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 빵

한 구석에 웅크린 채로 그을음 가득했던

by 천루

초등학교 고학년 때를 돌아보면 공책의 표지나 필통 겉면에 그려진 온갖 종류의 캐릭터를 뽐내며 서로 귀엽다를 연신 내뱉곤 했다.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하는 참새들이 되어 등하굣길에 꼬박꼬박 들르는 문구점에는 그 좁은 공간에 아이들의 눈을 사로잡을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이제 고학년이라며 조금 더 먼 곳의 큰 문구점에 가는 날이면 세상 모든 귀여운 것들이 내 앞에 놓여 있는 것만 같았다. 온통 귀엽거나 예쁘거나 웃기거나 하는 개성으로 우리들을 사로잡는 그 많은 캐릭터들 속에 새까만 녀석이 하나 있었다. 제빵사가 서툴었는지 빵이 잠들었는지 어쩌다 그렇게 되었다는 스토리는 기억나지 않지만, 까맣게 탄 빵의 얼굴에는 그을음이 고르게 묻어 있었다. 주로 어느 구석에 혹은 웅크리고 앉은 모습들을 하고 있던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만 같았던 그 작고 무해한 캐릭터가 문득 떠오른 건, 아마도 그 모습에서 나를 보고 말았다는 뜻이겠지.


어쩔 수 없다는 마음으로, 책임감이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이번만, 이것만 하고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버틴 게 얼마인지. 지금 견뎌내고 이겨내면 그게 나의 성장이 될 거라고 스스로를 격려했다. 나를 걱정하는 목소리들에 나보다는 함께 고생하는 팀원을 격려해 달라고 선임의 행세를 하면서, 한 순간에 나는 시니어가 되어 있었다. 주니어와 시니어의 경계가 무엇일까, 나는 어디에 서 있을까. 계속 고민하고 돌아보던 시간이 무색하게 한 순간에 나는 시니어여야 했다. 아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기반으로, 모르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은 새로 익혀서라도. 그렇게 되뇌며 최선을 다해서 지낸 반년이 왜 이렇게 무의미하게만 보이는 걸까. 걸핏하면 엎어지고 되돌아가고 뒤집어지는 것들 속에서 기준선을 그어놓고 더 이상 바뀌어서는 안 된다며 고집스러운 선언을 하고, 어차피 못 한다며 외면받던 것들을 꺼내어 바꿔야 한다고 외치고. 더 오래 있기 위해 무엇이라도 하나씩 달성해 보려 매달릴수록 자승자박이 되어 이슈만 늘어가는 내 꼴이 꼭 늪에 빠진 사람이 더 깊이 끌려들어 가는 줄도 모르고 마냥 허우적대는 꼴이 되어 있었다.


우리의 예상과 각오를 한참 넘도록 길어지는 지루한 싸움 속에서 52시간씩 채워가며 함께 채우는 통장의 숫자는 의미를 잃었다. 막상 급여명세서를 볼 때면 뿌듯함이나 달콤함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입 안이 썼다. 2주 열심히 하고 1주는 야근을 안 하는 패턴을 해 보겠다며 2+1이라고 웃는 팀원에게 그러지 말라고 만류하면서도 마냥 마음이 편할 수 없었다. 혼자서 세 명의 역할쯤을 해야 하는데 그 상황에 업무 일정은 조정하지 않기를 바라시니 저희도 지친다는 말에 그게 위에서 원하는 인재상이라는 진담 반 농담 반의 격려 아닌 격려는 위로가 되지 않았다. 야근을 기본값으로 일정을 산정하면 안 된다고 팀원에게 강조하면서도 막상 나 스스로가 야근과 재택이 없이 채울 수 없는 일정을 요구받는데, 온통 자기 담당 제품이 급하다며 달려들기만 한다. 요즘 자기도 일이 많다며 그쪽에서 좀 해 주면 안 되냐는 말에 저는 전 제품 다 한다는 냉소적인 답변을 애써 웃는 얼굴로 할 때면 한 번씩 속이 끓어올랐다.


번아웃이 오는 것 같다. 아니, 번아웃이 왔다. 스스로를 너무 몰아붙이지 말라고, 단거리 달리기가 아니라고. 때로는 함께 힘내자고 격려하고, 때로는 먼저 도망가기 없다고 웃고, 때로는 등 떠밀듯 퇴근도 시켜보려 하며, 그렇게 어른 행세를 하려고 들던 내가 번아웃이 왔다. 아침에 눈을 뜨기가 힘들고,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 사소한 일들에도 감정이 요동치고, 속이 메슥거리고, 온몸이 욱신거린다. 물리적인 걸까, 심리적인 걸까. 거울 속의 나에게 물으려고 세면대 앞에 섰더니 내가 낯설다. 눈을 뜨면서부터 연차를 쓸까 고민하다가, 천성이 그렇지를 못해서 도리어 더 부지런하려 애쓰며 꾸역꾸역 일어나 같은 시간에 집을 나서고 또 늘 타던 그 자리에 그 시간에 지하철에 실려 간다. 아무 이유 없이 속을 게워 내고 울음을 쏟아내고 싶어 지다가도 그럴 시간의 여유도 마음의 여유도 없다는 걸 깨닫고 의자를 당겨 앉는다. 의연함을 가장하는 지금의 내가 정말 의연해 보이기는 할까.


기분 전환을 위해서 무어라도 해볼까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지만 이내 고개를 젓는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어디라도 떠나고 싶다가도 그럴 기력조차 없어 고작 한다는 게 그냥 덩그러니 앉아 있는 것뿐이다. 무의미하게 바라보는 화면에 비친 나는 탄 빵을 닮았다. 빛나지 않는 눈과 무표정하게 다문 입, 그리고 그림자를 닮은 그을음까지. 만지면 바스락 묻어날 것만 같은 그을음을 털어내려 자꾸만 끊어지는 집중력을 다시 붙잡고 붙잡아 나를 털어놓는 밤. 내일의 나는 조금 덜 그을려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조금 이른 잠을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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