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객 – 정현종 시인
성경에 긍휼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 특히 사랑이라는 단어로 대체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맥락에서...
쉽게 말하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맹자도 “측은지심”을 언급했다.
분노가 가득하면 절대로 불쌍히 여길 수 없다. 불쌍히 여기는 건 감정이입의 결과다. 그 사람의 맥락과 상황을 이해하는 초월적 반응이다.
교사 강연에서도 난 학생들과의 교감의 출발점으로 긍휼이라는 단어보다 더 잘 알려진 "측은지심"을 자주 언급했다.
이성에 대해 귀여우면 끝나는 것처럼, 누군가가 불쌍해지면 끝난 거다.
구체적인 지침이 없어도 된다. 그 이후에 나오는 말과 행동은 상대를 향한 용서와 배려와 공감, 그리고 도움과 친절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되어 있으니.
긍휼함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에 대한 몰입으로도 이어진다. 외면하고 무시해도 아무런 도덕적 책임이 없는 상황에서도 움직일 수 있는 동력이다.
상황과 지위의 차이에서 오는 일방적으로 베푸는 행위와는 구별된다. 상대의 자존감을 무너뜨리면서 자신의 행위의 만족을 찾는 것이 아니며, 갑과 을의 관계가 설정된 것처럼 갑의 훌륭함에 초점이 있지도 않다. 상대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전제가 된다.
학생들을 불쌍히 여긴다는 말이 잘못 전달되면 학부모님들의 민원의 타겟이 될 수 있어 조심스럽다. 우리 애가 어디가 어떻게 불쌍하냐고 따져도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존재를 무시하거나 결핍을 부각하는 불쌍함을 의미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상대가 원할 때 내가 채워줄 수 있는 여백의 깊이를 의미한다고 믿고 싶다.
사소한 제스처로도 상대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되어줄 수 있는 적극적인 행위의 결과... 어디까지나 상대방의 입장에서 진행되어야 하는 일이다.
스스로 불쌍하게 여길 수 있어야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는다. 결핍이 있어도 자존심으로 봉인되어 있으면 도움이 가닿을 수 없다.
나의 학습코칭을 받으려는 학생들은 스스로의 결핍과 부족함을 인정한 아이들이다. 그건 당장의 실력과 성적과도 무관하다. 오히려 실력이 최강이었던 학생들이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며 손을 내미는 것은, 어설프게 잘한다고 착각하는 학생들보다 강력할 수 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다.
내가 학교에서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영어멘토링학습코칭, 자기주도학습코칭, 청블리간섭반, 청블리 댓글부대 등을 진행하는 것도 학생들에 대한 긍휼 때문일 것이다. 내게 작은 선한 영향력이 있다면, 이미 나의 부족함을 아낌없이 채워주셨던 주님의 긍휼과 은혜가 흘러넘치는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나의 긍휼은 불쌍한 동정심이 아니라, 그들의 행복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나와의 만남만으로 충족될 필요는 없지만, 이 기회를 놓치면 아프게 될 이후의 모습이 떠올라 미리 마음이 아프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래 인용하는 시에서 그 교육 활동의 맥락이 설명된다.
방문객
-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섬》(열림원, 2009)
교육의 현장이 아니라도, 우리는 타인의 맥락과 사연을 읽어내야 한다. 그 사람의 등장은 지금 이 순간의 단편이 아니라 과거의 사연과 미래의 가능성까지도 모두 담겨 있기 때문이다.
나의 교육적 시각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함께 바라보는 것이다. 그게 한 학생의 인격을 존중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것이 시인이 말하는 환대다. 그 환대의 시작은 긍휼함이다.
과거의 아픔을 보듬어 주고, 지금 이 순간 있는 모습 그대로 상대를 존중하고 받아들여 주면서, 미래를 함께 꿈꾸는 것이다.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님의 2024년 3월 3일 주일설교에 영감을 받아 작성함)
https://youtu.be/mlTBGq782yc?si=PfxuEskJjkvbUCw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