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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가 부모를 신뢰하지 못할때

자녀가 부모를 신뢰하지 못하고, 부모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할때

여러분은 부모님들을 신뢰하시나요?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고 질문을 하실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부모님들이 여러분의 성장과 이익을 위해서 부모님들의 능력이 닫는 한도에서 최선을 다하실 것이라는 것을 믿고 신뢰하느냐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간혹 어떤 분들은 그럴것이라고 그냥 생각하려고 노력할수는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계신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부모님들이 하실수 있는 한도내에서는 최선을 다해서 자신을 돌보아 주셨다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하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은 논리적인 정당화가 아니라 몸으로 경험하고 목격하고 감정적으로 느꼈던 경험들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몸으로 감정적으로 경험하지 못한 것들은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아니 부모가 자식들을 위해서 목숨도 내줄수 있는데, 어떤 부모가 자녀들의 성장과 이익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지 않겠냐고 질문을 하실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부모가 그런것은 아닙니다. 의도하지 않게라고 무지해서, 혹은 부모 자신의 트라우마로 인해서 자식들이 세상을 건강하게 자신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면서 살아갈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지 않고, 오히려 방해하는 부모들도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심한경우는 자녀들을 학대하고 괴롭히면서, 자신의 정서적 욕구나 육체적 욕구를 채우는 도구로 사용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있는 어린 자녀들이나, 이러한 경험을 한 이후에 성인이 된 사람들은 심각한 후유증을 앓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들이 자녀들의 정서적 욕구를 무시하고, 부모 자신들의 정서적 욕구만을 일방적으로 강요했다면, 자녀들은 자신만의 정체성을 확립할 기회를 가지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확신을 키우기 어렵게 됩니다. 결국 사회에 나와서도 다른 사람들의 정서적 욕구를 맞추어주는데 급급할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눈에 잘 보이지는 않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이러한 사람들은 삶이 의미없어지고 괴로와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너무 늦기전에 부모가 어떻게 자신들을 대했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러한 관계가 자신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 깊이있게 고민해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작업은 혼자서는 하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경험한 세상 이외에 어떠한 세상이 있는지 알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만나는 부모님들과 관계는 삶의 기준이 됩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는 부모님들이 세상 전부이기 때문에, 앞으로 자신들이 살아갈때, 세상이 자신을 그렇게 대할 것이라는 가정을 만들어 냅니다. 만약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공감해주고, 최선을 것들을 찾아주려고 노력하고, 가능한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주면서 놀아주고 신경을 써준다면, 아이들은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세상에서 이러한 환대를 경험할 것이라고 기대할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환대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이러한 환대를 자신의 기본적인 권리라고 인식하고,  받는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권리를 인정받지 못한다면 그것을 찾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이러한 환대를 받이러한 경험을 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을 지탱해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인생의 기초를 갖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치 폭풍속의 조각배처럼 세상에서 이리저리 흔들리고 외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모를 믿지 못하면, 세상에서 다른 어떤 존재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것들을 의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삶은 항상 살어름판을 걷는것 같은 삶이기 때문에 하루도 편안한 삶을 살아갈수 없습니다. 당장 눈에 큰 어려움이 없어도, 그러한 안정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불안감 때문에, 경계의 수위를 낮출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부모님들을 신뢰하는지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거나 질문을 해보지 않습니다. 그런 기회 자체가 많이 없기도 하고, 사실 신뢰의 문제는 개인의 주관적인 견해이기 때문에 혼자만의 생각으로 가지고 있을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거나 직장에서 대인관계를 할때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신뢰할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판단을 하게 되고, 그렇게 해야만 적절한 수준의 대인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만약 중요한 사업을 하거나 회사에서 일을 맡길때, 신뢰할수 없는 사람이라면 같이 사업을 하거나 중요한 일을 맡길수 없겠죠. 


부모님을 신뢰할수 있는냐에 대한 평가가 왜 중요하냐면, 모든 인간관계의 기준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모가 의도적이던 아니면 트라우마로 인해서 의도하지 않게 자식들을 속이고 괴롭히고 존중하지 않고, 자식들이 그러한 부모들의 행동에 대해서 잘못된 점들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게 된다면, 사회생활을 하면서 세상도 부모가 자신을 대했던 방법과 동일한 방법으로 대할것이라고 가정을 하기 때문에, 불필요한 분노와 수치감을 가지고 살게됩니다. 자신이 그러한 상황에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만, 그러한 고통에서 벗어나서 건강한 사회생활을 할수 있기 때문에, 부모와의 관계를 되돌아보는 것은 삶에서 중요한 요소중에 하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의 경우를 돌아보아도, 이러한 부모와의 왜곡된 관계를 명확하게 인식하지 않으면, 그러한 부정적인 대인관계를 사회생활을 하면서 지속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자신이 깨달을 때까지 말입니다. 


저와 같은 경우에도, 저의 삶은 아무런 문제가 없고 부모님들도 다 좋으신 분들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살았었습니다. 하지만 중년의 위기를 경험하면서, 제가 세상을 신뢰하고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직장의 상사들이 기본적으로 나를 인정해주지 않고, 무시하고, 괴롭히고, 존중하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을 하면서 살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사회생활에서 항상 긴장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고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물론 사회생활이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갈수 있다고 쳐도, 그 정도가 심했습니다. 결혼을 한 이후에도 가족들간에 깊은 소통을 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신뢰를 하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소통해야 한다고 이야기를 들어도 그것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오랜 고통의 경험과, 독서와, 만남을 통해서 저의 어린 시절이 제가 생각했던 것처럼 안정적인 삶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저의 아버지가 심각한 애착트라우마를 경험했으며, 그러한 트라우마로 인해서 정서적으로 미성숙한 어른으로 자랐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이 자녀양육에도 악영향을 미쳤고, 이러한 사실을 가정 안에서 아무도 이야기 하지 않고, 적정한 언어로 표현하지도 못한채, 그저 좋은 부모로 포장하려고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에서 한번도 안정적인 애착관계를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을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알게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 심각한 고통의 시간을 이유도 모른체 보내야만 했습니다. 


아픈 상처는 드러내서 치료를 해야만 합니다. 눈에 보이는 육체의 상처나 질병 뿐만이 아니라, 마음의 질병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의 질병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상처가 있다는 것 조차도 알지 못할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의 상처는 몸의 건강에도 영향을 줄뿐만 아니라, 삶의 기쁨과 활력을 빼앗아갑니다. 한국의 근대사는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일제식민지배를 경험하고 남과 북으로 갈라져서 육이오라는 민족간의 전쟁을 경험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깊은 마음의 상처를 경험했으며 그 상처들이 미쳐 치료받지 못하고 가족들의 삶속에 숨겨져서 방치되어 왔습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힘든 삶을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그러한 고통들이 드러나고 상처들이 치유받아야 합니다. 더이상 이유도 모른채 고통당하는 개인들이 없어져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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