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부모와의 관계가 어려운 점

어렸을 적에 학습되고 만들어진 부모님과의 관계패턴이 지속되는 과정

어렸을때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어떠한 경험이 반복적으로 있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떠한 방법을 배우고 경험했는지에 대해서 최근에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가지 상황별로 부모님과 관계했던 방법들을 제가 무의식적으로 삶에서 반복하며 살았다는 것을 최근에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전에도 이러한 방어기제에 대해서 대략적인 사항은 이해하고 있었지만 일반적인 수준의 이해였고 구체적인 경우와는 연결을 시키지 못했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구체적인 사례와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부모와의 관계에서 익숙해진 관계패턴이 성인이 된 삶에서도 반복되는 것으로 인해서 중요한 삶의 결정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그러한 관계패턴을 깨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좀더 생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문제점은 자녀가 절대적으로 약자라는 사실입니다. 결국 힘의 균형이 맞지 않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동등한 입장에서 관계가 형성될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아이들은 부모가 틀렸다는 생각을 하기 어렵습니다. 부모의 절대적인 보살핌을 받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자신이 부당하게 학대당하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경우에도 부모는 절대적으로 옳고, 자신들이 무엇인가를 잘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하여 자신을 탓하거나 자신이 무엇인가를 수정해서 상황을 개선시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관계패턴은 무의식적으로 성인이 되어서도 반복되는데 그 당사자는 그러한 상황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언제까지냐면 부모가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고 부모와의 관계가 힘의 불균형이 있었던 관계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잘못된 부분들을 인식할때까지 말입니다. 그리고 


이와 연관된 심리학적 이론가로는 해리 스택 설리번 (Harry Stack Sullivan)과 엘리스 밀러 (Alice Miller)가 있습니다. 프로이드가 성적충동과 공격충동을 중심으로 한 욕동이론과 무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한 반면에, 설리번은 인간관계이론을 중심으로 그는 성장과정에서 상호작용하는 인간관계가 중요하다고 강조했으며, 이를 통해서 인간의 심리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는 대인관계에서의 갈등과 불안감에 초점을 맞추어서 사회적 상호작용과 개인적 발달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였습니다. 엘리스 밀러는 어린시절 부모와의 사이에서 만들어졌던 트라우마의 중요성에 대해서 언급하였습니다. 이러한 관계에서의 고통을 인식하지 못하고 무의식에 묻어두면 이러한 고통이 다른 형태로 표출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트라우마의 고통을 인식하기 어려운 사회적인 도덕규범, 예를 들면 기독교의 십계명 등으로 인해서 부모의 잘못을 인식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인해서 그 고통을 인식하지 못하고 고통속에 살아가면서 다른 대상에게 자신의 분노와 고통을 표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엘리스 밀러는 극단적인 경우로 히틀러나 스탈린등의 예를 들었습니다.  


저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엘리스 밀러의 "천재가 될수밖에 없는 아이들의 드라마"라는 책이 엄청난 도움이 되었습니다. 서양에서는 기독교의 십계명에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계명이 있다면, 동양에는 유교의 어른공경과 효도라는 가치관이 있습니다. 왕과 스승 그리고 부모님들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인 공경을 요구하는 이러한 정서는 부모를 객관적인 시각에서 볼수 있는 가능성을 거의 막아 놓았습니다. 한가지 전제조건은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상처받은 사람도 있고 악한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와 자녀사이의 관계에도 적용됩니다. 모든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좋은 부모일수는 없습니다. 부모들이 자녀에게 의도적으로 악을 행할수도 있고 무지해서 선한 의도라고 말은 하지만 악한 영향력을 줄수도 있습니다. 자녀들의 입장에서 이러한 것에 대한 분별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특히 눈에 보이지 않는 정서적인 폭력은 더 구분해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악영향은 자녀의 인생을 교묘하게 망가뜨릴수 있기 때문에 행복한 삶과 성공적인 삶을 위해서는 꼭 해결해야할 문제입니다. 


지난번에 이야기를 한번 했었는데 저는 생일을 12월30일에서 2월28일로 10개월 앞당겨서 학교에 일찍 들어갔습니다. 학교를 다닐때는 거의 저보다 2살많은 아이들과 같이 학교를 다닌 것입니다. 아버지는 막무가내로 저에게 윽박을 지르면서 학교에 가라고 했고 저는 울면서 무서워서 학교에 가지 못하겠다고 안간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저는 소리지르는 아버지가 무서워서 맨발로 도망가서 집밖에 있던 굴뚝뒤에 숨어서 혼자 한참동안 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무섭고 서럽고 두려웠던 그 감정을 지금도 기억할만큼 6살 어린아이에게는 충격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처음 학교를 갈때는 울면서 무섭다고 해서 어머니가 한달동안 따라다녔고 그 다음에는 혼자 학교에 다녔던 기억이 있습니다. 나중에 아버지에게 왜 나를 학교에 생일을 바꾸면서까지 일찍 보냈냐고 물어보니 아버지가 저를 35살에 나아서 늦게 낳은 편이라 본인이 한살이라도 젊을때 학교를 마치게 해주려고 일찍 보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몇년전에 사촌동생과 이야기 하면서 알아낸 사실인데, 숙부님이 저와 저의 형의 출생신고를 같이 하면서 그냥 학교를 일찍 가면 좋을 것 같아서 아무 생각없이 같은 2월 28일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야기를 맞추어 보면, 아버지의 동생이 잘 모르고 조카들의 생일을 바꾸어서 출생신고를 했는데 그거를 번복하기도 힘들고 하니 그냥 학교를 가라고 하면서 이유를 본인의 나이때문에 일찍 보냈다고 이야기를 한 것이었습니다. 어른들에게 보면 그렇게 심각한 일도 아니고 아무문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러한 일처리가 저의 삶에 엄청난 문제를 만들었다는 것을 이해하는데 저는 40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맬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는 어떻게 사람이 성공할수 있는지에 대해서 다양한 시각에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책을 읽으면서 제가 충격을 받았던 것은 미국에서는 일부러 1년 늦게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그것은 어린 시절에는 6개월 차이도 아이들의 발달에 엄청난 차이가 있고 조금이라도 발달이 많이된 아이가 학업성취도가 높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렸을때 좋은 학업성취도를 경험한 아이가 자라면서 자존감도 올라가고 나중에 성공할 가능성도 높다는 것이었습니다. 통계적으로 생일이 빠른 아이들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아이를 키우다보니 정말 아이때는 몇개월 차이가 큰 것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하면서 제가 생일을 바꾸면서 학교를 일찍 갔던 것이 얼마나 저의 삶을 어렵게 했는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학교에 가서 수업을 못따라가서 항상 남아서 공부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학교생활에 적응도 잘 못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다른 측면에서는 그런 공포스러운 경험은 저에게 트라우마가 되었습니다. 권위자들은 항상 저에게 좋지 않은 것을 억지로 시키고 제가 아무리 이야기해도 들어주지 않는다는 관계의 패턴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물론 비슷한 경험들을 가정안에서 더 많이 했지만, 학교갈때의 공포스러운 경험이 저에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이었습니다. 이러한 무의식적인 신념은 저의 사회생활 내내, 직장상사와의 관계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저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는데 나중에 책을 읽고 심리학 공부를 하면서 제가 왜 직장상사들과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하고 힘들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답변을 얻을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러한 관계패턴에 대해서 알지 못했던 시절에는 그러한 관계의 고통을 나만 당하고 있다는 인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은줄 알았던 것이죠. 나중에 애착트라우마에 대한 책을 읽고 린지 깁슨의 "감정이 서툰 어른들 때문에 아팠던 당신을 위한 책"등을 읽으면서 나의 삶이 왜 그렇게 정서적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웠는지를 이해할수 있었습니다.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고 관계 맺는 것을 두려워 했는지, 직장에서 왜 그렇게 인간관계로 고통을 받았는지에 대해서 이해할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중요한 다른 한 가지 사항은 비슷한 행동패턴을 반복하는데 있습니다. 어린시절 아버지가 저에게 일찍 학교를 가라고 할때, 저는 대항할 힘이 없었습니다. 힘의 불균형 때문이었습니다. 무섭고 두려웠지만 어쩔수 없이 학교를 가야 했습니다. 저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되는 결정이었지만 어쩔수 없이 가야하는 그러한 무기력감은 삶을 피폐하게 만듭니다. 나이가 들어서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할때 진급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아프리카로 진급을 해서 가는 기회가 있었는데 아내가 반대를 했습니다. 사실 그때는 그것이 얼마나 좋은 기회였는지 제가 충분히 인식을 하지 못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정서적으로도 그때는 저의 트라우마가 발현되어서 굉장히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이는 권위자들이 나에게 좋지 않은 일들을 하려고 하고 내가 이야기 해도 들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트라우마적인 인식에 빠져있을 때라는 것과 일치합니다. 만약 정서적으로 건강한 상황이었다면 직장 상사와 좀더 이야기를 해서 그러한 선택이 커리어에서 어떠한 의미가 있고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 질문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그 상황을 아내와 더 깊이 이야기 해서 설득을 시켜서 가장 좋은 선택을 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저의 세상과 권위자들에 대한 불신과 세상은 내가 이야기 해도 들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비정상적인 신념, 그리고 어린시절 트라우마가 되살아나서 감정적으로 굉장히 불안정한 시기였기 때문에 그러한 충분한 대화를 하지 않고 가지 않겠다고 해버렸습니다. 이러한 행동에 대해서 회사의 다른 사람들은 이해를 잘 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후로도 여러번 권유를 했지만 저는 완전히 얼어버린 이후였습니다. 트라우마의 상황에서 몸이 얼어버리듯 생각이 얼어버린 것입니다. 나중에 공부를 하면서 그것을 알게되었죠. 당시에는 제가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모든 상황이 사람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이해를 할수 없습니다. 회사의 다른 사람들이 제가 어린시절에 어떤 감정적 경험을 했고 트라우마를 경험했는지 어떻게 알수 있겠어요. 아무도 모릅니다. 본인 당사자도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그러한 어려움을 어떻게 언어로 표현할수 없겠습니까? 결국 자신의 선택이 어리석었다고 살면서 내내 자책만 하다가 삶을 마감하는 것이죠. 만약 자신이 했던 선택이 너무나 치명적인 결과를 만들었을 경우에는 자살을 할수도 있습니다. 저의 경우에도 오랜 시간동안 괴로워 했습니다. 왜 그런 어리석은 결정을 했는지 이해하지도 못한채 한참동안이나 자신을 자책하면서 괴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부모와의 관계는 사람의 일생에 있어서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특히 오늘의 삶에서 불행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면 반드시 부모님과의 관계와 가족들과의 관계를 다시한번 되짚어 보아야 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꿈에서 깨어나는 듯한 느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