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사건, 다른 시각, 배려 한 스푼

by 청블리쌤

계급장 떼고 얘기하자고 하면?

난 못한다. 계급장 안 떼고도 잘 못한다.

중학교 시절 학교 선생님들께 인사하기가 어려웠다. 내 인사를 받아주실지 걱정되면서 그게 선생님을 귀찮게 하는 일은 아닐지 혼자 고민했다.

나의 소심함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충분히 주목받고 인정받아야 당당하게 인사할 수 있다는 자격에 대한 고민이 컸던 것 같다.

지하철역에서 매일 아침 지나치는 학교 선생님이 계신다. 학교에서는 서로의 존재를 무조건 인지하니 마주치면 인사를 하지만, 지하철역에서는 정면으로 얼굴을 마주치지 않는 한 인사 없이 지나친다. 일부러 거리를 두는 것은 아니다. 어느 날은 내가 걷기가 힘들 때 함께 지하철역에서 내려서 버스로 환승하면서 편하게 얘기를 나누기도 했으니.

뒤따르던 선생님 한 분이 둘이 원래 잘 아는 사이냐고 물으셨다. 그래서 매일 아침마다 지하철역에서 서로 모르는 척하는 사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아는 척한다는 말은 들었어도 모르는 척한다는 말도 있냐고 웃으셨다.

3인 이상의 모임에서는 친구들끼리도 난 침묵 모드다. 내 얘기가 누군가에게는 듣기 싫은 민폐의 이야기가 아닐지 고민한다.

나는 무대에서 마이크를 들어야 말을 한다는 3학년 담임쌤들의 해석은...

미리 충분히 고민하고 준비해서 어느 정도의 자격을 갖춘 말이라는 자기 검증을 통과해야 그 무대에서 말을 시작할 수 있다는 함의를 담고 있다.

언젠가 나를 친근하게 대해주시고, 진심으로 아껴주시는 누님선생님이 내게 말을 놓자는 제안을 하셨다. 그러나 난 절대로 연장자에게 말을 놓은 적이 없다. 직장에서 만난 사이가 아니라도...

누님쌤은 내가 너무 깍듯이 예의를 갖춰서 나하고 나이 차이가 아주 많이 나는 줄 아셨다고 했다.

난 그 친근한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노력으로도 안 되는 일이 있는 거다.

장황한 나의 이런 이야기는 지난주 있었던 사건의 성찰이다.

학교 부장교사 주최로 새로 부임하신 교장, 교감쌤 환영 저녁식사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교장교감쌤을 향한 야자타임 이벤트를 친목회장님이 기획하고 진행하셨다.

의도는 알 것 같았다. 2주밖에 안되는 서먹함을 단 번에 깰 수도 있는 획기적인 한 방이거나, 친한 사이끼리는 나이에 상관없이 말을 놓기도 하니 더 친해질 수 있는 분위기 형성을 기대한 것 같기도 했다. 차마 대놓고 할 수 없던 이야기를 농담을 가장해서 전달하는 기회이기도 했을 것이다.

모든 부장교사가 참여해야 하고, 교장, 교감선생님께서 가장 기분 나쁜 사람을 선정해서 기프트카드를 상으로 주셔야 하고, 기권할 경우 5만 원 벌금을 내야 하는 것이 이벤트의 룰이었다.

학생들을 만날 때를 제외하고는 일대일 대화만 겨우 하고 지내는 비사교성의 극단에 있는 내게 야자타임 미션은 가혹했다. 밥 먹다 말고 뛰쳐나가는 게 더 쉬워 보일 만큼.

가장 친화력이 좋으시고 언변과 유머감각이 뛰어나신 교무부장 다음으로 내가 지목되었다. 가장 목사님 같은 분위기에 실제 목사님 아들이기도 하다는 TMI를 굳이 얘기하신 것은 반전의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의도셨을 것 같았다.

그러나 반전은 없었다. 난 그냥 포기하겠다고 했다. 5만 원이면 내게도 손이 떨리는 큰돈이지만 벌금의 압박도 내겐 먹히지 않았다.

갑분싸 분위기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이후 단 한 분의 거부 없이 끝까지 진행되었다.

교장, 교감쌤도 호쾌한 웃음으로 반응하셨다.

이벤트 후 교장쌤도 기프트콘을 받으셨는데...

교장쌤께서 커피를 못하신다고 기프트콘을 선생님 한 분께 드리고 싶다면서...

나를 지정하셨다.

깜짝 놀랐지만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다.

그리고 벌금 5만 원을 카카오페이로 송금하고 친목회장님께 톡을 보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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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협조적이었던 내게 오히려 따뜻한 위로 같은 메시지를 전해주셔서 감사했다.

다음 날 학년실에서 담임쌤들께 야자타임 행사 때의 당황스러운 일을 말씀드렸다.

그저 나의 소심함으로 일어난 일임에도, 나의 이야기는 영웅담으로 미화되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평소 같은 소신을 지킨 반전 없는 일관성, 망설이지 않고 5만 원을 벌금으로 내려 했던 당당함, 주변의 분위기에 굴하지 않고 불편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던 처세... 결과적으로 벌금은 내지 않게 되었고, 교장선생님의 선택을 받아 기프트카드까지 챙겼으니.

내가 전략적으로, 멋있고 소신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나의 소심함의 그릇이 그 정도임에도...

있는 모습 그대로 나를 받아주시면서 존중하신다는 것을...

똑같은 일에 대한 다른 해석과 오히려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으시는 선생님들의 따뜻한 마음에 뭉클해졌다.

평소에도 유일한 남자쌤이면서 쑥스러움이 많은 나를 존중하시고 포용해 주시고, 아이들에게 진심을 다하시면서 담임의 역할을 모두 거의 완벽하게 잘 하고 계시고, 내가 하기 힘든 일들을 자원해 주시고, 회식이 어려운 나를 비난하기보다 대신 가거나 옆에 있어 주고 싶다면서 마음을 전하시는 이런 분위기를 미리 알았더라면 누구라도 할 수 있었을 학년부장 자리를 나의 부족함으로 망설일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나 혼자 너무 애쓰지 않아도 되고 부족한 모습에 너무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위로를 받은 느낌이라서 그저 행복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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