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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왕 Jul 20. 2021

별의 바닥에 떨어져 죽고 싶어

맥주를 사러 펜션 옆 편의점에 갔다. 사실 맥주 사러 간다는 핑계로 잠시 MT 특유의 요란뻐쩍한 소란 통에서 빠져나오고 싶었다. 그게 싫다는 건 아니다. 청춘들이 모인 술자리란 으레 그런 법이니까. 그냥 잠시 바람을 쐬고 싶은 거다.


누군가 마지막 남은 맥주를 따라내고 빈 페트병을 흔든다. "어라? 맥주 다 마셨나?" 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는 "내가 더 사 올게" 하며 몸을 일으켰다. 뒤에서 친구들이 '같이 갈까?'라든지 '혼자서?' 하는 말을 뱉었지만 내가 대충 손사래를 치니 겉치레뿐인 물음이 이내 얼근한 술자리 분위기에 휩쓸려 사라진다.


현관으로 걸어가서 신발을 찾으려는데 워낙 뒤죽박죽인 탓에 그냥 눈앞에 보이는 넉넉한 사이즈의 슬리퍼 하나를 아무거나 주워신었다. 마룻바닥에 오랫동안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있다가 일어서니 금세 피가 아래로 돌며 다리가 저려오기 시작했다. 이럴 때 절뚝거리는 모습이라도 보였다간 장난기 많은 친구들이 내 저린 다리를 일부러 툭툭 건드리며 자극할지도 모른다. 우리끼리의 속칭인 '라이트닝 킥'이다. 괜히 그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잠시 서서 핸드폰 보는 척을 하다가 저린 느낌이 조금 가시자 마자 얼른 밖으로 빠져나왔다. 약간 큰 슬리퍼를 골라 신고 나와서 그런지 걸을 때마다 밑창에 시골 흙바닥이 직직 끌렸다. 


편의점으로 내려가는 길에 즐비하게 펼쳐진 산등성이들이 저 멀리 그림자처럼 보인다. 도회지에선 볼 수 없는 모습이다. 풀벌레도 많다. 코 앞에 있는 편의점에 가는 건데 그 사이에 벌써 네댓 번이나 허공에 손을 휘저어 나를 향해 날아드는 날벌레들을 쫓아내야 했다. 그러다 한 번은 큰 놈이 걸렸는지 손등에 퍼석-하고 부딪히는 느낌이 났는데 이게 꽤나 징그러웠다. 으으- 하고 몸서리를 치며 얼른 편의점으로 뛰어 들어갔다.


편의점에 들어와 음료가 쌓여있는 냉장고 쪽을 유심히 본다. 수입맥주가 4캔에 만원이라길래 곰곰이 살펴보는 척하다 결국 익숙한 것들을 12캔 집는다. 이런 건 늘 안 먹어 본 것과, 먹어 본 것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먹어본 것을 고른다. 사실 먹어본 맥주의 맛이 기억나는 게 아닌데도 그렇다. 그러니까 처음 보는 맥주나 먹어본 맥주나 사실상 둘 다 낯선 맥주인 것은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다만 내가 익숙한 맥주를 고르는 이유는 '아 이건 내가 좀 알지' 하는 기분을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술보단 사실 안주 쪽에 더 흥미가 있다. 스낵과 라면코너를 돌며 제법 보장된 맛과, 새로운 맛 사이를 유심히 분석해 가며 번갈아 담았다.


삑-, 삑-, 삑-. 

아르바이트생이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사람인지, 고작 맥주 12캔과 주전부리 몇 가지 찍는데도 화면을 골똘히 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가 서툴게 계산을 하는 동안 눈 둘 곳이 없던 나는 그저 유리벽이나 바라보았다. 거기엔 징그럽게도 날벌레들이 잔뜩 붙어있었다. 개중에 재수 없는 놈들은 포충기에 걸려 타 죽기도 한 모양이다. 계산을 마치고 편의점을 나오는데, 혹시 내가 문 여는 소리에 그들이 파르륵- 날아오를까 봐 조심히 편의점 문을 연다.


곧장 숙소로 들어가지 않고 편의점 앞 간이 테이블에 앉아서 한 캔 땄다. 생각보다 금방 쇼핑을 마쳐 버려서 천천히 들어가고 싶었다. 어차피 심부름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맥주를 한 모금 홀짝이고 밤하늘의 별을 본다. 서울에선 볼 수 없는 절경이다. 


'파직-' 그러다가 전기 오르는 소리가 적막을 깬다. 고개를 돌려보니 날벌레 하나가 포충기에 타 죽고 떨어졌나 보다. '파직-' 한번 더 소리가 울린다. 이번엔 나방이 날아가서 타 죽는 걸 적나라하게 봤다. 그것이 포충기로 뛰어들어 자살하는 소리가 조용한 밤에 퍼진다. LED 같은 게 있으면 도무지 날아가지 않고는 배길수 없나 보다. 바보같이.


나방은 불빛을 보면 날아들어서 때론 타 죽기도 한다. 그럼 나방은 빛이 없으면 어디로 날아갈까? 나방은 빛으로 갈 때가 행복할까 어둠에 있을 때가 행복할까? 나는 나방이 아니니까 그것의 마음은 알 도리가 없지만 짐작컨대 '날아들다 타 죽는 것' 그게 나방의 최선이었을 거다.


질량은 곧 중력과 비례한다. 살면서 만나는 어떤 것들은 때론 큰 중력으로 우리를 끌어당긴다. 그렇게 속절없이 우리를 끌어당기는 것들을 보고 사람들은 '반했다', '매료됐다', '사로잡혔다' 등 제각각 수식어를 갖다 붙인다. 타인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것에 빨려 들어가는 당사자에게는 그것의 질량이 엄청난 것이다. 그건 마치 별에 빨려 들어가는 것과 같아서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번지 점프를 할 때, 다이빙을 할 때 우리가 지구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 지구만큼의 중력으로 빨아들이는 별을 만날 수도 있고, 그보다 훨씬 큰 목성만큼 빨아들이는 별을 만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거대한 별이 내 마음을 온통 자신에게 떨어지게 해 놓고 무심하게 내 몸은 여기 덩그러니 내버려 둘 때, 슬프게도 이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다. 내가 저 별의 중력에 가까워질수록 그것도 나의 중력에 가까워질 거라고 꿈꾸며 별로 뛰어드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 별의 바닥에 떨어져 죽는 것이다. 아마 그게 최선일 거다.


나방은 불빛을 보면 날아들어서 때론 타 죽기도 한다. 그럼 나방은 빛이 없으면 어디로 날아갈까? 나방은 빛으로 갈 때가 행복할까 어둠에 있을 때가 행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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