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의사 같은 교사(부모)가 될 이유

by 청블리쌤

큰딸이 3살 때쯤인 걸로 기억한다. 교회에 다녀오면서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딸의 팔을 잡아당겼다. 나름 아이의 걷는 속도를 존중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아이의 속도를 한참 넘어선 아빠의 속도가 아이의 팔을 세차게 잡아당기는 행동으로 표현되었던 거였다. 순간 “뚝”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딸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여 내심 안심하면서도, 분명 손에 전해진 비정상적인 느낌이 그저 나의 착각이기만을 기도하는 심정이었다.

집에 들어와서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려고, 울지 않고 괜찮아 보이는 아이에게 만세를 시켜보았다. 아이는 한 손으로만 만세를 했다. 지체할 것 없이 바로 아이를 안고 응급실로 향했다. 자책감이 마음을 내리눌러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응급실에서 간단한 처치를 받고 돌아왔다. 아이에게 만세를 시켰는데 아이의 두 손이 다 올라갔다. 정말 만세였다. 마음속으로 난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혹시나 싶어서 만세한 상태에서 “반짝반짝”을 해보라고 했다. 양손을 반짝반짝 양옆으로 흔드는 동작이어야 하는데, 한쪽 손만 “반짝반짝”을 하고 있었고, 다른 손은 손만 올라간 채로 흔들림 없이 멈춰있었다.

더 큰 좌절감과 불안감이 엄습했다. 나의 욕심으로 아이에게 아픔을 준 건 물론이고 혹 장애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밤잠을 설칠 정도로 걱정을 했다.

다음 날 아내가 아이를 동네 정형외과에 데려갔다.

의사는 불안함과 걱정으로 아이 상태를 전하는 엄마의 말을 듣는지 안 듣는지, 아이의 상태를 찬찬히 살펴보더니, 웃으면서 괜찮다고 정말 별거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로 안심시켰다고 한다. 그러고는 아이의 팔을 확 돌려서 빠진 팔꿈치를 제 위치로 돌려놓았다고...

퇴근 후 집에서 활짝 웃으면서 만세와 반짝반짝 모두 다 잘하고 있는 딸을 보면서, 아빠인 나는 너무 기쁘면서도 한 편으로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지 많이 자책하고 힘들어했다.

그 일이 내게는 그게 아이의 속도를 존중해야 한다는 사명 같은 상징적인 장면으로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그 힘들었던 순간에 동네 정형외과 의사의 확신과 낭만적인 반응은 아이를 데려 간 아내에게도,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내게도, 치유의 결과를 마주하기 전에 이미 너무 큰 의미로 다가왔다. 때로 우리는 너무 현실적인 이야기보다는 다소 막연하지만 낭만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 말에 더 반응하게 되니까... 그리고 혹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기대하고 바라는 대로 되기도 하니까...

부모와 교사는 대개 최악의 가능성을 그려보고 철저하게 대비하려 한다. 특히 첫째 아이에 대해서는 더 그러하다. 둘째를 대할 때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첫째 때와 비교해서 너무 무뎌진 스스로의 모습에 놀라기도 한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어도 되었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 터득했기 때문이다.

부모나 교사의 그런 마음은 현실에 기반을 둔 걱정의 말로 아이에게 전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에 기반을 한 어른의 단정적인 말을 아이들은 출발점이 아닌 도달점으로 받아들인다. 아이의 미래를 응원하는 격려의 마음을 담았다 하더라도 아이들은 현실의 틀에 자신을 가둬두고 규정해버리기 쉽다.

물론 현실을 무시한 지나친 기대도 아이들에게 큰 상처가 되기는 마찬가지다.

아이에 대한 믿음은 그저 아이의 매 순간의 선택을 존중하고(그게 공부를 덜하겠다는 선택이더라도), 아이의 발달 속도를 인정해 주는 것이고, 당장의 결과를 확인하고자 하는 조급함에서 벗어나 과정을 즐기며 결국에 도달하게 될 그 순간을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그것이 오랜 교직 생활을 통해, 두 딸을 키우는 과정을 통해 알게 된 체험, 삶의 교훈이다.

학교에서 아이들과 상담할 때 당장의 성적을 놓고 어느 정도 이상의 대학을 갈 수 없다는 말을 하는 선생님들이 많다. 더 열심히 안 하면 그렇게 된다는 염려를 담았더라도 아이들은 그 말을 마음에 새긴다. 그리고 그 말은 자신이 노력해 봤자 별로 소용이 없을 것 같다는 스스로에 대한 합리화를 강화시키는 명확한 근거처럼 작용하기도 한다. 뭔가를 더 해보기도 전에 아예 포기하는 무력감으로 반응하기도 하는 것이다.

상대평가 시대에 나의 속도로 반드시 남을 이기고 앞질러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자유롭기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모두가 각자의 속도를 존중해 주고, 결국에는 도달할 점으로 멈추지 않고 전진하는 걸음, 걸음마다 박수를 보내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그래야 모두가 과정에서도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

큰딸은 지금 집에 자주 못 올 정도로 바쁘게 자신만의 삶을 개척하고 있다. 대학 가기 전 아이와 함께 했던 모든 시간이 축복이었고, 그 과정에서 행복했지만 훌쩍 커버린 딸을 보니 어렸을 때의 모습에서 시간 순삭된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한참 시간이 지나서 느끼는 거지만 김광석의 노래(서른 즈음에)처럼 우리는 매일 이별하고 있던 거였다.

오늘 딸의 모습은 어제와는 다르고, 내일 만나게 될 딸도 오늘의 딸과도 다를 거라는 걸 일상에 묻혀 생각하지 못하다가 한참이 지난 후에야 실감하게 된다.

예전의 모습을 그리워하더라도 이후에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지금 이 순간의 만남에 진심을 다해야겠다. 과거의 모습이 사무치게 그립던, 미래의 모습이 기대되던 상관없이 어쨌든 딸을 만나는 건 지금 이 순간에만 가능한 일이니... 내일이 되면 오늘이 아닌 내일의 딸을 만나게 될 것이니...

그래서 난 오늘의 딸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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