뭔가를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냥 학교 선생님들의 고충과 고민을 일대일로 들어주고 싶었다고 얘기했다. 내가 해결사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이야기를 잘 들어줄 자신은 있다고...
쑥스러움이 많던 나는 이제까지 어떤 만남에서도 일대일 대화를 할 때는 비교적 편안하게 대화를 이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학생, 학부모, 동료 교사, 딸들... 그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보통은 친밀한 관계나 안정적인 관계 규정에서 대화가 시작되지만,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전혀 모르는 선생님이나 학부모님과 대화를 하고 상담을 하는 놀라운 일도 경험하고 있다.
초등학교 때 영화의 주인공이 불치병으로 죽는 장면을 보고 비장한 마음으로 의사가 되겠다는 순진한 생각을 품었다가, 중2 때 개구리 해부하다가 거의 기절하면서 의대의 꿈을 접었지만, 혹 내가 의사가 되었다면 정신과 의사를 꿈꿨을 것 같다.
교사로서 주어진 만남에 정신과의사만큼의 치료나 치유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현실 인식은 있지만, 그렇다고 절대 사소하지도 않은 일대일 대화의 중요성과 그 기회에 늘 감사하다.
일대일 대화가 가능해지는 것은 물론, 대화가 시작되어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것도 절대 사소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뢰가 바탕이 되어 비판 없이 무조건 들어줄 수 있다는 안도감이 그런 열린 대화를 이끌기 때문에... 내가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다는 건, 감격스러운 기회일 수 있음을 늘 느낀다.
사범대 대학생일 때 버스에서 고등학생이 홀로 앉아 있어 예비 교사로서 뭔가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대화를 시도하려 했는데 즉각 학생이 나를 피해 도망갔던 굴욕적인 기억이 생생하다. 나의 순수한 의도는 끝내 증명되지 못했고, 그 학생에게 나는 뭔가 수작을 걸려는 낯설고 불편한 빌런으로 남았을 거다.
그 일이 아니라도 나의 순수한 의도와 아무런 대가 없이 도움을 주려는 마음이 다 증명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심지어 학교 학생들조차, 담임반 학생들조차 그들의 신뢰를 억지로 강요할 수 없다. 내가 먼저 학생을 불러서 상담을 해주려고 해도 학생이 마음을 열지 않으면 교사로서의 갑질에 불과할 수도 있는 거였다.
코로나 첫해 서로 얼굴도 못 본 상태에서 온라인으로 학교를 운영하던 시기에 영어멘토링학습코칭을 신청한 60여 명의 학생들에게 전화상담을 했었다. 어떤 학생들은 낯선 번호여서인지 아예 전화를 받지 않았고, 어떤 학생들은 나를 영업사원인 것처럼 불편해했다. 내가 학년부장이고 학교 영어선생님이며, 멘토링학습코칭 멘토라는 정체를 밝혔음에도 전화 목소리만으로도 나를 불편하게 여기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낯섦에 대한 경계는 당연한 것이었으니 상처받지 않으려 애썼다. 그런데 어떤 학생들은 내 전화상담에 몰입했고, 실제로 교육의 변화가 일어나기도 했었다. 신기하게도 그런 학생들의 숫자가 적지 않았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학교 등교하기 전 난 2-3번의 전화상담으로 학생들의 영어학습을 도왔다. 그렇게 생긴 교감이 이후 등교해서 수업할 때 친근함으로 바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때 느낀 것도 상담의 주도권은 내가 아닌 피상담자라는 사실이었다. 내가 아무리 준비를 많이 하고 애정과 열정으로 대하고 싶어도, 상담시간을 결정하는 것은 학생들이었다. 0분에서부터 5-10분, 심지어는 한 시간 이상 상담이 이어진 적도 꽤 있었다.
내가 학생들을 차별한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차별적인 대응이었다. 결국 나의 열정은 학생들이 설정한 열정의 경계를 넘어설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친구 자녀들 컨설팅을 해주고 싶어도, 친구가 먼저 마음을 열고 신뢰를 줘야 하고, 부모의 친구일 뿐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아이들의 마음도 열려야 한다.
그래서 한 번씩 성사되는 학부모 컨설팅이나 자녀와의 컨설팅 기회가 나는 너무 신기하고 감사하다. 거저 얻을 수 있는 신뢰는 아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체험에서 나오는 여유는 늘고 지혜도 쌓이지만, 학생들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의 신뢰는 오히려 반감된다. 아이들뿐 아니라 학부모들도 젊은 선생님들을 더 선호하는 것도 세월의 흐름으로 갈수록 불리해지는 내 입장에서도 반박하거나 불만을 가질 수는 없다.
그래서 타이틀이 중요한지도 모른다. 원래 잘 알고 있거나 친하기 때문이라서가 아니라 정신과 의사라는 타이틀에 기대어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도 한다.
수석교사의 타이틀이 없어도 그와 비슷한 역할인 강연을 초대받는 대로 다 받아들이는 것은 세팅된 환경에 초대받은 것이라서 들이댄다는 생각은 안 들지만, 학교에서 난 언제든 마음이 열려 있으나, 수석교사의 타이틀 없이 일대일 대화 등에 내가 먼저 들이대며 초대할 수는 없다.
나이가 들어도 학생들과 학부모님들이 날 좋아해 주고 신뢰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담임으로 퇴직하고 싶다는 욕심을 품었지만, 오히려 최전선에서 아이들을 만나는 담임의 자리에서 은퇴하고 나의 경험을 후배 교사들에게 전수하며 담임으로서의 길을 터주는 것이 더 현실적인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면 2년 전의 수석교사에 지원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 내게 수석교사를 권했던 많은 분들의 아우성 같은 응원이 나의 고집으로 막혀서 내 귓등 가까이 가지도 못했다. 지원했다고 되리라는 보장은 물론 없었겠지만...
마음만은 청춘이라는 망상 말고, 나이에 따른 달라진 역할을 받아들이는 것이 이미 오래전부터 요구되고 있었다는 자각이... 지금이라도 너무 늦지 않게 이뤄진 것이길... 그리고 행동과 결정으로도 이어지길...
동학년 담임을 2년 6개월 같이 했던 친구 선생님이 사교성은 없지만 인복을 누린다는 글에 이런 댓글을 남겼다ㅠㅠ 사교성이 있을 수 있다는 획기적인 발상의 개혁 같은 엄청난 임팩트였다. 사교성 정의가 뭐든 진심이 전하는 감동이었다. 댓글을 통해 쌤의 진심도 전해졌다. 감사했다.
자칭 사교성 없는 선생님이 누리시는 인복들은, '사교성'의 재정의가 필요한 것 아닌가 싶어요. 가벼운 립서비스가 아니라 진심으로 자신이 가진 좋은 것들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어 하는, 그것을 즐기는 능력자이시니.. 진심+나눔+능력... 이것이야말로 완벽한 사교성인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