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님맘 Oct 21. 2020

Bravo, My Life.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난생처음 고아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새엄마와 사이가 좋은 편이었지만 사춘기시절 나는 책상에 금을 긋듯 새엄마에게 딱 그만큼만 마음을 내주었고 그 선을 넘어가지도, 넘어오지도 않길 바랬다. 아빠는 여러가지 이유로 미워했다. 내가 믿고 의지했던 사람은 오직 할머니 뿐이었는데 그런 할머니가 돌아가셨으니 내 마음은 오갈데가 없어졌고 여러갈래로 흩어져 버렸다.


흩어진 마음을 붙잡고 공부가 잘될리 없었다. 상위권이었던 내 성적은 바닥을 모르고 추락했고 의사가 꿈이었던 나는 지방에 있는 분교캠퍼스에 간신히 합격했다. 학부도 수능성적에 맞춰서 선택했다. 

대학 입학전에 아버지가 하시던 사업이 완전 쫄딱 망해서 나는 대학교근처에 친구와 함께 자취방을 얻어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벌었고, 공부는 늘 뒷전이었으며 학교생활에는 관심이 없었다.




학교근처 카페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곳에 커피를 마시러 왔던 군인 서너명중 말년 휴가중이라며 자신을 소개하는 그 사람을 만났다. 

나에게 첫눈에 반했다며 자신을 어필하는 그 말년병장을 처음엔 경계했다. 그 사람은 키도컸고 한눈에 봐도 '와 잘생겼다' 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훈남이었다. 저렇게 근사한 사람이 왜 나한테? 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말년휴가 내내 카페에 찾아와 나에게 어필하는 그가 어느새 나도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제대를 하고 나면 다시 만나기로 했고 약속대로 그 사람은 제대를 하고 다시 나를 찾아와서 '공식적'으로 사귀자고 했다.


사귄지 6개월쯤 되었을까. 그 사람은 자기엄마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말했다고 했다. 나는 사귀다가 헤어질수도 있는데 왜 엄마한테 말을 했을까, 의문이 들었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얼마뒤 그 사람의 엄마라는 분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가 다도강의를 하신다고, 그래서  예의바르고 조신하신분이라 존경한다고 늘 입이 닳도록 자랑을 하곤 했던 바로 그 엄마였다.


그런 그 사람의 엄마가 여보세요를 마치기도 전에 한다는 소리가, 니가 도대체 어떤 아이이길래 내 착한 아들을 꼬셨더냐, 들어보니 조모밑에서 자랐다더니 어디서 근본도 모르는 애가 우리 잘난 아들 인생을 망치려고 드느냐, 내 말 무슨말인지 알아먹었으면 당장 우리아들 옆에서 꺼져라, 가 본론이자 결론이었다.


그 이후로 그 사람은 당연히 연락두절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갑자기 내인생에 끼어든 그 사람은 비겁하게 엄마뒤에 숨어서 그런식으로 끝을 보고 갑자기 사라졌다. 

그 사람의 비겁함에 분노가 이는 것은 잠시일 뿐, 나는 그 엄마가 지껄인 막말에 또한번 내 처지를 되뇌이며 스스로를 비관의 늪으로 집어넣고 말았다. 

그래, 그럼 그렇지. 나 같은 애를 누가 좋아하겠어. 아빠 말대로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가 태어나서 엄마아빠가 결혼하는 바람에 우리 가족이 다 이렇게 됐는데.. 내 인생은 도대체 왜 이럴까.


인과관계없는 비관을 하며 그날 밤 나는 그동안 온 시내 약국을 돌며 모아두었던 수면제를 모두 털어넣었다.


 



눈을 떠보니 우리학교 병원 침상이었다. 친구의 남자친구가 날 업어서 병원에 데려다놓았고, 친구는 우리아빠한테 연락을 했다. 응급처치를 끝내고 침상에 누워있는 나에게 의사선생님은 우울증이 심하다며 또 자살기도를 할 염려가 있으니 정신병동에 입원을 하는게 좋겠다고 아빠에게 권했다.

아빠는 "내 딸은 미친년이 아니오! 제대로 검사도 안하고 우울증인지 아닌지 어찌 아시오! 입원은 안시키겠소" 라며 바로 퇴원을 시켰고 아무말도 없이 나를 자취방으로 돌려보냈다.


수면제를 아무리 몇백알을 먹어봐야 죽지 않는다는 걸 그때 알았다. 그래서 다음번엔 실패하지 않으리라 결심을 하고 근처 농약사에 가서 농약을 샀다. 검은봉지에 농약한병을 담고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그 버스안  나의 모습은 왜 그리도 비장해 보이던지. 다음엔 기필코 성공해서 반드시, 두번다시 눈을 뜨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자취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살때는 몰랐던 농약병의 냄새가 났다. 설명할수 없는 역하고 퀘퀘한 그 이상한 냄새.

나는 그것을 신문지로 둘둘말아 비닐에 꽁꽁 싸매어 냄새가 좀 덜하게 한다음 내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놨다. 예전에 수면제를 모아놨던 것처럼.

그런데 이건 수면제와는 달랐다. 수면제는 아무리 많이 모아도 냄새가 나지 않았지만, 농약은 꽁꽁 싸매었는데도 예의 그 역한 냄새가 서랍을 열때마다 새어나왔다. 나는 그 역한 냄새때문에 도저히 이건 먹고죽을만한 것이 못되겠다 생각했고, 결국은 내다버렸다. 버리고 나서도 서랍속에 배인 냄새 때문에 나는 한동안 두통을 달고 살았다.

난, 죽고 싶지 않았다.




그 이후로 나는 죽어가는 삶 대신 더 열심히 사는 삶을 선택했다. 1학년 1학기 때 받은 학사경고를 메꾸기 위해 학기중에도, 방학에도 열심히 수업을 들었고, 겨우 체면치레하는 정도의 학점을 받고 졸업을 했다.

졸업을 해도 취업이 쉽지 않은 시대였다. 나는 아빠의 권유로 엄마아빠가 계시던 원주로 올라가 공무원시험준비를 했지만 적성에 맞지않아 괴로웠는데 마침 먼저 취업을 한 친구의 제안으로 친구가 다니던 회사에 면접을 봤고 합격을 했고 회사원이 되었다. 그 이후로 나는 쭉 회사원으로 살고 있다.


  



둘째를 낳고 산후 우울증이 심해지고 오래가자 가족들도 친구도 나에게 그랬다. 니가 전부터 우울증이 있고  불면증이 생긴건 몸이 편해서 그런거라고. 퇴근해서 아이들 챙기고 살림하다 보면 시간도 후딱가고 피곤해서 눈이 그냥 스르륵 감기는데 어디서 우울증을 논하고 불면증을 논하냐고. 그건 니가 게으르다는 반증이라고. 그런건 사치라고. 자기변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다 마음먹기 나름이라고.


핏줄로 이어진 가족들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남편인들 이해할까 싶었다. 때때로 나조차도 헷갈렸다. 정말 나는 의지박약인건가. 흔히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라고 표현하던데 나는 그럼 늘상 마음의 감기를 달고 사는건가. 왜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건가. 이쯤되면 면역력이 생겼을법도 한데 나 스스로 면역력 생기기를 거부하는 것인가.


(좀처럼 해답을 찾지 못한 채 내 우울증은 아이들을 키우다보니 그저 그런 평범한 우울감으로 변해있었고, 그마저도 아이들덕에 웃는날이 더 많아지면서 이제는 우울하다라는 말이 어쩐지 불편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불면증은 쉬이 고쳐지지가 않아 날 좀 괴롭게 한다)




그때 위세척을 하고 누워있던 나에게 아빠가 물었다. "정말 죽고 싶어서 그랬어?"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정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나는 정말 죽으려는 생각도, 제대로 살려는 의지도 없는 이도저도 아닌 잉여인간 같은 삶을 스스로 선택했다. 그리고 변명했다. 엄마 같았던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아빠가 미워서, 내 존재 자체가 싫어서. 내 존재자체를 부정하려니 죽음을 생각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그런 철없는 이십대에게 삶의 가치란 무의미한 것이었다.


오늘같이 을씨년스런 날씨면 으레 그때 그 역한 농약냄새가 떠오른다. 그것을 품고 있을 때가 오히려 죽음보다 못한 지옥이었음을 20년이 흘러도 내 뇌가 그 냄새를 떠올려 주며 상기시켜주고 있다. 

그러니까 오늘도 열심히 살라고.

그땐 지옥을 끌어안고 살았지만, 지금은 천사같은 아이를 둘이나 끌어안고 있으니 구차한 변명따위 하지 말고 더 열심히, 더 부지런히 살라고. 내 삶의 가치는 내 스스로 정하여 빛낼 수 있도록. 오늘도 아름다운 내 삶을 위하여.     

 





작가의 이전글 장남인거 모르고 시집왔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