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로 시대별 음악을 들으며 추억 여행을 다닌다.
그 시절의 느낌과 기억도 함께 저장되어 재생되는 느낌이다.
노래에는 가사에 담긴 것보다 담기지 않은 여백이 더 많다. 여백이 작사가의 의도가 아니라도 상관없다. 어차피 텍스트는 읽는 이가 완성하는 것이니까.
아마도 노래의 느낌은 기억이 아니라 그 여백을 채웠던 감정일 것이다.
노래를 들으며 예전의 기억이 소나기처럼 쏟아져내렸다.
현세대와 비교하면 아날로그 같은 답답한 감성일지도 모른다.
지금 세대에게 강요할 수 없는 그 당시의 불편함은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에게는 낭만이었다. 지웠다 쓰면서 완성하는 생각, 그렇게 담아내는 손편지의 낭만처럼, 낭비하면서 더 깊은 생각을 담아내고, 그 수고와 애씀을 넘치는 정성으로 준비하던 시절이었다.
원하는 노래를 언제든 즉석에서 들을 수 있는 지금과는 달리, 8090년대 학창 시절 나는 라디오에서 들려주는 음악을 주로 들었다. 정말 듣고 싶은 노래가 있으면 사연을 담아 손편지 신청곡을 보냈던 시절이었다. 내가 듣고 싶은 노래가 운 좋게 선곡되는 기쁨은 오랜 기다림을 대가로 치른 만큼 더 감격스러웠다. 감사의 크기는 부족과 결핍의 크기에 비례했다.
듣고 싶은 노래를 듣기 위해 내 취향이 아닌 노래를 들으면서까지 기다려야 했는데 그 기다림이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훈련인 걸 그때는 몰랐다. 그러면서 나도 몰랐던 나의 취향을 발견하기도 했다. 선을 넘어야 자아를 확장할 수 있고, 타인에 대한 선을 지킬 수 있다는 역설을 음악이 가득한 삶으로 배웠다.
라디오를 들으면서 카세트에 공테이프는 늘 대기 중이었다. 원하는 노래가 소개되는 순간 녹음 버튼을 누르는 설렘도 있었다. 도입부에서 노래가 너무 좋으면 늦게라도 녹음 버튼을 눌렀다. 그래서 새로 발견한 노래는 늘 앞부분이 비어 있었다. 그나마 공테이프도 마음껏 살 수가 없어서 덮어쓰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자기만의 플레이리스트가 생기면... 소중한 누군가를 위해 음악선물을 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레코드점에서는 그 당시 최고 음질이었던 LP 판으로 플레이리스트에 맞춤으로 테이프 녹음을 해주는 것이 유행이었다.
자신만의 감정을 트랙과 여백에 눌러 담아 소중한 이에게 선물했다.
직접 이야기하기 힘든 고백까지도, 의도적으로 들키고 싶은 조심스러움으로 함께 담았다.
문득 공부에서도 비효율이 더 중요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멈춤은 낭비 같지만 낭만이며 오히려 제대로 된 성장의 기회일 것이다. 멈춰 서야 왜 그런지를 고민할 수 있으니까. 스스로 원리를 깨치며 배움에 이르는 길은 속도전이 아니다.
영어 단어를 종이 사전에서 직접 찾으면 찾아 헤매는 시간만큼 머릿속에서 스펠링이 계속 반복해서 각인된다.
지금은 바로 의미를 확인할 수 있으니 편리함으로 기억 정착의 기회를 맞바꾸는 셈이다.
생각의 깊이와 사고력의 발전은 느린 속도에서 숙성되며 자라는 것인데...
소위 '팝콘 브레인' 현상은 쇼츠폼 영상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궁금한 것은 바로 검색해서 생각의 여지를 주지 않는 편리함도 한몫할 것이다.
아날로그 시대에 약속 장소에서 기다림의 불편은 설렘이기까지 했다. 지금은 약속시간이 되기도 전에 각자의 위치를 바로 전화로 확인한다. 낭비 없이 모든 순간을 소비하려는 느낌이다.
축적과 숙성은 낭비 같은 과정이 필요하다.
인간을 대할 때는 더 그래야 한다. 각자의 타이밍에 대한 존중도 필요하고 무슨 일에든 긴 호흡이 필요하다.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는 조급함은 인간다움을 상실하게 한다.
학생들에게 여백과 기다림, 낭비 같은 멈춤이 절실하다. 여백만큼 자신만의 정서와 스토리로 채워지고 생각이 깊어지고 성장한다.
비효율의 의도적인 선택... 그것이 필요한 시대다.
영상이 발달한 디지털 네이티브 아이들에게 오히려 더 큰 경쟁력은 활자를 매개로 한 문해력이며, 편리함이나 효율로도 대체할 수 없다는 나의 일관된 주장은 시대착오적인 꼰대 마인드는 아닐 것이다.
교육의 본질과 인간성은 유행을 타지 않으며 AI로 대체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