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몰트 ‘빅게임 플레이어’ 들의 베팅에는 무슨 심산이 깔려 있을까
마 전, 스코틀랜드 최북단에 위치한 증류소 중 하나인 ‘스카파’ 증류소가 코어 레인지 출시를 예고했습니다. 오크니 섬에 위치한 유이한 증류소 중 하나인 이 증류소는 ‘시크릿 오크니’ 라는 이름이나마 달고 나오는 경우도 극히 드물 정도로, 독립병입 시장에서 매우 희귀한 위스키 중 하나입니다.
기존에 스카파 증류소의 위스키를 마셔 보려면 스카파 증류소의 NAS 제품인 ‘그란사’, ‘스킬렌’ 을 마시거나, 단종된 16년 제품을 비싸게 주고 마시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페르노리카의 ‘디스틸러리 리저브 시리즈’ 를 마셔 봐야만 했습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고든 앤 맥페일에서 가끔 나오는 스카파를 구하는 방법밖에 없었죠.
그런데 갑자기 왜, 스카파는 정규 라인업을 내놓았을까요? 심지어, 엔트리급 제품도 NAS가 아닌, 10년 숙성 제품으로 나왔고, 9년 전에 단종된 16년에 더해 21년 제품까지 출시했습니다. 도수도 모두 48도로 출시된 것을 보면, 페르노리카가 상당히 칼을 갈고 내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죠.
페르노리카가 알아낸 칼은 사실 스카파뿐만이 아닙니다.
올해 2월 출시된 롱몬 CS 제품군 또한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통상 오피셜 CS 제품은 저숙성 원액 위주로 블렌딩되어 출시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페르노리카의 고숙성 CS 제품군은 상당히 큰 모험에 가까워 보입니다.
디아지오 또한 기존에 몰팅 공장으로 사용하던 로즈아일에서 싱글 몰트를 출시하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12년이 된 작년의 SR 시리즈에 더불어, 올해 또한 12년 숙성 제품을 SR 시리즈에 추가했죠.
그뿐만이 아니라, 유령 증류소로 불리고 있었던 아일라의 포트 엘런과 하이랜드의 브로라 또한 40년 가까운 폐쇄 이후에 다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위스키 시장의 두 날개인 페르노리카와 디아지오가 시장의 성장에 베팅하는 모양새죠.
탐듀와 글렌고인을 보유한 이안 맥클로이드 또한 로즈뱅크를 재오픈하면서 오피셜 싱글몰트 제품군의 확대를 노리고 있죠. 마찬가지로 대형 독립병입업자인 고든 앤 맥페일 또한 케언 증류소를 가동하면서 싱글몰트 시장에 진입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카치 시장은 한풀 꺾이는 모양새로 보입니다. SWA에 의하면, 2022년에 비해 2023년은 위스키 수출량과 수출액에서 꽤 큰 낙폭을 보였습니다. 수출량은 약 19.5% 감소했고, 수출액은 액 9.5% 감소한 것이죠.
해당 자료를 보면, 스카치 위스키의 주요 수입국 10곳 중 9곳이 감소세로 들어섰고, 그 감소폭 또한 상당합니다. 프랑스, 인도, 일본, 독일, 스페인, 브라질, 멕시코 등에서는 두 자릿수가 넘는 감소폭을 보였죠. 도저히, 새로운 도전을 하기 좋은 시장 상황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류 브랜드들은 무슨 심산으로 싱글몰트 위스키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는 걸까요?
디아지오의 경우, 조니 워커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화된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조니 워커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20년 이상’ 의 블렌디드 위스키가 거의 없다는 점이죠. 이는 경쟁사들의 블렌디드 위스키들이 고급 라인에서 ‘30년’ 을 사용하는 것에 비교하면, 큰 유연성을 가져다줍니다.
(물론, NAS인 블루 라벨을 가지고 30년급 여타 블렌디드 위스키와 같은 체급으로 인식하게 한 데에는 마케팅적으로 각고의 노력이 있었곘지만요)
그렇기 때문에, 디아지오의 포트폴리오는 페르노리카와 다르게 ‘블렌디드 위스키 가격경쟁력 강화’ 와 더불어, ‘신규 몰트 포트폴리오 추가’ 로 보입니다. 막대한 생산량에다, 스피릿의 방향성 또한 조절할 수 있는 기능적인 증류소인 로즈아일 증류소의 몰트에 힘입어 조니 워커의 생산단가를 낮출 수 있을 것이고, 포트 엘런,브로라 등 지금껏 닫혀 있었던 유령 증류소들의 재개장을 통해 싱글몰트를 접할 수 있는 범위를 넓히고자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렴한 블렌디드와, 합리적인 가격의 엔트리급 위스키를 위주로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는 ‘비용 전략’ 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디아지오 하면 바로 ‘조니 워커’ 가 떠오르는 것과는 반대로, 페르노리카는 블렌디드 위스키 라입업이 상당히 많은 편에 속합니다. ‘시바스 리갈’ 뿐만 아니라, ‘발렌타인’, ‘로얄 살루트’ 로 나뉘어져 있죠. 게다가 시바스 리갈, 발렌타인, 로얄 살루트 모두 다 년수 표기가 되어 있고, 20년 이상의 고숙성 제품들 또한 있습니다. 즉 말하자면 페르노리카는 블렌디드 위스키의 생산에 디아지오보다 더 많은 고숙성 원액을 사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죠.
이를 놓고 보았을 때, 위의 그래프를 다시 자세히 보면 뭔가 달라 보일 수 있습니다. 분명 위스키 수출량을 놓고 보았을 때는 두 자릿수로 감소한 국가들이 많지만, 수입액으로 놓고 보았을 때는 상대적으로 감소량이 크지 않습니다. 중국, 대만, 싱가폴, 스페인 등지에서는 오히려 수출액이 늘어나기도 했죠.
이 말인즉슨, 시장의 수요가 점점 프리미엄화되고 있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저가 블렌디드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고, 싱글몰트에 대한 수요는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죠.
페르노리카는 이러한 싱글몰트에 대한 수요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기존에 블렌디드 위스키에 투입되던 고숙성 원액을 싱글몰트로 전환해 판매하기 시작했고, 이 태표적인 예시가 바로 ‘시크릿 스페이사이드 시리즈’ 입니다. 롱몬, 카퍼도닉, 브레이발, 글렌키스 등의 고숙성 원액을 제품화시켜 판매하였습니다. 글의 서두에 언급했던 스카파나 롱몬 CS등, 고숙성 오피셜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입하려고 하는 모양새입니다. “차별화전략” 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고든 앤 맥페일과 이안 맥클로이드의 경우, 새로 증류소를 막 오픈한 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기적인 시장 상황에 당장 연연할 이유는 없습니다. 최소 10년간 꾸준히 증류 원액을 쌓아 가며, 미래를 대비하면 되는 것이죠. 그 이전까지의 위기 또한, 스코틀랜드 위스키 산업 인프라, 즉 캐스크 거래를 통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 증류소 재건은 오히려 위스키 호황기였던 지난 5년간 모은 자금으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을 것입니다. 12년 후, 15년 후, 18년 후, 21년 후 그들의 위스키는 코어 레인지를 하나씩 완성해 나갈 것이고, 다음 위스키 사이클을 준비된 상태로 맞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얼핏 이해되지 않는 주류 업계 거인들의 행동은 오히려 이러한 상황에 대한 대응책, 큰 관점에서는 기업전략의 일환입니다. 스카치 싱글몰트의 활황이 잠잠해진 지금, 지난 3년간 불티나게 팔려왔었던 맥캘란, 발베니, 알라키는 이제 마트 진열대에서 먼지를 쌓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원해 마지않던 위스키들 또한 그럴진대, 다른 위스키들, 다른 주종들은 어떨까요. 지난 5년간 우후죽순 생겨났던 지역 양조장, 지역 증류식 소주 등은 이러한 시장 변화에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요?
술은, 특히나 증류주는 증류라는, 특별한 설비가 있어야 하는 과정을 필요로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정비 비중이 매우 높습니다. 시장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생산량을 조절하면서 대응하기 까다롭다는 것이죠. 게다가 숙성을 한다고 하면, 연 단위로 진행되는 숙성의 특징 상 빠른 대응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글로벌 위스키 대기업들은 큰 틀의 기업전략을 가지고 움직입니다. 그렇지 못한 소규모 증류소들은 현재 캐스크를 매물로 내놓으며 현금을 수급하고 있죠. 그나마 캐스크 거래라는 안전망이 있는 스카치 위스키가 이럴진대, 이러한 안전망이 없다면 더더욱 전략을 세심하게 가져가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