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동기들 6명과 오래간만에 만났다.
모두 영어교사를 하고 있고, 그중 한 명은 장학사가 되어 교감으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래간만에 만난 동기에게 “너 늙었다”라는 말을 눈치 안 보고 할 수 있는 걸 보니 서로 편한 사이임에 틀림없었다. 서로 달라진 외모보다는 거의 변함이 없는 목소리에 기대어 예전의 기억과 소통의 흔적을 찾으려 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난 여럿이 만나서 이야기하는 자리에서는 침묵을 지킨다.
모두 각기 다른 사연을 가지고 있었고 애환이 있었다.
서로의 힘든 일들을 위로해 주면서도 혼자서만 힘든 것이 아니라는 위로를 받는 듯했다.
그리고 나를 제외하고 거의 맞벌이를 하고 있었다.
서로 어디 사는지 물어보는데 위치만 다를 뿐 모두가 소위 1급 이상의 아파트에 살고 있었고 나와는 달리 당연히 모두 운전을 하고 있었다.
동기가 내게 사는 곳을 물어서 그냥 위치만 이야기해 주었는데, 그 근처 아파트냐고 되물어서 빌라라고 얘기했다. 동기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기대했던 대답이 아니었을 것이었다.
그런 류의 대화에도 어차피 낄 수 없었다. 나와는 살아가는 생활 수준과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3시간 반 넘게 주로 학교생활 위주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생활도 내가 겪는 세상과는 다소 달라 보였다.
나도 교사로서 힘든 일을 겪고 굴곡을 겪어왔지만 상대적으로 덜 힘든 학교에 근무했었다는 생각에 미안하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환경의 차이인 것인지, 그 환경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인 것인지 구별이 쉽지 않았다.
모두들 나이가 들면서 삶의 무게를 더 느끼고 있었다. 사립학교 교사와, 장학사인 친구를 제외하고는 중고등학교 순환근무를 명시한 대구시 인사규정 상, 고등학교의 생활에 익숙해져 있다가 첫 중학교에서 근무하면서 무력감을 느끼는 사연이 주된 화제였다.
올해 처음으로 중학교에 간 동기가 내게 강연 다니면서 다른 선생님들이나 학부모님들한테만 도움을 주지 말고 중학교 와서 헤매고 있는 동기들에게 도움을 달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내 강연 같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닌 듯했다.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서로의 대화는 끊임없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난 그저 웃으면서 침묵을 지켰다.
대학생 때도 난 과방에 모여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했다. 시간낭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걸 친목이라고 하고, 그 낭비한 시간만큼 더 친해진다는 걸 그때는 몰랐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다른 이유로 친목에 거리를 두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한두 명이 모여서 서로의 성장과 고민 해결에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소수의 만남이 아니라면, 모임에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것 같다는 평소 생각만 확인했다.
오래간만에 만나서 반가웠고, 이 나이 되어서도 서로 이름을 부르며 대학교 때의 느낌을 되살리는 그 편안함이 좋았지만, 내게는 길고 힘든 시간이었다. 몸이 너무 지쳤고, 다음날까지도 그 여파는 이어졌다.
동기들이 고생하는 이야기도 내겐 너무 우울한 이야기로만 들렸다. 우리는 이젠 더 이상 젊지도 않고, 도전해서 뭔가를 성취하기에는 무력한 상태라는 느낌도 들고, 더 나빠질 것만 같은 앞으로의 현실 세상이 두렵기까지 했다. 그래서 동기들의 이야기에 감정이입하지 않고, 공감하지 않고, 몰입하지 않으려 오히려 애쓰면서 마음이 더 힘들었다.
학교에서도 아직 나의 역할이 있고, 나를 믿고 기대는 사랑스러운 학생들이 많고, 교사와 학부모, 그리고 다른 학교 학생들, 대학생들까지 만나서 전해야 할 강의에 몰입하고 있어서인지, 그 대화에 공감하는 것 자체가 타협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도 그런 불안하고 힘들고 무력한 상황을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승진한 동기와 경제적으로 나보다는 더 성공한 동기들 사이에서, 아무도 나의 상황과 비교하며 내게 뭐라 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그동안 내가 간직해왔던 삶의 가치, 성공의 기준 등이 흔들리지 않게 꼭 붙들어야만 했다. 부디 그게 내 자존심을 지키려는 허망한 애씀이 아니길 바라면서.
내게는 승진도, 경제적인 여유도 우선순위가 아니었는데 동기들과 스스로 비교하면서 후회와 더불어 나의 그동안의 선택과 삶의 방향이 부정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예전처럼 그들의 이야기를 다 포용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공감하고 위로를 하기에는 내 역량이, 내 체력과 건강의 한계가 분명했기 때문에도 힘들었을 것이다.
평소 내게 주어진 역할과 사명만으로도 충분히 그 한계를 넘나들고 있으니까...
얼마 전 동학년을 하는 누님 쌤이 내게 수업과 담임역할 외에도 다른 쌤들보다 4개의 삶을 더 살고 있는 것 같다는 말씀을 해주셨다ㅠㅠ
학년부장, 학생멘토 및 학습코치, 외부강의 강사, 블로거...
학년부장의 무게와 부담감을 제외하고는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스트레스 없이 체력만 조절하면 되는 일이라서, 염려와는 달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듯하지만...
그러나 내가 가치를 두는 최우선순위 외의 일들이 사소해 보여도 오히려 내게 스트레스가 되거나 나를 더 힘겹게 하기도 한다.
그전에는 감당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아닌 것 같아 조심스러워진다.
그래서 4월쯤 잠정적으로 예정했던 몇몇 제자들과 만남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5, 6월은 더 바빠져야 할 것 같아서 계속 미뤄두게 될 것 같다. 그 미뤄둠조차 내게 짐이 되고 있다.
모든 일을 다 잘 할 수 없다면, 감당할 수 없다면... 일단 우선순위의 일에 집중해야겠다는 핑계만 대면서.
평소에도 사교적이지도 않지만, 그 외의 만남 등에 대해 동면 같은 삶을 다짐하다가...
분당우리교회 이찬수목사님이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에베소서 5:16)”라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시간의 두 종류인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를 언급했던 설교(2024.4.28.)가 내 고민과 맞닿았다.
나무위키 정의에 따르면 크로노스가 실제로 흘러가는 절대적 시간을 뜻한다면, 카이로스는 "기회를 잡을 수 있는 한순간" 혹은 인간이 평생 동안 체험하는 주관적 시간을 뜻한다고 한다.
즉 카이로스는 의미가 부여되는 시간을 말한다.
카이로스는 주관적인 시간의 흐름과 인식을 말하므로 그 의미 부여는 전적으로 본인에게 달렸지만, 교사 입장에서는 준비 안 된 학생들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도 같았다.
학생들을 학교에서 관찰하다 보면 이 학생들이 오늘 학교에 왜 왔는지 궁금해질 때가 많다. 야자 마치는 순간 단 1초의 시간도 허비하지 않고, 이미 떠날 준비를 다 갖춰놓은 학생들이 마구 뛰어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볼 때면, 이 학생들은 오늘 “집에 가기 위해” 학교를 온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매 순간의 목적의식을 외치고 다닌다. 매 순간 목적을 결심하려는 의지 없이는 시간은 세월처럼 그냥 흘러가 버리게 되는 것이니까...
<죽은 시인의 사회(1989)>라는 영화에서 키팅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
Carpe diem. Seize the day, boys. Make your lives extraordinary.
- 오늘을 잡아라. 너희들의 삶을 특별하게 만들어라.
키팅 선생님이 언급한 “카르페 디엠”의 원래 의미는 지금 현재에 최선을 다하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지금 이 상황을 즐기라는 의미에 더 가깝다.
17세기 영국의 서정시에서 “카르페 디엠”은 현재의 쾌락을 즐기라고 권유하며, 인생이 무상하고 세월이 빠르다는 내용을 담기도 했다.
과장해서 얘기하면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라는 노래의 정신과도 통한다.
(1962년 발표된 이 노래는 전후 복구나 재건 등의 현실 때문에 놀고 싶어도 놀 수 없었던 시대의 애환이 담겨 있었을 거라고 한다 - 나무위키)
이 문구는 고대 로마의 호라티우스의 시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카르페 디엠” 다음에 이어지는 시구가 “내일이란 말은 최소한만 믿어라”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쾌락이든 의미 있는 일이든 현재를 담보로 미래만 바라볼 것이 아니니 현재의 가치를 더 두라는 의미로 볼 수는 있다.
영화에서 키팅 선생님은 지금 우리나라 고등학생의 상황처럼 미국 명문사립고등학교의 입시 스트레스로 현재를 온전히 살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했던 거다.
미래를 위한 투자처럼 현재를 쓰는 것도 이 시간의 의미 부여이긴 하지만, 보다 본질적인 행복과 의미를 부여하는 그만의 해석이 포함되었던 셈이다.
오늘의 즐거움을 망설이거나 오늘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어떻게든 시간의 의미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크로노스인 시간을 카이로스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라면...
지식 하나 더 얹어주는 것보다 삶의 의미를 찾고 삶의 변화를 가져다주는 진정한 교육활동일 것이다.
특히 요즈음 나는 시간과 체력이 제한되어 있다고 느낄수록 크로노스가 아닌 카이로스에 대한 비장한 사명감이 들기도 한다.
지금 이 순간 시간이 주어져도 의미 있는 일을 할 체력이 되지 않는다면 충전이라도 해서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있는 휴식의 의미라도 부여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식이 사치라고 느껴졌던 젊은 날과 다른 현실 인식이 드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래야 나만의 카이로스를 지켜갈 수 있을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