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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여주고 재워주는데 무슨걱정이야?

부모들이 하는 심각한 착각들

제가 학교 다닐때 한국에서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하던 말이 있습니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아무 걱정없이 공부만 하라고 하는데 그걸 못해? 이런 이야기를 하는 부모들의 논리는 사람은 먹고 잘곳만 있으면 아무런 걱정이 없어진다는 논리입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욕구들만 만족되면 사람은 공부정도는 쉽게 할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러한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거짓말인지 잘 알수 있습니다. 


왜 부모들이 이러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저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고 학문적으로 연구가 된 내용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러한 거짓말이 한국의 많은 가정에서 기정사실처럼 믿어지고 있으며 자녀들의 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거짓말에 대해서 검증을 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요즘 한국 가정에서 이러한 거짓말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은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아직도 있는 것은 사실인것 같습니다. 


한국은 일제강점기와 육이오를 지나면서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민족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서 먹고 사는 문제와 살 집이 있다는 것은 생존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즉 생존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만족된 상황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위기 상황을 기준으로 한 것일 뿐입니다. 위기 상황만을 벗어났다고 해서 더이상의 욕구가 없다고 단정해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사람은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닙니다. 아래의 그림에서 마슬로우의 인간의 욕구 피라미드가 나와있습니다. 기본적인 인간의 생존을 위한 욕구가 피라미드의 가장 하단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욕구가 만족되면 사람은 두번째 단계에서 안전을 원한다고 주장합니다.  그 다름에는 사회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는 것을 원하게 되고 다음에는 존경과 성취, 그리고 인생의 목적을 생각하게 되고 다음에는 유일한 개인으로서의 창조성, 아름다움 등을 원하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즉 부모들이 재워주고 먹여주는데 무슨걱정이 있냐고 하는 것은 인간의 욕구에 대해서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무식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식민시대와 전쟁이 끝났는데 아직도 그 위기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하면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위기 상황에서 먹고사는것만 해결되면 모든 욕구가 만족되었다는 인식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친밀한 관계에서 오는 즐거움을 누릴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의 안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아이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수 없게 됩니다. 마음이 불안한데 어떻게 머리와 마음을 써야 하는 공부를 할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욕구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공부라는 것에 대해서 잘못된 인식이 있습니다. 사실 글을 읽고 쓰는 것이 일반인들에게 허락된 것은 인류 역사에 비해서 최근의 일입니다. 사실 조선시대만 해도 한글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사회에서 소수의 사람들만 한문을 읽고 쓸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한글의 사용을 반대할만큼 폐쇄적이었습니다. 한글이 만들어지고도 한참동안이나 이러한 상황은 크게 변한것 같지는 않습니다. 중세시대에 서양에서도 라틴어를 알고 쓸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라틴어로 쓰인 성경을 읽을수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의 수도사나 지배층으로 한정되어서 교회에서 스테인드 글래스를 이용해서 성화를 표현하고 이를 통해서 성경을 가르칠 만큼 글을 알고 쓰는 것은 극소수만의 사람들에게 허용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쿠텐베르그의 금속활자 발명을 통해서 책의 가격이 싸지고 라틴어로 쓰여진 성경이 독일어와 영어등으로 번역되면서 일반인들도 성경을 읽을수 있게 되고, 종교개혁을 통해서 일반인들도 성경을 읽어야 하는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일반인들도 문자를 배우는 것에 관심을 가지면서 문맹률이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한국이 문맹률이 낮은 나라라고는 하지만, 이러한 학문이나 공부를 모든 사람들이 잘할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글을 알지 못해서 무시받고 대우받지 못했던 시대적인 상황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공부의 중요성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무리가 되더라도 자녀들에게 교육만큼은 잘 시키고 싶어하는 상황이 만들어진 경향이 있습니다. 저도 아이를 기르면서 보니 그래도 공부를 잘하는 것이 가장 안정적으로 삶을 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이에게 공부를 하도록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한국적인 상황은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에 따라서 다른 부류의 직업을 갖게 되기 때문에 이로 인한 사회적 신분의 문제가 존재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도 부모들이 공부를 시키려고 하는 이유중에 하나가 되는것 같습니다. 따라서 한국에서 공부를 하라고 하는 부모들의 이야기는 단순히 공부하라는 요구가 아니라, 부모들의 두려움이나 수치심을 자녀에게 투영하는 과정으로 이해할수 있습니다. 공부를 하지 않았을때 만나게 될, 부모가 느끼는 사회적인 편견과 경제적인 불안정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을 자녀들에게 투영하는 과정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부모들의 두려움과 수치감을 투사받은 자녀들은 평안함을 갖기 어려워집니다. 


위의 내용을 정리해보면, "먹여주고 재워주는데 무슨 걱정이 있어, 너는 공부만 하라고 하는데 그것도 못해" 라는 말은 많은 모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단순한 말이 아니라, 그 안에 부모의 감정이 투사되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무엇인가를 잘못하고 있다는 죄책감을 느끼도록 압력을 받는 것입니다. 부모들이 자신들은 필요한 모든것을 자녀들에게 해주었는데 자녀들이 제대로 행동하고 있지 않다고 책임을 전가하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은 이미 말씀드린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이러한 모든 대화들은 서로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삶의 에너지를 갉아먹는 행위입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공부를 잘하기를 바라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지만, 이러한 언어는 자녀들이 공부를 잘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고 오히려 공부하는것을 방해하는 언어이며, 자녀들에게 죄책감과 무기력감을 선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부모들의 두려움과 수치감을 투사하는 역할만 합니다. 말하는 의도와 언어가 전혀 일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와 가정에서 이러한 거짓말들을 조금씩 제거해 가기만 해도 우리의 가정과 사회는 더 건강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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