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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왕 Jul 20. 2021

내가 멀리 떠나간다면, 너는 어때?


"이거 볼래?" J가 두서없이 핸드폰 앨범을 들이밀었다.


여행지에서 찍은 그녀의 사진이다. 어디서 났는지 모를 큰 카플린 모자에 아이보리색 원피스, 그리고 바람을 맞으며 짓는 미소까지. 디지털 화면에 비친 표정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즐거워하는지 물씬 전해져 온다. 만약 그 신나 보이는 표정이 그냥 사진을 찍기 위해서 지어낸 미소라면 얼른 다 때려치우고 배우로 전향해야 할 것이다.


J는 어디로 훌쩍 떠나는 걸 좋아했다. '훌쩍 떠난다'는 문장은 사람으로 하여금 묘한 낭만감을 불러일으키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누구나 '그건 나도 좋아하는데?'라고 할 수 있지만 으레 상상에서 끝나는 것과 달리 J는 진짜로 다짜고짜 출발해 버리는 것이 약간의 차이라 하겠다.


한 번은 언젠가 포르투갈로 떠나는 것을 상정해 두고 트래킹 가방을 샀다는데, 결국 포르투갈로 떠나진 못했다. 아무튼 그 가방이 어찌나 크던지 피난용을 잘못 산 게 아닐까 싶었다. J는 빈말로도 아담하다곤 할 수 없는 체구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방이 더 컸다. 노란색의 가방이었는데 나는 그걸 매고 있는 그 애의 모습이 마치 계란초밥 같다고 생각했다.


텐트도 샀다. 무슨 만화에 나오는 호이포이 캡슐(*미리 물건을 담아 두었다가 필요할 때 던져서 꺼내는)처럼 던지면 자동으로 펑-하고 펼쳐지는 텐트였다. 이건 트래킹 하다가 노숙하게 될 경우를 대비해서 샀다고 했는데 실제로 J가 노숙을 한 경우는 없었고 그냥 집에서 캠핑 기분을 내는 실내 소품으로 전락했다.


J는 생각이 많아질 때 한강 다리 밑으로 드라이브를 가기도 했는데, 그때 차 안에서 트는 BGM용도로 쓸 블루투스 스피커도 샀다. 특이하게도 J가 스피커를 고르는 기준은 출력이나 디자인이 아니라. '한강교 아래의 분위기와 얼마나 잘 어울리는가'였다. 한강에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OO대교 아래'라는 건 단어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완 달리 그냥 회색의 콘크리트 벽이 불그죽죽 늘어서 있을 뿐이라서 둔치 쪽의 밝은 느낌 같은 걸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조폭영화 밀거래 장면 촬영지 같은 걸로 쓰여야 맞는 곳인데, 그런 곳의 분위기와 어울리는 스피커라니? 요새 노출 콘크리트 인지 뭔지 하는 방법으로 공사하다 만 것 같은 카페를 짓기도 하던데 그런 걸 말하는 걸까? 덮개를 만들다 만 것 같은 노출 스피커...? 아무튼 그게 뭔지 내 감수성으론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그보다 더 궁금한 것이 있어서 물어봤다.


"근데 차에 이미 내장된 스피커가 있지 않아?"

그렇게 묻는 나를 보며 J는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야!, 이건 집에다 인테리어 해놓을 수도 있잖아!"


스노클링이 하고 싶다며 몰디브 해변으로 떠난 적도 있다. 종종 그녀는 몰디브를 가보지 않은 사람과는 말을 섞고 싶지 않다고 나를 놀려댔는데, 겉으론 태연한 척했지만 속으론 상당히 부들부들 떨었다. 그때 나는 피학(괴롭힘을 당하는) 쪽은 영 취향이 아닌 것 같다고 알게 되기도 했다. 또, 석양이 지는 해안도로를 달리고 싶다고 일몰 때를 딱 맞춰 드라이브를 가기도 했다. 그것도 멀쩡한 자기 차를 내팽개치고 오픈카를 렌트해서 말이다. 뚜껑이 열리는 차를 타고 석양을 달리는 모습은 좀 부럽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도 한 번 시도해 보려고 했으나 컨버터블 카를 렌트해 주는 업체도 별로 없거니와 겨우 찾아도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1일 렌트비를 보고 있자니 차가 아니라 내 뚜껑도 열릴 뻔해서 관뒀다.


어디로 훌쩍 떠나는, 혹은 떠날 상상을 하는 J의 자유로운 모습에 매료되었던가, 나는 이윽고 그녀를 짝사랑하게 되었다. 그녀의 산들바람과 같은 모습에 반해서인지 J를 아무 데도 못 가게 붙잡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마치 새를 새장에 가둬 놓는 것 같았달까? 새장에 갇혀 살다가 시름시름 병들어 죽는 새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갑자기 내 곁에서 포르르 날아가버린다 해도 그 자유로움을 꼭 응원해 줄 거라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처음의 다짐과는 달리 나 또한 사랑에 빠진 보통의 사람들처럼 내 마음을 잘 가누지 못했다. 그녀가 어디로 훌쩍 떠나는 계획을 말할 때마다 이유 모를 막연한 슬픔이 차올랐던 것이다. 더 먼 곳으로, 더 오랜 기간 동안 떠나는 이야기를 들려줄수록 나의 마음에 더 깊고 진한 슬픔이 번졌다. 이것은 금세 병으로 이어져서 J가 그저 상상에 불과한 이야기를 할 때에도 마음이 철렁- 하고 내려앉는 버릇이 생겼다. 담담하게 응원하기로 마음먹은 것과는 반대로 J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고 싶은 마음이 요동쳤던 것이다.


'포르투갈에 1년 정도 가고 싶어', '외국 대학원 가서 박사 학위를 따고 돌아오는 게 좋지 않을까' 따위의 얘기를 들을 때 '그럼 나는?' 이라든지 '왜 가?, 안 가면 안 돼?' 하는 말 들이 울컥 쏟아질 뻔 한 걸 꾹 눌러 담았다. 그러나 내 마음은 이미 고장 난 수도꼭지 같아서, 조금씩 그것들이 새어 나오는 것까지 막을 순 없었다. 나는 슬픔을 애써 참아 낼 순 있어도, 슬프지 않을 방법은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새장에 갇혀서 시름 거리는 새를 보는 일 보다. 날아간 새를 기다리다 내가 앓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하루는 어쩐 일인지 J가 "근데 만약에, 내가 그렇게 멀리 가버리면 넌 어때?" 하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나는 그때 J의 질문이 그녀가 떠난다면 내 기분이 어떨지 물어보는 건지, 함께 떠날 생각 같은 건 없냐고 물어보는 건지, 아니면 그냥 자기가 없는 동안 넌 뭐 할 거냐고 물어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J는 사랑의 기척을 잘 느끼는 사람이니까 그녀가 내 사랑을 눈치채고 있음을 돌려서 말해주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내가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J는 다른 화제로 말을 돌렸다. 그리고 나는 그때 그게 어떤 의미였는지 J에게 끝내 물어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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