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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블리쌤 Feb 27. 2024

학부모님과의 상담, 개입의 경계

학부모님의 민원 때문이었을 것이다.

말 한 마디도 조심해야 하고, 문제의 소지가 없도록 해야한다는 소심함이 내향적이고 소심한 내게 미친 영향이 컸다.

전화 울리는 소리에도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뛰기도 했고, 그 증상은 꽤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지금은 전화 울리는 소리에 그런 놀람은 없지만 여전히 학부모와의 상담은 두렵고 떨린다.

학부모님의 연락을 받지 않고 무사히 1년을 지나는 것이 오히려 교사의 신뢰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중3을 3년 동안 하면서 의무적으로 상담을 해야할 일이 부쩍 늘었다.

이런 상담은 특히 더 어렵고 힘들다. 명확하게 해드리고 싶은 이야기를 참아야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선택은 학생과 학부모님의 몫이지만, 정보가 없어서, 방향을 몰라서 잘못 선택하는 일이 없도록 어떻게든 최선을 다한다. 그럼에도 뜻밖의 선택을 하시는 분들을 말릴 수 없다. 그런 교사의 권위도, 신뢰도 사라진지 오래다. 그건 민원아니라도 증명되는 교권의 현주소다.

이를테면 최근 몇 년간 일반고 컷을 대략 알려드리고, 고입 상황을 충분히 설명드리고, 일반고 컷 안에 들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말씀드리면 "합격 확률이 0%라는 걸 보장할 수 있습니까?"이렇게 되물으시는 경우다. 선택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책임질 수 있냐는 의도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럴 때 "0%가 확실하다"라는 확고함과 대범함이 없는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진다. 그냥 거듭 가능성이 거의 없고, 그렇게 일반고 불합격하면 추가모집으로 선택권 없이 원서를 내야 해야할 수도 있으니, 그나마 특성화고 중에 가고 싶은 데를 골라서 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다. 선택에 개입한다는 건 결과에 대한 책임소지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의 조언은 민원을 예방하는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마음이 더 힘들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무상으로 영어멘토링학습코칭 신청을 받는다. 그러나 고등학교와 달리 중학교 학생들과 학부모님들은 신청을 해놓고 오래지 않아 학원에만 집중한다. 

정규수업시간에 최소한의 것만 해주면 될 것을, 굳이 오지랍을 부려서 민원의 대상이 될 것을 각오해야 할 일이어서, 한편으로 영어멘토링을 이탈할수록 마음 한편은 편해진다. 성적이 오르지 않을 때 적어도 영어멘토링 탓을 하지 않을 것이니까, 그 책임에서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난 분명 확신이 있지만, 신청한 학생들에게도 다니는 학원과 양다리를 걸치면서 병행하다가 스스로 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때 학원을 그만둬도 된다고 대놓고 얘기한다. 

비겁한 조언이지만, 학원을 그만두고 내 코스에 전념해도, 불안함 때문에 이내 다시 돌아갈 거라는 현실인식이 작용한 조언이기도 하다. 

보통은 학부모님이 내게 중요한 질문을 하시지는 않는다. 

결국 나의 의견은 어떤 경우든 second opinion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또 그래야 한다. 

교육특구 고등학교에 있을 때, 그래도 학부모님의 존중심이 남아 있던 시절에... 어떤 어머님은 영어교과교사인 내게 상담을 요청했다. 중간고사 성적에 충격을 받으신 거였다. 난 확신을 가지고 당장 학원을 그만두고, 나의 특보수업과 영어멘토링에 충실할 것을 강력하게 말씀드렸다. 그리고 학생은 위기를 벗어났고 다른 학생들이 부러워하는 영어성취를 했다. 그 비결을 묻자 학생이 수업시간에 "너희들도 청블리쌤 특보를 들었어야지"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는 말을 듣고 난 감격했다. 그 학생은 8년이 넘도록 감사를 잊지 않고 내게 연락을 해 온다. 

나의 이야기라서가 아니라 자기의 고집과 소신이 있을 때는 그 길이 맞기를 기대하며 기다려야 한다는 걸 매번 체험하고 있다. 내 조언이 second opinion이 아니라 진짜 필요한 조언으로 들릴 때는 듣는 이의 마음이 가난해질 때였다.

사실 내게 학습방향과 입시에 대해서 질문을 하시면 정답처럼 대답할 수는 없다. 학생들마다 기질도 출발점도 과정도 다르기 때문이다. 

큰딸은 학원을 물론 그 흔한 인강도 없이 성균관대 공대를 논술로 진학했다. 그러나 그런 사례를 일반화해서 얘기할 수는 없다. 그러기에는 변인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가 강의 기회 때마다, 수업시간에, 상담을 할 때 조심스럽게라도 외치는 것은 본질에 가까운 메시지다. 구체적인 방법은 개별화되어 달라질 수 있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노력할 마음이 없다면 아직 어쩔 수 없지만, 적어도 노력하고 애쓰고 있다면 그 노력이 헛되서는 안 되기 때문에 난 소리를 높이고 싶다.

그러나 내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마음이 아프고, 무력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미안하게도 아픔을 겪고, 약간의 후회가 있는 지점부터 본질을 바라보는 시선이 생기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때이른 혹은 적절한 시기의 나의 조언이 훗날에 실감이 된다면 이미 그 아픔과 상처가 시작되었고 후회하고 있다는 뜻이므로, 과연 나의 조언은 의미가 있는 것이었을까를 돌아보게 된다. 

특시 상담을 하면서 가닿지 않을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는지가 느껴지면 괴로워진다. 이미 가닿아도 바로 드러나지 않는 교육적 성과로 인해 마음이 아픈데, 거부당하는 걸 직접적으로 구체화해서 느끼기 때문이다. 

말하면 아픈데 안 외칠 수가 없다. 누구라도 한 사람이라도 그 영향으로 방향을 잡을 수 있다면... 당장은 아니라도 뒤늦은 후회를 하면서라도 방향을 설정하려 할 때 용기를 낼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감도 있다.

그런데 갈수록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한 두려움이 커진다. 나도 실수할 수 있고, 나의 조언이 그 학생에게 안 맞을 수도 있는데, 그로 인해 오히려 부작용 같은 상황이 발생한다면? 학부모님이나 학생의 민원을 마주해야 한다면...

거기다 굳이 안 해도 되는 교육활동을 하면서 그런 일을 겪는다면 내가 스스로 자초했다는 자책과 괴로움에서 금방 회복되지는 않을 것이다.

의사들도 때로는 환자를 다 낫게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의술을 멈출 수 없는 것은 낫게할 수 있다는 근거 있는 확신과 실제로 치료효과가 검증되었기 때문이다. 

교육은 그보다는 더 미묘하고 복잡하다. 약효보다 교육효과는 더 더딜 수밖에 없다. 

의사가 치료를 포기할 수 없듯, 교사도 교육활동과 상담을 멈출 수 없다. 

물론 환자에게 치유의 의지가 있을 때 의사를 찾듯, 학생들도 어느 정도의 자발적인 의지가 있어야 진정한 교육활동과 효과가 발현되기 시작하니, 교사에게 모든 것이 달려 있는 건 아닐 것이다.

문득 나이가 들어가면서 상처에 더 취약해지고, 두려움이 커지니, 그래서 안전한 최소한의 교육활동으로만 자신을 제한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두려워진다. 

교사는 감정노동자임과 상처를 받는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였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 무게가 더 크게 느껴진다. 

블로그에서 컨설팅을 본격적으로 진행하다가 체력적인 이슈가 생겨서 잠정 중단했지만, 체력만의 문제는 아닌 것이었다. 

고객들의 필요와 요구를 세밀하게 살펴야 함은 당연한 일이지만, 눈치를 봐야하고, 반응을 살피면서, 확신의 어조는 옅어지기도 하고, 중립적인 입장으로 회피하기도 하는 것이 괴롭기도 하다. 

부디 듣는 분들이 알아서 필터링하실 텐데 혼자서 하는 괜한 걱정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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