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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감정의 무관심

(Childhood Emotional Neglect)

어린 시절 어른들이 하던 이야기를 엿들을 기회가 많이 있었다. 방에서 잠을 자려고 애쓰고 있을 때, 어른들이 거실에서 이야기하던 이야기가 많이 있었는데, 그중에 "배부른 소리 한다"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내용은 마음이 힘들다거나 삶의 의미를 모르겠다는 마음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내용에 대해서 밥 먹고 살면 족하지 무슨 마음의 어려움을 호소하냐는 내용이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어쩌면 일제시대와 육이오 전쟁을 겪어오신 세대에게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고, 그 문제만 해결되면 가장 중요한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불평불만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많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에게 외롭다거나 보이지 않는 마음의 어려움을 호소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배부르고 등 따뜻하니 나오는 배부른 소리로 들렸을 것입니다. "식사하셨어요?"가 그 시대의 인사말이 되고 배고팠던 시대의 소원이 "쌀밥에 고깃국 먹어보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나왔던 이야기일 것입니다. 


이러한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분들이 기성세대였던 시대에서 어른들의 감정적 어려움도 무시되었다면, 어린이들의 감정적 어려움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특히 자녀들의 교육에 관한 한국인의 관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데, 제가 주변 분들이나 방송을 통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는 "네가 무슨 걱정이 있어, 밥 줘, 재워줘, 학교 보내줘. 밥 먹고 공부만 하라는데, 그것도 못하냐"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도 결국 먹고사는 문제만 해결되면 아무런 걱정도 어려움도 없으니 공부는 쉽게 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그런 믿음이 전제가 되는 대화 내용이었습니다. 


외형적으로 보면, 저는 큰 문제없이 4년제 대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했고 민간기업과 정부 산하 기관을 거쳐서 미국으로 회사를 옮겨 왔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위기의 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잘 버텨왔습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도저히 감정적으로 이겨낼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게 되겠지만,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무엇인가 내 삶의 근본적인 수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른다는 것이 큰 문제였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근본 문제는 알지 못하는데, 무엇인가 크게 잘못된 것은 눈에 보이는 그런 죽음과도 같은 시간을 견뎌야만 했습니다. 죽고만 싶고, 나 자신이 부끄럽고, 그리고 복잡한 감정들이 수시로 떠올라 나를 괴롭혔습니다. 누구 한 명 나의 속 마음을 내놓고 이야기할 사람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괴로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나의 삶이 어디에서 잘못되었는지 희미하게나마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관련된 심리학 책들을 읽으면서 많은 뛰어난 연구자들과 저자들이 나와 같은 문제를 가진 사람들을 위해서 책을 쓰고 논문을 발표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깜깜한 동굴에 한줄기 빛이 비치는 순간이었습니다. 물론 빛이 한번 비추었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책 하나가 모든 답변을 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많은 책에서도 이러한 과정은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는 것은 정말이지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경험 중의 하나가 어린 시절 정서적 무관심(Childhood Emotional Neglect)에 대한 책을 읽었을 때입니다.  주된 내용은 어렸을 때 아무리 부모들이 어린이들을 육체적으로 보살펴주고 돌보아 주었어도, 정서적인 부분에 무관심하였거나 정서적인 욕구에 반응해주지 않았을 때 다음과 같은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1. 다른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기 어렵다

2. 자신감이 떨어진다.

3.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어려워한다. 

4. 모르는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 불안하다.

5.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엄격하지 않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심하게 판단을 한다.

6. 자신에 대해서 이유도 모르게 화가 난다. 

7. 이유도 모르게 기분이 나빠지는 경우가 있다. 

8. 자신이 무슨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잘 모른다. 

9.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잘 모른다. 

10. 자신의 장점과 약점이 무엇인지 모른다. 

11.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지 못한다. 

12. 마음이 텅 빈 것처럼 느껴진다. 

13. 자신이 무엇인가 잘못된 것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책들을 읽으면서 놀랐던 것은, 내가 경험했던 속마음을 다른 사람이 이렇게 정확하게 표현해 놓은 것에 놀랐고, 그동안 그것에 대해서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느꼈던 것이 아니라, 그냥 내가 안고 가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살아왔다는 본인의 무지에 놀랐습니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저의 삶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갖는 순간 저는 돌이킬 수 없는 새로운 길로 이미 한발을 내디디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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