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Distillery Story- 글렌피딕 증류소

시작마을 만렙NPC

by 위스키내비
Glenfiddich_Distillery_View.jpg 글렌피딕 증류소 전경

더프타운 마을에서 차를 타고 북쪽으로 약 5분, 넓은 주차장에 차를 대고 들어가면 그야말로 술꾼들의 놀이동산이 펼쳐집니다. 탁 트인 잔디밭과 찰랑거리는 건물 옆의 연못, 커다란 창문으로 흘끗흘끗 엿보이는 황동빛의 증류기들, 잘 정돈된 보행로까지 모든 게 동화 나라에서 튀어나온 듯 예쁘게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죠. 그리고 연못가를 걸어 들어가 잘 꾸며진 비지터 센터에 들어서면 마찬가지로 소설에서 튀어나온 듯한 고급스러운 굿즈들이 눈이 튀어나올 듯한 가격으로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윌리엄 그랜트 앤 선즈의 간판이자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싱글몰트 위스키 중 하나인 ‘글렌피딕’ 증류소입니다.

image (20).png 예전엔 1리터에 6만원이 정가였는데

글렌피딕은 정말 많은 사람들이 첫 싱글몰트로 접하는 술이기도 합니다. 가족들의 술장에서 흔히 발견되기도 하고, 남대문시장이나 마트, 면세점에서 쉽게 접하기 쉬운 싱글몰트이기도 하지요. (남대문에서 글렌피딕 15년 1리터가 6만원, 18년이 7만원이었으니…)만만한 가격과 접근성에 비해 맛 자체의 퀄리티가 뛰어난 편이고, 디자인도 예쁘게 잘 빠져서 도무지 미워하기 힘든 위스키입니다.

image (21).png 셰리 보데가의 솔레라와는 다릅니다

정말 많은 사람의 입문기라고 알려진 글렌피딕 15년의 경우, ‘셰리 와인’ 에서 쓰이는 숙성 시스템인 ‘솔레라’ 를 차용하고 있습니다. 수만 리터짜리 ‘Solera Vat’의 위쪽에 새로운 원액을 넣고, 아래에서는 그만큼 원액을 빼내는 식이죠. 대량의 위스키가 뱃 안에서 섞임으로서 위스키의 맛이 균일해지고, 조화롭게 변하는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image (22).png 셰리와인의 솔레라 시스템

다만, 이 솔레라라는 것이 셰리 와인의 솔레라 시스템과는 꽤나 다를 뿐더러, 수십 년 동안 수천만 리터의 위스키가 거쳐갔기 때문에 셰리 와인과는 다르게 추가숙성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QC 이상의 효과가 있는지는 미지수입니다. 위스키 업계는 신기술이 동시다발적으로 출현해 빠르게 퍼지는 편인데, 이러한 솔레라 시스템이 보편화되지 않았다는 것은 대규모의 원액을 핸들링하는 글렌피딕 정도의 증류소가 QC를 위해서 사용하는 기술이라는 방증이 될 수 있죠.

image (23).png 인싸픽

각설하고, 요즈음은 급격히 고급화 전략을 취하는 듯한 모습입니다. 이에 따라 가격도 슬금슬금 올라 이제는 12년이 8만원, 15년이 10~12만원 정도에 팔리고 있죠. 친한 친구였던 글렌피딕이 저 같은 평범한 술쟁이와는 거리를 두는 것 같아 못내 섭섭하기도 합니다. 10만원에 15년급의 위스키들도 달위니, 모틀락, 글렌그란트 등 대체재가 생기는 중이라, 15년급 중에서 1순위였던 과거에 비해서는 우선순위가 밀리기는 했죠.


image (24).png

글렌피딕의 특징 중 하나라고 한다면, 바로 압도적인 생산량입니다. 14개의 워시 스틸, 28개의 스피릿 스틸에서 쏟아져 나오는 연간 2100만 리터의 생산량은 스카치 위스키 증류소들 중에서도 ‘거인’ 이라고 불릴 정도입니다. 소규모 증류소들이 늘상 하는 소개문이 바로 ‘우리의 1년 생산량이 글렌피딕의 하루/일주일 생산량이다’ 라는 것이죠. 그만큼 여타 증류소를 압도하는 생산량을 자랑합니다.


image (25).png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렌피딕이 독립병입 시장에 나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대부분의 원액이 그란트 블렌디드 위스키, 몽키 숄더 블렌디드 몰트 위스키에 블렌딩되기 때문이죠. 게다가 증류소 자체에서 생산하는 싱글 몰트의 생산량도 엄청납니다. 독립병입자에게 캐스크를 줄 때, 발베니 원액을 1% 섞어서, 블렌디드 몰트로 판매하는 철저함도 가지고 있죠. 독립병입자로서,여러모로 쉽지 않은 상대입니다.

반면, 위스키를 마시는 사람들에게는 글렌피딕이 나름 쉬운 상대입니다. 20년급 숙성 제품들도 어렵지 않게 구해 볼 수 있고, 과거 (직전구형) 까지만 해도 제주공항에서 400불 아래로 30년급도 구해 볼 수 있었으니까요. 대신, 고도수 제품이 없어 초급자~중급자 단계에서 지나가는 역할 정도였죠.

하지만 글렌피딕이 그렇게 만만한 증류소는 아닙니다. 양은 양만이 가질 수 있는 질이 있습니다. 수만 개의 캐스크에서 나오는 맛의 편차는 수십, 수백 개의 캐스크에서 나오는 맛의 편차보다 훨씬 균일하고 안정적입니다. 즉, QC가 일정하고, 일정한 퀄리티를 바탕으로 전반적인 퀄리티를 끌어올리는 개선 작업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image (27).png 30, 40, 50년 숙성 제품을 다 뽑아낼 수 있는 증류소가 얼마나 되겠어요

게다가, 이렇게 많은 캐스크 중에서 단 한 개의 캐스크로만 만들어내는 싱글 캐스크 제품들은 정말, 정말 맛있는 퀄리티를 뽑아낼 수도 있죠. 즉, 일반적인 엔트리급부터 미들급, 실험적인 제품 시리즈들, 고숙성 제품들과 싱글 캐스크 제품들까지 모든 종류의 위스키 라인업에 대응할 수 있으면서도 그 라인업들이 빠짐없이 일정 이상의 퀄리티를 보여주는, 싱글몰트 업계의 거인이라는 말에 걸맞는 역량을 보여줍니다.

image (28).png

게다가, 글렌피딕의 압도적인 생산량은 무엇보다 스카치 싱글 몰트의 대중화에 아주 크게 기여했습니다. 우리가 많이 들어서 알고 있는, ‘1969년 최초의 싱글 몰트’가 글렌피딕이라는 이야기가 그 방증이기도 하죠. 사실 글렌피딕이 1969년에 싱글 몰트를 출시하기 이전에도 싱글 몰트 제품들이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었다는 증거 자료는 충분히 있습니다. 당시 맥캘란의 회장이었던 조지 하빈슨은 1963년, 주주들에게 "영국 남부에서 15년 이상 숙성 제품에 대한 수요가 꾸준히 증가하면서 병에 담긴 맥캘란 판매가 기세를 얻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1920년대에 출판된 ‘Notes on a Cellar book’ 에서는 글렌드로낙, 클라이넬리시, 글렌리벳을 추목할 만한 싱글몰트로 꼽기도 했죠. 당장 글렌피딕조차 퓨어 몰트 위스키를 1903년에 판매한 기록이 있습니다.

image (29).png

그럼에도 우리가 글렌피딕을 싱글몰트의 선두주자로 기억하는 이유는 바로 ‘대중화’ 의 첫 시작이었기 때문입니다. 스마트폰의 첫 방수가 2012년 소니의 엑스페리아에서 시작되었지만, 우리의 뇌리에는 2016년 갤럭시 S7과 아이폰 7로 각인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갤럭시와 아이폰이 방수방진을 지원하면서 스마트폰에 방수 방진이 탑재되는 것이 기본 소양이 된 것처럼, 글렌피딕 이전에도 싱글몰트는 있었지만 시장의 한 포션으로서 폭넓게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글렌피딕의 지분이 큽니다.


image (30).png 캐즘을 뛰어넘게 해준 증류소랄까요

이제는 비싼 몸이 되어버린 글렌피딕이지만, 싱글 몰트 시장에서의 헤리티지를 생각하면 고급화 전략도 이해가 되기는 합니다. 가끔 싱글 캐스크나, 독립병입으로 나와 준다면 한 번쯤 꼭 마셔 볼 만한, 무시못할 괴력을 가진 증류소니 한번 도전해 보시는 것도 괜찮겠네요.

keyword
작가의 이전글위스키 증류소가 살아남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