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의 손을 거쳐 피어난 증류소의 잠재력
스코틀랜드 증류소는 많은 경우, 그닥 예쁜 편이라고는 보기 힘듭니다. 황금빛의 액체들이 숙성되어가는 숙성고는 그냥 우락부락한 창고일 뿐이고, 대부분은 은색 굴뚝 하나만이 연기를 뿜고 있을 따름이죠. 생산에 집중하는, 공장이라는 느낌이 상당히 강합니다.
하지만, 로시스 마을 한 구석에 위치한 한 증류소는 조금 다릅니다. 입구부터 뭔가 조금 다르다고 할까요? 공산품을 생산하는 공장의 모습이 아니라 휴양림의 벽돌 오두막 같은 느낌입니다. 큰 건물이 아니라, 넓은 녹지 안에 작은 건물들이 들어차 있는 모습입니다. 한 장원의 영지 같은 느낌이 드는 이곳은 바로 ‘글렌 그란트’ 증류소입니다. (글렌그란트의 자랑인 정원은, 아쉽게도 들어가 보지 못했네요)
글렌그란트 증류소는 특이하게도 반도에 사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은 증류소입니다. 아시아에서는한국, 유럽에선 이탈리아지요. 글렌그란트가 이탈리아에 60박스를 수출한 것이 싱글몰트의 첫 본격적인 해외 진출이었고, 이 첫 거래를 시작으로 글렌그란트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인기있는 싱글몰트로 자리집습니다. 한국에서는 ‘캄파리 그룹’ 의 위스키 포트폴리오에 포함되어 와일드 터키와 함께 위스키 쌍벽을 이루고 있습니다. 와일드 터키의 한국 시장 공략에서 큰 성과를 보았던 캄파리 코리아인 만큼, 글렌그란트도 한국 시장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게다가, 상당히 성공적이기도 하구요.
대표적으로 글렌그란트 브랜드로서는 처음으로 진행한 프라이빗 캐스크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첫 릴리즈 때는 캐스크 50개 중 12개를 한국에 배정했고, 2차 릴리즈 때는 9개를 한국에 배정했죠. 한국의 비중이 상당히 크다는 점이 놀랍지만, 사실 더 놀라운 점은 따로 있습니다. 총 21개, 무려 4천 병이 넘는 물량을 이 시장에서 소화할 정도로 한국 시장이 글렌그란트를 좋아한다는 점이죠. 게다가 셰리 캐스크를 전반적으로 선호하는 한국 시장에서, 순수 버번 캐스크로 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사실, 현재의 글렌그란트는 버번 캐스크 명가로 이름이 높습니다만, 오랜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약 50년 전, 1970년대의 글렌그란트는 버번캐스크보다는 셰리 캐스크를 주무기로 하는 증류소였습니다. 이때 당시에도 퀄리티가 상당했던 것인지, Armando Giovinetti라는 이탈리아 사업가에서 위스키 60상자를 주고 이탈리아 시장에 판매하게 된 후, 1970년대에 150만 상자를 판매하는 기염을 토합니다.
이 1970년대의 전성기 초입에서, 글렌 그란트는 자신의 자매 증류소를 부활시키는 결정을 하게 됩니다. 바로 1890년대의 위스키 붐에 힘입어 지어졌던 ‘글렌그란트 No.2‘ 증류소였죠. 이 증류소는 글렌그란트 증류소와 도로 하나를 두고 마주보고 있을 정도로 가까운 증류소였고, 씨그램이 글렌그란트와 다른 증류소들을 페르노리카에 매각하게 되는 2002년까지 생산을 지속했습니다. 쌍둥이 증류소로 시작해 하나가 폐쇄되었다는 관계성이 마치 클라이넬리시와 브로라 증류소를 닮아 있죠.
이 글렌그란트 No.2증류소는 우리에게 ‘카퍼도닉‘ 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증류소는 한동안 폐쇄되어 있다가, 증류기를 제작하는 회사인 ‘포사이스’ 가 매입합니다. 포사이스의 부지가 모자랐기 때문이었죠. 결국 카퍼도닉 증류소는 포사이스가 불도저로 밀어 버리고, 남은 건물은 호텔로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1977년 시그램이 증류소를 인수하고 확장하면서, 증류소의 스타일이 바뀌기 시작했고, 시그램은 글렌그란트에 대한 주목을 줄였습니다. 60년 전부터 글렌그란트와 연이 있던 마스터 디스틸러 데니스 말콤은 시그램이 ‘28년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라고 말했죠.
상황은 2006년, 캄파리 그룹이 글렌그란트를 사들이며 달라집니다. 이탈리아 밀라노에 본사를 둔 이탈리아의 주류 대기업, 캄파리가 이탈리아에서 가장 인기있는 싱글몰트인 글렌그란트를 인수한 것이죠. 글렌그란트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던 데니스 말콤을 다시 글렌그란트로 불러들인 것도 캄파리 그룹이었습니다. 스페이사이드 지역의 페르노리카 관할 증류소를 총괄하고 있던 데니스 말콤은 기꺼이 귀향을 택했죠.
데니스 말콤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랐던, 그리고 위스키 업계에 들어오게 된 계기가 되었던 글렌그란트 증류소로 돌아와 대대적인 리뉴얼 작업에 착수합니다. 그리고 그의 노력은 먼 시간이 지나지 않아 빛을 보게 되죠. 스페이사이드 지역의 9개 증류소를 총괄하고 있던 그였고, 버번캐스크의 대가로 불리는 그였습니다. 28년이라는 시간 동안 블렌딩용 원액으로 사용되며 버번캐스크 숙성 원액을 한가득 쌓아놓은 글렌그란트는 그를 위한 무대나 다름없었습니다.
그의 노력을 통해 아보랄리스, 10년, 12년, 18년의 라인업이 탄생했고, 전세게적으로 큰 호평을 받은 글렌그란트 15년 배치 스트렝스 제품이 탄생했습니다. 모두 버번 캐스크를 사용해, 글렌 그란트의 캐릭터를 공고히 굳힘과 동시에 안정적인 라인업을 구축했습니다. 같은 계열사의 ’와일드 터키’ 버번 위스키의 품질 좋은 배럴을 사용하다 보니, 뒤떨어지는 제품이 없는, 소위 말하는 ‘무결점‘ 라인업을 만들어낸 것입나다. 한국에서도 ‘맛있는 버번캐스크‘ 를 추천할 때, 결코 빠지지 않는 증류소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이에 그치지 않고, 글렌그란트 21년, 25년 등 상위 라인업으로까지 확장해 나가고 있죠. 잘나가는 신생 증류소의 모델이 아란이라면, 글렌그란트는 대기업 소속으로 힘을 숨겨 왔던 증류소가 체계적인 관리와 조명을 받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모델인 듯 합니다.
독립병입 시장에서 보면, 글렌그란트는 결코 쉽게 구할 수 있는 원액은 아닙니다. 구할 수 있더라도 상당히 비싼 원액이죠. 특히나 오피셜 라인업에서 보기 힘든 셰리 캐스크 원액이라면, 더더욱 비쌉니다. 하지만, 그 값을 할 정도로 좋은 퀄리티를 가지고 있습니다. 위스키내비에서도 최상위 라인업인 ‘일러스트레이션 시리즈’ 로 선보인 바 있죠.
정리하자면, 글렌그란트는 긴 헤리티지를 가진 증류소가 잘 멎는 마스터 디스틸러와 잘 맞는 모기업을 통해 안정적인 라인업을 구축하고, 적절한 마케팅까지 곁들여졌을 때 얼마나 위력적인지 알 수 있는 예시인 듯합니다. 특히 페르노리카 계열의 증류소들이 라인업을 새로 선보이며 싱글몰트 시장에 뛰어들고 있는데, 그들에게 좋은 선배 모델이 될지, 아니면 넘어서야 할 가장 큰 벽이 될지가 재미있는 관전 포인트가 될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