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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망함 후 비교 지옥 벗어나려는 선택

by 청블리쌤

학교에서 남학생 한 명이 내게 정말 죄송스럽지만 꼭 말씀드려야 할 것이 있다면서...

용기를 한참 끌어모아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선생님 바지에 구멍이 난 것 같아요.

근데 그게 작지 않은 것 같아요..

급하게 확인한 후에 망연자실해졌다.

바짓가랑이 단이 뜯어져 있었다.

피해 규모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았지만 대참사였다.

언제부터 이러고 다녔는지 알 길이 없으니 민망해야 할 규모조차 가늠되지 않았다.

여분의 바지가 없는 나는, 민망함보다 이후 시간 대책 고민이 더 크게 느껴졌다.

아내에게 바로 전화했다. 지하철과 도보로 50분 소요되는 먼 길이었지만 아내의 예상되는 고생도 나의 절박함을 이기지 못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화장실 거울에서 비취 보니 다행히 서 있을 때는 거의 표가 나지 않았다.

아내가 지하철을 탔다는 연락을 받고, 10분 정도 걸리는 지하철역으로 여유 있게 나섰다. 아내의 알바 시작 시간에 겨우 맞출 시간이라서 함께 식사는 못할 것 같아 아내의 소울푸드 중 하나인 찹쌀도너츠 두 개를 꽃다발처럼 준비했다.

바지를 전해 받고는 허탈할 정도로 순식간에 작별했다.

학교로 돌아와서 급식실로 바로 갔다. 3학년 담임쌤들이 땀 흘리는 내게 운동했냐고 물으셨다.

난 지하철역까지 아내를 만나고 왔다고 하니, 그새를 못 참고 보고 싶어서 만나고 왔다고 단정하며 나를 서윗가이(sweet guy)나 로맨티스트로 모는 분위기였다.

바지에 구멍이 났을 뿐인데 서윗가이가 되다니ㅋㅋ

겨우 위기를 넘긴 안도감에 솔직하게 상황을 얘기했다. 누님 선생님이 우리도 그런 일이 한 번씩 있다고 말씀해 주셔서 큰 힘이 되었다.

그전에는 옷의 퀄리티를 생각하지 않고, 참사를 예방했어야 했다는 자책으로 민망함을 해석하며 움츠려들었는데...

너무 감사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뻔한 당위성이 아니라 그런 일도 있는 거라는 불완전함에 대한 인정이 이미 벌어진 일로 무력해지고 소심해진 나에게 괜찮다고 울리는 외침과 위로의 처방과도 같았다.

난 옷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아니 최소한의 예의만 갖추려 할 뿐, 옷 가격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넉넉하지 않는 집안 형편에, 아이들에게도 고가의 옷을 제대로 사 준 일도 없는데, 나라고 고급 퀄리티를 고집할 일은 없었다.

딸들은 그게 습관이 되었는지 빈티지샵에서 옷을 주로 산다.

그런데도 둘째는 고가도 아닌 내 옷을 탐낸다. 아빠 옷을 오버사이즈처럼 입고 다니고, 벨트도 양말도 목도리도 뭐든 자기만의 스타일로 소화한다. 심지어 오버사이즈 아빠 신발도 끈을 동여매고 신는다.

최근에 여름 신발로 2만 원대로 득템한 신발을 나 나름대로는 비 안 맞게 아껴서 신고 다녔다.

둘째가 오래간만에 집에 왔다가 내 허락도 없이 교회 갈 때 내 신발을 신고 나갔다가 그 가벼움과 편안함에 그리고 까만 색깔에 홀딱 빠졌는지... 내 신발을 줄 수 있냐고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얼마 전 내 신발을 탐내서 같은 모델, 작은 사이즈로 사준 신발은 한 학기 만에 거의 매일 하는 댄스 연습으로 거의 닳았다고 했다.

망설임 없이, 아낌없이 양도했다.

아까워서가 아니라 신발 사이즈가 안 맞아서 불편할까 봐 다른 신발을 사줄 수 있다는 메시지에 딸은 이렇게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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찡했다. 고가도 아닌 아빠 신발을 이렇게나 잘 신을 수 있다는 것이...

원하는 걸 다 채워주지도 못하고, 원하지 않아도 퀄리티로 아빠의 능력과 사랑을 증명하지 못해 미안한 건 오히려 나였다.

나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선물로 옷을 사주시면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난 늘 책 선물을 원했다.

어머니가 한 번씩 옷을 만들어주시기도 했고, 어떻게든 옷을 못 입고 다니지 않을 것인데...

책은 선물 아니면 사서 보기가 어려운 형편이었으니...

우리의 시간과 돈을 쓰는 곳에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드러난다. 그것이 우리에게 한정적으로 주어진 한계를 대하는 우리의 선택이다.

남들과의 비교를 통해서 우리의 가치를 증명하려 하지 말고 각자의 가치를 추구하는 선택을 존중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마침 수업시간에 비교급이 나와서 학생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비교급은 이미 알고 있는 친숙한 대상을 새로운 화제에 빗대어 명확한 정보를 주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자세한 비교급 설명은 다음 포스팅에서)

그 외의 용법으로 남용해서는 안 되는데, 늘 우린 비교의 현실을 강요당하고 있다.

그냥 자신의 의지로 비교의 굴레를 걷어 차버리고 비교를 거부해야 한다.

차를 소유하고 운전하는 이들을 존중하지만 차 없이 자전거로 출퇴근하면서도 비교우위를 내어 주지 않았다.

애초에 난 비교당할 생각이 없으니.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나를 지나치는 다른 선생님들의 차를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고, 똑같은 기준으로 삶의 성공 여부를 판단하지 않겠다는 다짐...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비교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필요한 거다.

그러면서 나 스스로 학생들 사랑하는 것으로는 누구보다도 우위에 있다는 비교를 하고 있는 모순적인 태도를 발견했지만, 그러나 그건 비교라기보다는 내가 추구하는 가치에 대한 자기암시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게 주어진 한계에 대한 인정, 내게 중요한 가치에 집중하는 것만으로 비교를 무력하게 할 수 있을 거다.

앞으로도 상대평가 성적으로, 학벌로, 연봉으로 각자의 처지와 환경 등에서 우리는 비교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그것조차 인정해야 할 현실이지만...

타인이 아닌 어제의 나하고만 비교해야 한다.

젊은 시절 나는 정말 못 가르치는 교사였지만 진심으로 학생들 옆에 있어주었고, 최선을 다했다. 내가 채우지 못한 부족함은 학생 스스로 나의 격려와 응원으로 스스로 채울 수 있었을 것이니 너무 미안해할 이유는 없었다.

나이가 들어도 변하지 않는 것은 멈추지 않는 노력이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나는 더 잘 가르치는 교사가 되어야 하고 그러도록 애쓰고 있으니 난 매 순간 교사로서 리즈시절을 갱신하는 거다.

비교는 같은 기준으로 판단하는 시스템이다. 각자 고유의 가치를 멈춤 없이 성장으로 이뤄내면 각자 예전의 모습만이 비교할 대상이 될 뿐이다.

난 나의 세계에서 가장 행복하다.

남의 행복을 갖지 못해 기웃거리기보다 내가 가진 나만의 행복에 집중할 수 있기를.

각자의 모습으로 행복하기를.

훗날 모두가 비교를 멈추게 되면서 "엄친아"가 뭐냐는 어리둥절함만 남는 날을 상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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