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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님맘 Aug 20. 2020

장남인거 모르고 시집왔니?

이 결혼을 꼭 해야겠냐며 상견례를 마치고 오는 길에 엄마가 물으셨다. 아빠 가게도 이제 어느정도 자리를 잡았으니 남부럽지 않을만큼은 아니더라도 남들 하는 만큼은 혼수며 예단이며 엄마가 다 해줄 수 있는데 뭐 이렇게까지 없는 결혼을 하니..라며 한숨을 내쉬셨다. 그런 엄마을 향해 아빠가 핀잔인지 위로인지 모를 말씀을 하셨다. "냅둬, 우리때도 다 없이 시작했어. 지들이 알아서 한다자너 우리도 돈 안들고 좋지 뭘 그래" 

아빠의 그말씀이 달갑지 않으신건지, 이 결혼자체가 마음에 안드신건지 엄마는 결국 역정을 내셨다.

"그래도! 빚은 없어야지! 아무리 없이 시작해도 빚은 없어야 할거아냐!"




2천만원 정도의 빚이 있다며 결혼을 망설이던 남자친구를 꼬셔서 결혼을 하기로 했다. 착하고 성실하고 믿음직한 사람이라 허투루 생긴 빚은 아닐 거라 생각했고 둘이 맞벌이를 하면 금방 갚고도 남을거라 믿었다. 우리는 온전히 우리힘으로 결혼을 하기로 했고 혼수, 예단, 예물 모두 생략하고 결혼식만 하기로 했다. 집도 내가 살고 있는 투룸에서 시작하기로 했고 신혼여행도 간단히 다녀오기로 했다. 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양가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시부모님은 한마디도 하지 않으신채 고개만 끄덕이셨고, 우리 부모님의 허락은 니들이 알아서 해라 라는 아빠의 말씀으로 대신했다.




결혼식을 올리고 두달 뒤, 나는 집안의 경제권을 통솔한다는 명분하에 남편의 통장을 인계받았다. 나는 빚을 얼마씩 갚아나가야 저축도 하고 생활을 할지 더하기 빼기로 머리속이 복잡했다. 그런데 남편의 월급 통장을 보니 급여 180여만원이 찍혀있었고 얼마지나지 않아 어디론가 70여만원이 자동이체로 빠져나갔다. 대기업계열사에 다니는데 생각보다 월급이 적네? 싶었다가 근데 그건 둘째치고 자동이체로 빠져나가는 정체를 알수 없는 미지의 돈 때문에 내 머리속이 꼬여만 갔다. 차곡차곡 돈을 모아 살림부풀릴 생각에 들떠있던 내 꿈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남편은 며칠동안 나를 피했다. '오늘도 알려주지 않으면 오빠랑 진짜 끝이야' 라는 협박문자를 보내고 나서야 사실을 털어놨다.

'몇년전에 아버지 보증을 서준게 있었어. 시장에서 장사가 잘 안되니까 뭐라도 하려고 하셨나봐. 근데 보증인이 있어야 대출을 해준대서 내가 보증을 선거야. 그게 잘못되서 내 월급에 계속 압류가 들어왔구 압류액이 너무 커서 감당이 안되서 개인회생 신청을 했어. 그게 올초부터 개시가 됐구 5년동안 갚아야 해..'


그가 말한 올초는 우리가 결혼하던 해인 2007년 1월부터였다. 개인회생은 신청하고 개시하는데까지 시간이 좀 걸린다는데 나는 그 사실을 결혼전에 전혀 몰랐다. 나는 빚이 내가 알고 있던 금액보다 늘어났다는 사실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사실대로 얘기해주지 않은 남편에게도 화가 났다.


그가 나에게 사실대로 말해주지 않은것에 나름 사정이 있었다지만 나는 분통이 터졌다. 터지다 못해 우리 그만 헤어져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하지만 빚이 있다는 걸 알고도 결혼하자 밀어붙인것은 나였다. 이 결혼에 나는 책임을 져야했고 무엇보다 그의 짐을 함께 나누어 질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 아빠의 사업이 망하고 온 가족이 뿔뿔히 흩어져 지내던 그때, 내 곁에서 묵묵히 곁을 지켜주고 힘이 되어주던 유일한 사람을 지금 빈털털이에 빚까지 지고 있단 이유로 버릴 수는 없었다.


나는 함께 나아가기로 했다.




 

빚뿐만 아니라 시부모님의 월세와 생활비, 틈틈히 들어가는 병원비까지 모두 우리 몫이 되었다. 그러자면 남편의 월급만으로 생활하는 것은 무리였기에 나는 이제 고작 태어난지 60일밖에 되지 않은 첫째를 어린이집에 맡겨가면서까지 일을 했다.

그러나 아이를 키우며 일을 하는 것은 녹록치 않았고, 몸과 마음은 지쳐만 갔다. 처음 마음과 달리 나는 어느새 남편도, 시댁식구들도 원망하게 됐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며느리의 '도리'는 하고 살자 생각했다. 시부모님의 생신이면 으레 그렇듯 생신상을 차려드렸고, 명절때마다 우리부모님은 시댁에 선물을 보내셨고, 나도 틈틈히 용돈을 드렸다. 시아버지가 일을 잠깐 쉬시게 될때에는 첫째 돌잔치 축의금 들어온 돈을 건네드렸다. 첫째 어린이집 비용은 친정아버지가 대주셨는데..



그때도 월말행사처럼 시어머니가 입원을 하셨던 때였다. 부가세신고가 한창일 때였고 아이도 아팠다.

어머니의 입원소식은 유난히 피곤했던 그날 따라 내 삶이 밑빠진 독에 물 붓는 것처럼 우울했다.

한번쯤은, 그놈의 '도리'라는 거 안하고 싶어졌다. 결국 난 시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해 계시는 3일동안 전화 한통도, 찾아뵙지도 않았다.




시어머니는 퇴원후 찾아뵙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씀를 드리러 간 나에게 내내 등을 돌린 채 화를 내셨다.

"우리집을 우습게 알아도 유분수지. 시애미가 입원을 했는데 전화한통 없는 며느리가 세상에 어딨어? 나참 아주 지 잘난 맛에 살지. 그러니 명절 때마다 응, 우리는 형편 안되서 선물 못보내는거 뻔히 알면서 그런 비싼선물이나 척 보내고 우리집 잘났수 기죽이는 것도 아니고! 돈 잘버는 아들이 지 아빠 빚 갚고 지부모 봉양 하는게 당연하지 그게 뭐 대수라고 호들갑 떨면서 지까짓게 몇 푼 번다고 어린 새끼까지 떼놓고 돈번다고 유세야 유세는!"   


전화한통 안드린게 시댁을 우습게 안 며느리의 괘씸한 행동이었다는 걸 인지하고서야 나는 깨달았다.

아, 어머니는 알고 계시는구나. 내가 그분들을 원망하고 있다는 걸. 내색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들켜버렸구나.

이왕 들킨 거 속시원히 말이나 해야겠다.

"어머니, 오빠 돈 많이 못벌어요. 아버님 빚 갚고 어머니댁 월세내고 생활비드리면 그돈 다 나가서 저희 쓸돈 없어서 제가 벌어야 되요. 그리고 명절때마다 저희 부모님이 선물 보내시는건 저희집 잘나서 보내드리는거 아니에요. 그게 예의라고 생각해서 보내드리는거에요. 근데 어머니는 작은거라도 저희집에 선물 보내주신적 있으세요? 어머니 전에 종친회에서 천만원 생기셨을때 삼백만원짜리 매트사시고 나머지는 뭐하셨어요? 그걸로 손주 옷한벌 사주시기라도 했어요?"


내말에 시어머니는 억울해 죽겠다며 시아버지를 붙잡고 통곡을 하셨고 나는 눈물을 참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니 시누이한테 전화가 왔다.

"야! 니가 뭔데 우리부모님 무시하니? 응? 니까짓게 뭔데!! 준이 월급 갖고 못살아? 나참 어이가 없어서. 나는 그 월급으로 저축까지 하면서 살겠다! 그리구 너! 준이 장남인거 모르고 시집왔니? 걔가 우리집 장남이야! 부모님 모실 의무가 있다구!" 


화나고 억울하고 분한 여러 감정들이 섞여 말도 못하고 울면서 듣고만 있던 내게서 전화기를 빼앗아 대신 화를 내준건 남편이었다.

"야 진짜 너무들 한다! 엄마랑 누나까지 왜들 그래! 쟤가 뭘 잘못했다고! 전화한통 안한게 그렇게 죽을죄야? 안그래도 힘든애 건드리지 마! 그리고 내가 왜 장남이야? 나 막내야!"




'나 막내야!'라는 말이 끝나자 큭큭 웃음이 나기 시작하더니 멈추지를 않았다. 큭큭 으하하하하!

웃는 나를 보며 남편도 같이 웃기 시작했고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눈물까지 흘려대며 웃었다.

가슴속에 눌러만 놨던 하고싶었던 말을 시어머니에게 다해서 속이 시원했던 것인지, 누나에게 화를 내는 중에도 남편 특유의 그 위트가 웃겼던 것인지 모를 일이다. 그동안 남편을 원망했던 마음도 웃음과 함께 허공으로 사라졌다.

시원하게 한바탕 웃고 난 뒤 남편과 나는 맥주를 마시며 속시끄러웠던 하루를 정리했다. 내일을 위해 우리는 또 열심히 나아가야 하니까.



나는 행복에 이르는 길이 우리를 얽매는 '채움'이 아니라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비움'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하엘 코르트 





P.S. 그 일이 있고 난 후 시댁에서도 우리집 경제상황이 좋지 않다는 걸 아시게 되었고 시아버지가 경비일을 다시 나가게 되셨다. 그러면서 월세와 생활비를 드리지 않게 되었지만, 매달 나가는 월세가 아까웠던 나는 남편을 종용해 마이너스대출을 받아 방 두개짜리 전세를 얻어드렸다. 우리는 계속 빚쟁이 신세를 면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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