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n Apr 21. 2021

창녀의 책, 작가의 글




그녀의 딸아이가(23) 후다닥거리며 뛰쳐나갔다. 열린 방문 틈으로 침대에 반쯤 걸쳐있는 이불과 바닥에 널려져 있는 옷가지들이 보였다. 나이가 몇인데, 꾸밀 줄만 알았지 치울 줄 모른다. 혼인해서 분가한 첫째와 둘째 딸과는 생판 달랐다. 막내딸이 나풀거리고 다닌 동선을 따라 만들어지는 잔일은 엄마인 그녀의 몫이었다. 들어가 커튼을 젖혔다. 자잘한 먼지 입자들이 쏟아지는 아침 햇살에 떠다녔다. 창문을 열고 이불을 양손으로 움켜잡고 힘껏 펄럭였다. 툭 소리와 함께 발 앞에 책 한 권이 떨어졌다. 무슨 책인지 궁금했다. 표지 아랫단, ' 이한 작가의 자전적...' 에세이라면 빠짐없이 인쇄된 감흥 없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낯빛이 변하며 책을 쥔 두 손이 가늘게 떨렸다. 누가 볼까 싶어 뒤돌아봤다. 딸아이가 없다는 것에 안심이 됐다. 그녀는 손끝으로 '이 한'이란 철자에 밑줄 긋듯 천천히 여러 번 쓸어봤다. 한동안 그러더니 가만히 침대 머리맡에 내려놓고 방을 나왔다.



그녀도 나갈 준비를 했다. 오전에는 문화센터에서 하는 인문학 강좌를 듣고 오후엔 자신이 경영하는 편의점을 봐야 한다. 원래 검소해서인지 아니면 화장을 싫어해서인지, 화장대에는 로션과 옅은 립스틱 그리고 사진이 들어 있는 작은 액자가 전부였다. 사진 속에는 중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아이 둘과 서너 살 돼 보이는 아기를 안고 있는 삼십 대 중반의 여자 그리고 나이 든 남자가 있었다. 오래전에 찍은 가족사진이다. 그들 중 나이 든 남자는 금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다. 그녀는 로션 뚜껑을 열지도 않은 상태에서 손바닥만 두드리고 있었다. 생각에 빠진 듯했다.



설마, 그 아이는 아닐 거라 여겼다. 원래 작가들 필명은 두 글자가 많다. 공교롭게도, 언젠가 자신이 장난삼아지어 준 '이 한'이란 필명을 썼다. 그 아이는 책과 가깝지 않았다. 그럼에도 마음 한편에선 혹시나 했다. 딸아이 방으로 돌아가 책을 집어 들었다. 그녀는 불안과 설렘으로 인해 다시 망설였다. 잠시 후, 크게 숨을 내뱉고 표지를 조심스럽게 넘겼다. 목차부터 시작해 작가 소개를 거쳐 몇 장을 훑어보았다. 각기 다른 내용의 수필 모음집이었다. 특이한 것은, 작가 본인을 '나'가 아닌 '그'라는  3인칭으로 표현했고, 수필과 단편 소설을 섞어 쓴 문체였다. 강요된 불편함과 어설프게 타협하지 않는 글이었다. 작가는 매우 단단한 사람일 거라 생각했다. 역시나, 그 아이와는 전혀 닮지 않았다. 당시 동갑인 그녀가 보기에도 청년보다 소년에 가까웠다. 책의 작가처럼 본인의 생각을 당차게 표현하지 못했다. 질문하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골똘히 생각하다 흐릿하게 대답했다. 그때마다 그녀는 "네 머리에서 달그락 소리 들린다"라고 놀렸다. 그는 그녀의 가슴속에 언제나 아이로 남아있었다.



그가 아니라는 것은 짐작했지만 막상 확인하자 허탈했다. 이름이 같다는 것 하나로 그였기를 바랬다. 서 있기도 힘든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멀거니 책장을 넘다. 그녀의 눈에 읽히는 것은 글자가 아니라 꾸불꾸불한 검은색 모양들이다. 허탈감에 휩싸여 뭔가 해야 하는 의미 없는 행동에 불과했다. 그러다 문득 스쳐 가는 한 문장이 그녀의 가슴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야, 조금만 기다려' 하면서 손님과 짧은 관계를 맺으러 간 용감한 척하던 창녀 친구가 떠올랐다...'


화들짝 놀랐다. <사막의 닐름>이란 이야기에서 나오는 문장이다. 작가가 사막을 여행하면서 오갈 때 없는 열아홉 살 소녀를 호텔 방에서 하룻밤 재워주는 내용이었다. 작가는 앳된 여인의 절박함을 이용하지 않았다. 믿기 힘들겠지만, 만약 작가가 그였다면 그러고도 남았다. 언젠가 '난 이다음에 세상을 보고 올 거야'라는 그의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다시 처음부터 꼼꼼히 읽기 시작했다. 각각의 수필들 속에 자신과 있었던 일을 본인이 아니면 알아볼 수 없게끔 쩍 섞어 놓은 것처럼 보였다.



'그 계집엔 주책이다. 바싹바싹 붙어 앉아 허벅지가 닿고, 팔짱을 끼고, 머리를 기대기까지 한다. 진한 화장품 냄새가 신경을 자극했다. 그는 "싫다, 저리 가.. 남편도 있는 계집애가"라고 소리쳐도 안하무인이다. "뭐 어때 형인데..." 하며 더 달라붙는다. 사실 싫었던 것이 아니라 화장품 냄새가 아파서 그랬다. 오래전 화장을 짙게 한….'


<화장으로 감춘 상처>에 나오는 문장이었다. 그 아이 같았다. 자신이 팔짱을 끼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같이 있던 언니들은 그 모습을 재미있어하며 기둥서방 삼으라고 했다. 화장품 냄새가 아프다는 글에 그녀는 울컥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멍청했다. 여자와 말도 섞어보지 못한 놈을 사창가 출입자 관리를 시켰으니 말이다. 지금은 집창촌이라 불리는 사창가에도 사람이 산다. 매춘부, 거리의 여자, 성매매하는 여성 등 다양한 용어가 있지만, 당시엔 창녀라 했다. 종기 형과 기철이 형은 한물간 기둥서방이었다. 아내가 벌어온 돈으로 생활했다. 형수들은 주말마다 '파티'에 나가야 했다. 파티란 일본인들이 매춘 관광을 오면 술과 잠자리를 하는 일의 은어였다. 나이 들어 손님이 찾지 않아 은퇴한... 불과 삼십여 년 전 일이다….'


<동남아의 꽃잎들>에 나오는 내용이다. 가명을 썼으나 종기와 기철이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그는 형수와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그렇게 살지 말라고 쏘아붙였다. 그때 그의 나이 22살이었다. 분명히 그 아이가 맞았다. 그들만의 은어인 파티의 숨겨진 뜻을 정확히 설명했고, 본인의 임무를 '출입자 관리'라 에둘러 표현했다. 그런 경험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에도 후에도 그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은 있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그 아이만 섞여들었다. 확신이들자, 꾹꾹 눌러 놓았던 수십 년간의 울음이 그녀에게서 터져 나왔다. 계속 읽을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책이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제철소의 화려한 불빛이 출렁대는 바닷물 속에서 흔들렸다.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그곳은 창녀와 소년만의 바다였다...'


<화려한 바닷가>에 나오는 문장이다. 그녀는 바닷가  떠오르 젖은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당시엔 마음대로 나갈 수 없었다. 포주는 여인들이 도망치거나 단속에 걸릴까 싶어 함부로 다니지 못하게 했다. 낮에는 자고 밤에는 붉은 조명 아래 서 있었다. 그러나 도망치는 여인들은 거의 없었다. 갈 곳이 없어서다. 고향으로 돌아간들 창녀를 반겨 줄 가족과 일가친척은 없다. 오히려 끔찍한 가족을 피해 가출한 여인들이 많았다. 자신도 다르지 않았다. 늘이 가면 내일이 오는가 보다 하고 죽은 여인으로 살아야 했다. 답답할 때면, 저 멀리 어 큰 길가에서  골목길로 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발걸음이 무척 독특해서 그 아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봤다. 보폭은 컸으나 슬며시 끌리듯 천천히 내디뎠다. 마치 주변이 느리게 움직이고 그는 가만히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 번은, 왜 그렇게 걷냐고 묻자 "넘어지지 않으려고"라고 말했다. 어릴 때 큰 사고를 당해 부러진 왼 다리를 합 수술했다고 한다. 그 후로 자꾸 어지다 보니 스스로 터득한 발걸음이었다. 하게 걷는 것이 아니라 독특했다. 그는 다가와서 "괜찮아?"라고 항상 물었다. '오늘은 어땠어' '아픈 데는 없어' 그리고 '바쁘지 않으면 눈치껏 나가자'는 의미의 합성어였다. 자신이 "응"이라고 대답하면 곧장 바닷가 방파제 끝으로 데리고 갔다. 밤에는 입구에서 의경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경비를 섰다. 그는 경찰이 아님에도 손쉽게 들어갔다. 멀리서 경찰들이 보초를 서주기에 방해받지 않았다. 그가 그들과 무슨 관계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는 보온병에 담아온 커피를 나눠 마시며 이야기했다.



'그에게 가장 맞았던 커피는, 창녀 친구가 따뜻한 말과 함께 타 준 커피였다...' 


<커피와 여인>에 나오는 문장이다. 그녀는 그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어느 날, 앳된 젊은 사람이 그곳을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기웃거렸다. 새로 발령 난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대체로 잠깐 있다 떠나지만, 그는 오래 있었고 다른 곳으로 갔다가도 다시 왔다. 화장을 짙게 한 여인들은 분주했다. 사창가를 목적 없이 지나가는 사람은 없다. 다들 볼일이 있어 온다. 나이에 상관없이 '오빠 쉬었다 가'라는 소리와 함께 지나가는 사람의 팔짱을 끼고 억지로 잡아당겼다. 그러면 마지못해 끌려오는 시늉을 하며 제 발로 걸어 들어다. 그도 볼일이 있었다. 그것이 그의 일이기 때문이다. 도 그가 손님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물론, 손님으로 바뀌는 경우가 백 프로였지만 말이다. 추운데 밖에 있지 말고 들어오라며 팔짱을 끼듯 붙잡아 안으로 끌어들였다. 오늘 커피를 타 주면 다음엔 손님으로 올 거라 여겼다. 커피를 타서 건네줬다. "... 고... 고마워요" 몹시 쑥스러운 듯 홍당무처럼 빨개진 얼굴과 더듬거리는 말투였다. 듣는 순간 가슴이 찌릿하며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찮은 창녀가 타 준 목적 있는 커피 한잔에 진심으로 고마워. 그는 그렇게 친구이자 유일한 남자로 가왔다.



'그가 떠나는 날 아침,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방으로 그를 데리고 갔다. 좁은 통로를 사이에 두고 양옆으로 방문들이 줄줄이 마주 보고 있었다. 여기저기 문이 열리며 민얼굴의 그녀들이 그에게 잘 가라는 인사를 했다. 그녀의 방은 이층에 있었다. 붉은 싸구려 둥근 조명이 덩그러니 박혀있는 천정은 낮아서 고개를 숙여야 했다. 바닥엔 이불이 깔려있고 사람 얼굴 하나 내밀만큼 크기의 창문엔 그녀가 볼 수 없는 희망처럼 작은 커튼이 아침 햇살과 그녀의 방을 단절시켰다. 커튼을 젖힌다 해도 실내는 어두울 것 같았다. 그는 두리번거렸다. 이불 머리맡 플라스틱 쟁반에는 휴지와 젖은 하얀 수건이 가지런히 포개져 그릇에 담겨있고 콘돔이 보였다.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짐작했다. 하지만 그는 소년이었다. 그녀의 손님 중에 하나로 기억될까 싶어 겁이 났다. 그가  앉은뱅이책상 위에 놓인 스탠드의 불을 켰다. 방야릇한 붉은빛에서 환한 빛으로 바뀌었다. 이번엔 그녀가 쑥스러웠는지 얼굴을 붉히며 배시시 웃었다. 그가 옷 입은 채로 이불 위에 눕자 그녀도 따라 누웠다. 그가 손끝으로 그녀의 이마를 가볍게 쓸어주자 그녀도 따라서 그의 이마를 쓸어주었다. 손끝을 통해 서로의 온기가 전해졌다. 둘은 친구로 가장된 연인 사이다.


 

.. 갈 시간이 되자 그녀는 앉은뱅이책상 위있던 책 한 권을 건넸다. 그에게 주려고 준비한 것이었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 발견하지 못했다. 책상에는 여러 권의 책이 쌓여있었다. 그는 놀랍다는 눈초리로 그녀와 책상에 책들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녀는 책을 읽었다. 그날 그가 받은 책은 독서에 관한 외서였다. 요즘으로 치면 자기 계발서와 비슷했다. 그녀가 그를 위해 근처 서점에서 고른 책이었다. 시험에 나오는 것 빼고는 읽지 않았던 그였기에 무척 어려웠다. 그 후로 그는 책을 읽었고 세상을 여행했다. 한때 인간의 온기를 잃고 앞만 보고 살던 적도 있었다. 누구보다 순수했고 름다그녀는 달그락거리던 바보에게 염원을 담아 책을 주었, 소년은 돌아와 글을 쓴다. 그래서 글은 어렵다. 그녀의 염원과 사연을 쓰려면 오로지 문학 고유의 잔인한 힘을 빌리는 수밖에 없어서다. 문학은 울지 않는다. 잔인한 감정은 읽는 그녀만이 느낄 뿐이다....'


그의 에세이집 마지막 편 <책과 소년>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녀는 책을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고작 낱장의 종이로 된 것이 철판을 겹쳐 놓은 것처럼 무겁고 달궈진 쇳덩이처럼 뜨거웠다. 책을 주었더니 글이 되어 돌아왔다. 순수하게 아름답다고 하고 친구로 가장된 연인이라고 했다. 그 달그락거리던 바보도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했다. 그땐 어쩔 수 없었다. 그곳에서 벗어나려면 포주에게 진 빚을 대신 갚아줘야 했다. 떠날 때, 그는 겨우 23살이었다. 자신은 그에게 돈 많은 사람 재취 자리로 갈 것이라 말했다. 사창가의 많은 여인이 그렇게 지내다 결국 팔려 갔다. 지금은 동남아 여인들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주로 나이 많고 부인이 죽었거나 도망친 애 딸린 홀아비들이다. 별도의 결혼 정보회사가 있던 것이 아니다. 사창가를 들락거리다 물건 고르듯 선택당하는 것뿐이다.



그로부터 5년 후, 어느 날 밤이었다. 도로 건너편 어둠 속에서 잊을 수 없는 발걸음이 보였다. 그녀는 반가운 나머지 그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그는 오 년 만에 찾아온 자신을 멀리서도 알아본 그녀에게 미안했다. 그녀는 뛰어 건너려다 아차 싶었다. 혼자 살아가기도 벅찬 아이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새 자리 잡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자신은 초라함을 넘어 비참여자였다. 친구가 아닌 여자로 사랑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정을 받아보지 못한 아이가 정에 이끌려 찾아왔다고 여겼다. 그가 다가오자 그녀는 손님이 기다린다며 쌀쌀맞게 말하고 들어가 버렸다. 이것이 둘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책을 덮고 얼마간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녀의 은 가라앉지 않았다. 책에는 대부분 그가 살아온 이야기다. 참 멋진 사람이 됐다고 여겼다. 아니, 전에도 멋진 사람이었다. 단지 표시가 나지 않았을 뿐이다. 채워지지 않아서다. 조그만 주머니는 금방 채워져 꽉 차 보이는 데 반해 그는 남들보다 주머니가 깊고 넓었다. 구슬 하나 끄집어내려면 헛손질하듯 한참을 헤매야 했다. 그것이 달그락거린 이유다. 그녀는 시계를 보았다. 오후 2시가 조금 넘었다. 점심도 먹지 않음에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소중한 보물을 품고 있듯 가슴에 안고 있는 책의 뒷장을 보았다. 나와 있는 출판사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사무적으로 친절한 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우연히 책을 본 작가의 지 친구라고 하 그곳에서 쓰던 이름과 연락처를 남겼다.



그녀는 전화를 끊자마자 자신의 성급함을 후회했다. 너무 흥분된 나머지 일어난 실수였다. 그도 자신의 막내딸과 비슷한 나이 때의 아이가 있고 혼자라는 것은 책에 쓰여있다. 그렇다고 해서 여자가 없으란 법은 없다. 자신에겐 유일한 남자지만 그에겐 과거의 인연일 뿐이다. 출판사에서 전해주지 않을 수도 있다. 전화로 연락처를 남기는 여자를 뭘 믿고 작가에게 알려줄까 싶었다. 그녀의 가슴은 긍정에서 빠르게 부정으로 넘어오며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이래선 편의점 근무는 못 할 것 같았다. 그녀는 막내딸에게 대신 편의점을 보라는 문자를 보냈다.

 


어느덧 6시가 됐다. 그녀는 오후 내내 갈팡질팡하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마음만 썩이고 있었다.  


[괜찮아?]


카톡의 문자가 떴다. 바로 그였다. 오래전에 그가 데리러 올 때 쓰던 말이다. 달랑 세 글자와 추가된 물음표 하나에 모든 것을 담아 보냈다. 지나간 세월과 현재와 미래 그리고 신에 대한 질긴 그리움이었다. 그녀 가슴이 먹먹해다. 잠시 뭐라고 답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녀도 문자를 보냈다.


[이제는 정말 괜찮아]


[나도 이제는 괜찮아... 그 바다에 갈래?]


그도 자신과 같은 의미의 문자를 보냈다.


[응... 내가 커피 타서 갈게]


[그래, 그러자]


삼십여 년의 세월을 생략한 대화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바뀐  없는데 확실히 그는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넓어졌것을 느꼈다.



둘은 두 시간 후 밤 8시, 그녀가 사는 아파트 길 건너편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녀는 바빠졌다. 그러나 후다닥 거리며 돌아다니기만 할 뿐이었다. 그동안 근검절약하느라 마땅히 꾸며 입을 옷과 찍어 바를 화장품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소박한 생활 습관이 원망스러웠다. 순간, 꾸미기 좋아하는 막내딸이 생각났다. 딸아이의 방으로 달려갔다. 거기엔 오히려 풍족했다. 화장을 하고 이것저것 어울릴만한 옷을 입어봤다. 그녀는 가까스로 준비를 마치고 현관을 나섰다. 평소에 마주치면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던 사람들이 못 알아보고 지나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의 머릿속엔 온통 그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정말 그 나이에 벌써 머리가 회색일까, 검은색 진바지를 입었겠지, 키가 컸으니까 잘 어울릴 거야 등 책에서 묘사한 변화된 그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녀는 횡단보도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빨간 신호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오래전에 건너가지 못한 길을 건넌다는 생각에 몹시 설레었다. 그때 맞은편에서 흰색 SUV 한 대가 지나가는 순간 파란불로 바뀌었다. 차가 저만치 멈춰 섰다. 혹시나 해 가슴이 쿵쾅거렸다. 걸어가면서도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차에서 사람이 내려 횡단보도 쪽으로 오고 있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그 아이의 넘어지지 않으려는 발걸음이었다. 

 




타이틀 이미지/ 필립-로르카 디코르시아는 매춘부와 마약 중독자, 심지어 세계에서 가장 큰 슈퍼 모델의 일부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을 촬영한다. 그의 사진은 감정적으로 흥미로운 캐릭터가 중심 무대를 차지한 현실과 환상의 아름다운 혼합이다. 이 사진은 안에 있는 매춘부와 창 밖에서 쳐다보는 남자들의 욕망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평범하게 불행하고 어리석지 않은 여자의 호기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