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생을 마치고도 한참을 그리움과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과외하러 가는 버스 안에서 교생했던 학교를 지나치면 당장이라도 뛰어내려 달려가고 싶었다. 야자 마칠 때까지 교문 앞에서 기다리면 볼 수 있는 아이들을 절대로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암묵적인 룰을 지키면서 그리움을 다 삼켜내야 했다.
임용시험과 대학원시험준비를 하던 교생 이후 대학교 4학년의 분주함 속에도 그리움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어느샌가 학생들의 이름을 노트에 적으면서 그리움이 실체를 붙들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꼭 교사가 되어 다시 만나겠다는 다짐은 그리움의 다른 표현이었다.
바로 합격해서 혹 그 학교에 발령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꿈같은 상상도 했었다.
훨씬 더 훗날에 그 학교에 부임해서 알고 보니 교생을 나갔던 사대부고는 5년 경력이 지난 1급 정교사 중에서 초빙 받은 교사들이 가는 곳이었으니 내게는 불가능한 꿈이었다. 그럼에도 그 꿈은 교사로서 나의 꿈을 현실적인 목표로 보게 해주었다.
그 해 임용에 합격해서 인근 고등학교에 바로 발령을 받았고, 교생지도선생님을 뵈러 갔다가 그 그리움의 실체를 마주했다. 선생님의 허락을 구해서 쉬는 시간에 몇 개 반에 들어가서 학생들을 마주하며 인사를 했다. 덕분에 student-teacher(교생)가 아니라 teacher로서 다시 설 수 있게 되었음에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아이들은 이미 내 꿈을 응원하고 있었다는 듯 뜨거운 박수로 축하해 주었다.
그리움의 완벽한 해갈은 아니었지만 교사가 되어 아이들 앞에 서겠다는 나 혼자만의 약속을 지킨 후, 이후 만나게 될 학생들의 예고편처럼 그리움과 동경으로 자리하던 그들을 마주했던 그 감격스러움은 25년이 더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들은 내 기억 속에서는 세월의 흐름을 비껴간 고등학생 모습 그대로지만, 현실에서는 아마 지금쯤 그 당시 자신들과 비슷한 나이의 자녀들 엄마가 되어 있을 것이다.
교생 후 학생들은 내게 손편지를 우편으로 보냈고 나도 일일이 손편지로 답장을 했었다. 내가 쓴 답장만 150장이 넘었다.
그런 나를 보고 누군가 마무리가 있어야 추억이 완성되는 것 아니냐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추억은 현실과의 단절"이겠지만... 난 그저 추억으로 화석화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리고 약속과 다짐을 다 이룬 그 순간 아이들과의 인사를 마지막 종례처럼... 오랫동안 가슴에 품었던 아이들을 놓아주며 그렇게 추억으로 봉인해 둘 수 있었다.
더 이상은 일상을 공유할 수 없다는 마무리를 머리로부터 가슴에까지 다 받아들였다.
그 후로 매년 난 학교에서 아이들을 떠나보내며 추억으로 봉인한다.
더 이상 일상을 공유할 수 없다는 현실을 더 이상 비장하지 않게 받아들이게 되는 무뎌짐의 순간까지.. 그 봉인의 과정은 어느 정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매년 이별을 하는데도 여전히 가슴이 먹먹하고 힘들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랑한 것만큼 이별이 더 힘드니 마음을 덜 줄까 하는 유혹과도 싸워야 한다.
볼 수도 있는데 보고 싶은데 더 이상의 만남이 허락되지 않는 박탈감은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이다.
특히 당연한 듯한 일상의 만남이 오래 지속된 관계일수록 그 슬픔을 넘어서는 게 불가능한 미션처럼 느껴진다.
나는 결혼 후 군대를 갔다. 아니 공익근무소집이 되었다. 결혼할 때 아내와 나의 나이가 만 25세였다.
출퇴근하는 공익근무도 첫 한 달은 훈련소 생활을 감당해야 한다.
결혼한 지 1년 반쯤 후, 아내의 배웅을 받으며 훈련소 담을 지나치는 순간부터 그리움이 차올랐다. 아내와 함께 걷던 거리의 골목골목조차 모두 그리웠다. 여유가 사치인 짧고 긴박한 식사시간에 아내가 해주던 밥에 대한 기억이 눈물로 구체화되었다. 눈물 젖은 빵은 내게는 또 다른 의미의 메타포가 되었다.
결혼하고 온 훈련생은 나 하나였지만 모두들 일상 자체의 그리움을 안고 있었다. 평소 당연한 듯한 일상을 박탈당한 후의 소소한 것에 대한 가슴 끓는 그리움과 갈구가 평범한 일상에 대한 감사로 차올랐다.
옆의 동료가 나가게 해준다면 당장 발가벗고 시내까지라도 뛰어가겠다고 말했는데, 우린 웃을 수가 없었다. 아무렇지 않게 반응하기에는 모두 정말 간절히 일상을 그리워하고 있어서 그 농담이 오히려 비장한 용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하루하루 이별을 산다. 일상을 공유하는 어제의 아이가 오늘의 아이와는 분명 다른 데 우리는 같은 척 그렇게 무디게 하루를 지낸다.
딸들이 어렸을 때 육아일기에 그런 말을 썼다.
김광석의 노래처럼..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던 거였다.
평범한 일상의 연속처럼 느껴지는 무딤을 깨는 순간 자녀들은 훌쩍 커버렸다는 현실을 자각하게 된다.
흰머리도 젊은 날의 내 모습과 차별을 두는 증거처럼 마구 생겨났다.
얼마 전 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에서 한 남자가 뒤에서 아버님 지나가겠다고 하며 지나쳐가면서 머리카락보다는 상대적으로 더 동안인 내 얼굴을 보고 당황한 듯 급 사과하는 일이 있었다. 충격이었다. 나랑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 보이는데 아버님이라니ㅋㅋ
아내의 말대로 염색을 해야 하나 고민하려다 말았다. 염색하면 더 젊어 보이긴 하겠지만, 실제로 더 젊어지는 건 아닐 것이니.
시간이 더 흐르면 나는 홀연히 누군가의 일상에서 벗어날 것이다. 교사로서 퇴직할 것이고... 딸들을 두고 먼저 천국에 갈 것이다.
둘째 딸은 기숙사를 데려다주며 울고 있는 나의 뒷모습을 눈물로 배웅했던 것처럼, 이번에 올라가서 잠깐 만났던 엄마도 눈물로 배웅했다고 한다.
곧 눈물 없이 이별하는 방법을 몸이 기억하게 될 거다.
나도 딸들이 집에 내려오거나 딸들을 보러 가는 건 너무도 행복하고 기쁜 일이지만 한편 두렵기도 하다. 다시 만남을 기약은 할 수 있지만, 그때까지는 다시 더 생생한 이별의 순간을 마주해야 하니까...
딸들의 독립은 내게, 그리고 딸들에게 그 무뎌짐을 일상에 새겨가는 이별 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