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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한계를 알고 인정할때

부모들의 부족함과 모자람을 알고 편하게 이야기 할수 있을때


유교문화권에서 자란 사람들은 부모들에 대해서 객관적인 시각에서 이야기 하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부모라는 이유만으로 공경하고 순종해야 한다는 의무를 강조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러한 도덕적 의무감은 감정을 강제한다는 측면에서 자연스럽지 못한 부분도 있고, 부모와 자녀의 관계 안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져야 할 친밀한 관계를 의무로 강제한다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은 측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관계라는 것은 상대적인 의미인데, 그것을 자녀측면에서 일방적으로 따라야 하는 감정인 것처럼 규정한다는데 있어서 문제의 여지가 있다고 할수 있습니다. 


제가 항상 느꼈던 아버지에 대란 두려움과 분노는 아버지의 통제되지 않는 분노와 저에 대한 조그마한 감정적 배려도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고 지금에서 분석을 해봅니다. 사실 아버지는 저에 대해서 알수없는 이유로 분노를 표출했고, 어린 저로서는 도저히 왜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는지 이해할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부모 자식간에 어떠한 대화도 없었습니다. 자신이 필요할때만 찾아와서 자신의 말만 하고 자신의 정서적 욕구만을 챙기고는 사라졌습니다. 어머니는 그러한 관계에서 철저히 침묵했습니다. 저에 대해서 친근하게 이야기를 해주거나 다정하게 대해주는 사람은 주위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형제들 사이에 어떠한 친밀한 관계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철저히 고립된 상황이었습니다.  


어떤분은 저에게 과거의 이야기를 해서 무엇하냐고 하시는 분도 있었습니다. 다 지난일인데 하면서 말입니다. 특히 가족안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것은 누워서 침뱉기인데 라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제가 경험했던 감정적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원인을 분석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사람들은 우리 가정이 이상이 없고 좋은 가정이라고 하는데, 저는 심각한 정서적 어려움과, 자살충동, 인간관계의 어려움, 사소한 사건이 견딜수 없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혼자말, 자기 스스로 자신을 저주하는 등 말로 표현할수 없는 고통을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눈에 보이지 않는 고통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폄하해 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고통은 현실적인 것들이고 실제 존재하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실제적인 정신적 고통을 마치 아무것도 아닌것처럼 살아가라고 하는 것은 상황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이야기 하는대로 저의 가정이 건강한 가정이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가정이라면, 그저 제가 정신이 이상해서 그러는 것이라고 판단하면 될 일이었지만, 저는 그런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수 없었습니다. 정신과에 가서 그냥 우울증 약을 먹고 해결할수 있는 그런 상황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저의 존재 자체가 망가지고 삶을 끝내버려야 할 상황을 매일 마주해야 했습니다. 부모님들과 가족은 훌륭한 가정인데 그 가운데서 저만 혼자 정신병들린 사람처럼 만들어버리는 그 상황이 저를 더 미치게 만들었습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가정과 부모님들이 정상이 아닌 사람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가정에서 아들 한명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받아들이기 쉽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평가를 받아야 하는 자식의 입장은 다른 것입니다. 그것이 진실이 아닌데, 가족 안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보기를 싫어하고 자식에게 모든 잘못을 뒤집어 씌우고 마치 자신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것처럼 대처하는 그 모습 자체가 문제인 것입니다. 


어느 사회나 희생양이라는 개념이 있었습니다. 사회에서 어떤 않좋은 상황이 발생하면, 근본적인 문제를 고칠 생각을 하지 않고, 약한존재 하나를 찾아내서 모든 죄를 뒤집어 씌워서 사회의 반발을 무마해버리는 방법입니다. 가족안에서 발생하는 정신질환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안에서 발생하는 정신적 어려움의 문제는 그 개인의 문제라기 보다는 가족 전체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가족 안에서는 고통을 강하게 경험하고 있는 한 사람만이 문제가 있는 것으로 해석을 하고 개인의 문제로 만들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족 전체에 존재하고 있는 문제를 보기는 싫어하는 것이죠. 그리고는 자신들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선언을 해버리는 것입니다. 


얼마전에 집안 어른과 이야기를 하면서 가족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낸적이 있습니다. 가족안의 구성원들이 트라우마로 인해서 고통당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분의 첫 반응은 왜 다른 가족들을 들먹이냐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이야기를 하지, 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족에 대한 비밀은 죽을때까지 묻어두어야 할 이야기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수치스러운 이야기들은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이 알지 못하는 것은 이러한 폐쇠적인 자세가 가족안의 트라우마를 지속시키고 고통을 영속시킨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저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 가족과 저의 과거의 삶에 대해서 돌아보는 시간을 오랜기간동안 가졌습니다. 견딜수 없는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심리학 책을 읽고, 사이버대 상담심리학과로 편입을 해서 공부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명상도 하고, 가족세우기 워크샵에 참석해서 수많은 고통당하는 사람들도 보았습니다. 북클럽도 하고, 정신건강상담과정 대학원에 진학해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만난 사람들과 관련된 책을 쓰신 분들의 공통점은 그분들은 저의 고통을 다 경험했거나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분들이라는 것입니다. 즉 고통에 대해서 말이 통하는 분들이었습니다. 저의 집안에서는 제가 경험하는 고통에 무감각했고, 아무도 이야기도 걸어주지 않았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나중에 제가 말을 하려고 하면 말을 막았고, 이제와서 그런 이야기를 하면 무슨 소용이 있냐는 식의 대답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회복의 길을 걸으면서 만났던 많은 분들은 그 고통이 실제한다는 것을 알고 계시고, 그러한 고통을 경험했던 저에게 공감해주시고, 그리고 위로의 말을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내면의 고통에 대한 무감각과 민감함의 차이라고 할까요.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돌아보면, 제가 자라왔던 가정은 상처투성이고 부모님들은 정서적인 면에서 성숙하지 않은 분들이었고, 연약한 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특히 아버지쪽은 심각한 트라우마를 경험한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 집안이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치유할지도 몰랐고, 그저 억누르면서 살아온 집안이었습니다. 교육의 기회도 많이 없었던 분들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서 가족간의 친밀한 관계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자녀들과도 어떻게 친밀한 관계를 맺을지 알지 못하는 그런 부모님 들이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그토록 오랜 기간동안 고통을 경험해야 했던 이유였습니다. 수치스러울것도 없고 부끄러워할 것도 없습니다. 그저 일제시대와 육이오를 지나면서 견딜수 없는 삶의 무게에 무너져버린 가정 안에서 벌어진 고통스러운 경험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를 숨기고 비밀로 하고 말을 하지 않고 감추어 두어서 그 병이 심각해진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러한 고통을 치유할지 전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고통을 표현하고 공감받을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고통이 세대를 지나면서 해소되지 않고 커졌던 것입니다.  


저의 다음세대는 이러한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살펴보고, 그러한 이야기들을 가족 안에서 마음 편하게 이야기 하고 공감받을때, 이러한 문제들은 줄어들 것입니다. 많은 분들의 가정에 기쁨과 평화가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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