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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왕 Dec 19. 2022

청파동 골목에서

청파동의 언덕은 참 새침한 구석이 있어 선뜻 다가서기가 어렵다. 골목마다 언덕이 많은 건 남산 둘레에 있는 동네들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고도 때문인지 뭐랄까 동네마다 언덕의 특징이 좀 다르다. 가령 이태원동 쪽 언덕의 경우엔 한눈에 보기에도 우악스러운 면이 있기 때문에 미리 각오한다거나 여의치 않을 땐 돌아가는 등,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다. 회현동의 경우는 경치가 좋고 예쁘기 때문에 조금 힘든 것 정도는 잊을 수 있다. 좌우간 꼭 청파동만이...                    


"오빠"               


달큼하기도 하고 가지런히 쓸려있는 꽃잎 같기도 한 목소리에 유상의 상념이 깨진다. 앞에 유상의 손을 잡고 언덕을 오르는 그녀의 환한 얼굴이 대번에 눈에 가득 들어온다.                    


"지금 힘들어요?"                    


"아니 전혀! 내 다리 알지? 나 요새 운동하잖아. 저어 얼-대 힘들어서 그런 게 아니라  파전 먹으러 여기까지 올라와야 하나 ‘ 하는 생각에 빠져서 그런 거야."                    


"헤헤... 그런가아... 왠지 힘들어 보였는데! 그래도 파전은 꼭 이 집에서 먹어야 해요. 저번부터 오빠랑 오고 싶었어요. 특히 지금 같은 보슬보슬 비 오는 날이 딱 좋아요!"                    


"그건 알지 나도 너랑 꼭 오고 싶었어, 그런데 청파동의 언덕이라는 게 참 새침한 구석이 있어서, 골목을 돌면 또 어떤 언덕이 있을지 마음 졸이게 되는 그런..."                    


"앗 그런가아... 거의 다 왔어요. 저기예요 저기"                    


용산구와 중구 일대의 언덕 특징 비교분석을 일장 연설로 늘어놓으려던 유상의 말을 그녀가 잽싸게 끊는다. 그녀의 말대로 언덕 중간에 허름한 노포의 간판이 보인다. 그런데 어째 가게의 분위기가 조금 이상한 것 같다.          

"어?! 뭐지!"                    


"아이고... 이런 우리가 날을 잘못 골랐나 보네"                    


가게 문 앞에는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그 위로 ‘영업 쉽니다’라는 팻말이 달그락거리며 바람에 날렸다.                    

"이럴 리가 없는데... 여기는 설에도, 추석에도 장사하던 곳이라고요, 뭔가 잘못됐어요. 사장님이 분명 상중이거나 옥중인 게 분명해요!"                         


유상은 속으로 ‘당신의 그런 생각이 뭔가 더 잘못된 거 같은데’라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울상인 표정을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이런 상황은 그냥 옴붙은 재수에 불과하다. 유상도 그녀도 가게를 들르기 전에 인터넷으로 꼼꼼히 정보를 찾아보고 가는 편이지만, 아직 네이웃버 지도는 이런 골목 상권의 영업시간까지 자세히 알려줄 정도로 친절하지는 않다. 그게 네이웃버의 잘못도 아니고 말이다.                    


"히잉... 정말 속이 상해요"                    


그녀는 유상의 품으로 달려와 어깨에 폭 고개를 파묻는다. 유상은 그런 그녀가 또 퍽 귀여워 등을 토닥였다.          

"아고, 괜찮아! 나는 진짜 오늘 파전 안 땡겼어. 정말이야. 나 어제도 기름진 음식 먹은 거 알지? 그런데 또 파전 먹을 생각하니까 좀 더부룩할 것 같더라고. 좀 아쉽긴 하지만 차라리 잘 됐어!"                    


"훌쩍... 정말요?"                    


물론 거짓말이다. 이 언덕을 오를 때만 해도 ‘얼마나 맛있는지 한번 두고 보자’ 같은 생각이나 ‘반드시 먹고 만다 그 파전’과 같은 생각을 했던 유상이다. 그것이 거짓말인 것은 유상 자신도 알고 그녀도 또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세상에 어떤 사람도 연인의 이런 거짓말을 탓하는 사람은 없다. 유상은 그녀의 기분이 조금 풀어진 것을 느끼고 바로 또 이어서 말을 한다.                    


"그래도 우리는 운이 좋은 편이야. 이거 봐 가게가 없어지지는 않았잖아.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자기가 맛집이라고 찾아놨던 곳이 자주 폐업하는 징크스가 있대, 그래서 별명도 폐업왕이었어"                    


"히히, 그런 사람이 있어요? 그건 정말 싫다. 우리 다음에는 꼭 다시 와요. 혹시나 그 사람한테는 이 가게 알려주지 말아요. 폐업하면 어떡해요.                    


"당연하지, 그 사람한테는 절대 비밀로 할 거야"                    


유상과 그녀가 손을 꼭 잡고 골목 언덕을 다시 내려와서 결국 들어간 집은 흔한 프랜차이즈 찜닭집이었다.                    

"미안해요. 오빠... 괜히 나 때문에 고생만 했네"                    


"아니야 그래도 이렇게 비 오는 날 같이 다니니까 좋다 그렇지?, 그리고 그거 알지? 아는 맛이 더 무섭다고 막상 또 찜닭 먹으면 엄청 맛있을 걸?"                         


미리 염두에 뒀던 특별한 음식을 먹지 못한 실망감에 그녀는 고개를 떨구었지만 한 대접에 푸짐하게 나온 찜닭을 보고는 눈이 반짝이는 듯했고, 닭 날개를 한입 베어 물고는 마치 그 파전 생각 같은 건 애당초 없었던 사람 같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유상은 또 그런 그녀가 퍽 귀여워 날개를 하나 더 그녀의 접시에 얹어주었다. ‘앗! 아냐, 오빠도 드세요’라고 그녀가 말했지만, 오늘만큼은 당신이 두 날개를 다 먹는 것을 보고 싶다는 유상의 완강한 투정에 ‘아잇... 정말 안 되는데...’라고 하며 닭 날개 하나를 또 쏙 입에 집어넣었다. 유상은 그냥 이 기분에 퍽 배가 불렀다.                    


다 먹고 가게를 나온다. 아직 보슬보슬 내리는 비가 그치지 않는다. 유상이 왼손으로 우산을 펼쳐 든다. 그리고 왼편에서 그녀가 그 팔 위로 팔짱을 껸다. 그녀의 가방 안에는 그녀의 산지 얼마 안 된 3단 접이 우산이 곱게 말아져 있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는 꼭 유상은 그녀를 집에 바래다주고 싶어 진다. 괜히 빗길에 미끄러질까 걱정되는 탓이었다. 유상의 집은 그녀의 집과는 정 반대 방향이어서 밤늦게 귀가하겠지만 상관없다. 어째 빗길조차 위험할 것 같은 그녀와는 달리 자신은 그까짓 쯤 거뜬히 해내는 어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빗길을 걸으며 그녀가 유상에게 물었다.                    


"오빠, 오빠는 제 어떤 점이 좋아요?"     


"응 갑자기?"          


"네, 저는 이렇게 바보 같고, 변덕도 심하잖아요..."          


시무룩하며 몸을 더 바짝 붙여 오는 모양새가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오늘의 일 때문인가? 최근 그녀와 데이트마다 잦은 소음이 생기긴 했다. 식당에선 재료가 소진되기도 하고, 버스에서 카드를 잃어버린 일이나, 어디서 에어팟을 놓고 온 것 때문에 눈물을 쏙 뺀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늘 그녀가 어여뻐 보인 것은 아니었지만 금세 다시 좋아함이 차올랐다. 유상은 그녀의 귀 쪽으로 입을 살짝 기울였다.          


"글쎄, 당신의 어떤 점이 좋았냐면... 잠시 귀 좀."          


유상은 그녀의 귀에 대고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응...? 아잇! 뭐예요!"          


이내 유상의 장난을 눈치챈 그녀는 시무룩하게 투정을 부렸고, 유상은 또 그것이 퍽 귀여워 그녀의 볼을 매만졌다.               




청파동의 언덕은 참 새침한 구석이 있어 선뜻 다가서기가 어렵다. 골목마다 언덕이 많은 건 남산 둘레에 있는 동네들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고도 때문인지 뭐랄까 동네마다 언덕의 특징이 좀 다르다. 가령 이태원동 쪽 언덕의 경우엔 한눈에 보기에도 우악스러운 면이 있기 때문에 미리 각오한다거나 여의치 않을 땐 돌아가는 등,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다. 회현동의 경우는 경치가 좋고 예쁘기 때문에 조금 힘든 것 정도는 잊을 수 있다. 좌우간 꼭 청파동만이...          


‘바스락-’          


외투에서 바스락거리는 종이 소리에 유상의 상념이 깨진다. 작년에 헤어진 그녀에게서 온 편지다. 이 편지 때문에 굳이 이 청파동의 골목을 다시 찾았다. 그때 그녀와 먹지 못했던 파전집이 비가 오니 불현듯 생각났던 탓이다.          


저 멀리 허름한 노포가 보인다. 노포를 가리키며 그의 손을 잡아끄는 그녀의 모습도 같이 겹쳐 보이는 듯하다. 가게에 가니 문 앞에는 셔터가 내려져 있다. 그 앞에 ‘영업 쉽니다’ 팻말이 나부낀다. 이것만큼은 그때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유상은 가게 한쪽에서 비를 피하며 담배를 피우기 위해 코트 주머니로 손을 넣었다.          


‘바스락-’          


편지가 먼저 손에 잡힌다. 유상은 그대로 편지를 꺼내서 읽는다. 이미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은 편지기에 내용은 지겹도록 잘 알고 있다. 언제부턴가 유상은 이 편지는 내용을 읽는 게 아니라 그냥 쳐다보는 것에 더 가까워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오빠에게,

안녕하세요 오빠. 평소에도 자주 써주지 못했던 편지를 이렇게 헤어지고 나서야 쓰게 되네요. 그게 이제 와서 왜 이리 미안할까요. 오빠를 만나면서 저는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것에 늘 행복했어요. 비록 오빠는 어땠는지 잘 모르겠지만요.


제 자랑은 아니지만, 오빠를 만나기 전에도 그리고 만나는 중에도 저에게 미묘하거나 때론 적극적인 방법으로 호감을 표해 온 사람들도 많이 있어요. 오빠도 제법 잘 알고 있듯요. 그 사람들은 대부분 제가 뭘 갖고 싶어 하는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혹은 저한테 잘 어울리는 옷이나 색깔은 무엇인지 저보다 저를 더 잘 파악한 듯했어요. 그리고 그런 것들을 이용해서 호감을 표시했고요. 그런데 정말 이상하죠. 사람들은 저에 대해 뭐든 알고 싶어 하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사실 저에 대해서 별로 알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한 번은 저의 이런 고민을 눈치챘는지 누군가 제게 말하더라고요. ‘그럼 네가 먼저 너를 알려주면 되잖아?’ 라고요. 그때부터 저는 진실로 누군가에게 저에 대해 가르쳐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저는 저 자신을 너무 알려주고 싶어서 정말로 저를 궁금해하는 사람을 찾아다녔어요. 그리고 그건 정말이지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어요. 사람들이 생각보다 제 모습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마주해야 했거든요. 사람들은 다들 사랑에 빠진 본인의 모습에 더 관심이 있어요. 다소 지친 저는, 저를 찾아와 사랑 비슷한 마음을 재잘대고 가는 사람들이 이제는 다 거칠고 딱딱하다고 느껴졌어요.


그렇게 아주 오랜 시간을 지내다가 어느 날 문득 슬퍼졌는데, 그건 이젠 저 자신조차도 내가 나의 어떤 모습을 알려주고 싶어 했는지 가물가물 해서예요. 그 선명하던 것이 점차 희미해졌기 때문이에요. 어쨌든 그런 날은, 그러니까 소중한 뭔가가 잘 기억나지 않았던 날은 엄청 울다가 잠이 들었던 기억이 나요.


그러다 우연히 오빠를 만나면서 잊고 있던 것들이 생각났어요. 오빠한테 저에 대해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뛰쳐나갈 것 같았어요. 새어 나갈 것 같았고 다 들킬 것 같아서 부끄러웠어요. 그리고 새로운 것도 알게 되었어요. 저는 여태껏 나를 알아줄 사람을 찾아서 그토록 헤맸는데, 오빠가 나를 잘 알았는지 몰랐는지 같은 건 내게 별로 중요하지 않아 졌어요. 참 아리송한 말이죠? 저도 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저는 누군가 저를 완벽히 이해해야 사랑하게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조금만 기울여도 마음이 쏟아지더라고요. 참 신기해요. 그냥 쏟아내기만 해도 이렇게 다시 마음이 차오르는 것이요.


제게 좋은 사람이어서, 제게 필요한 사람이어서, 그리고 저를 사랑해준 사람이어서 정말 고마워요. 비록 이렇게 우리가 끝났지만, 어떻게 보면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해요. 제가 옆에 없을 땐 외롭고, 제가 옆에 있을 땐 괴로운 오빠를 지켜봐야 하는 게 저도 아주 많이 슬펐거든요. 오빠가 행복하길 바라요. 아주 많이. 고마웠어요.'


유상은 편지를 곱게 접어 다시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영업 쉽니다'라는 팻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휘적휘적 언덕을 내려갔다. 그리고 왠지 오늘이라면 그녀의 편지에 답장을 마저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전에 당신과 청파동 골목을 지날 때 말이야. 당신이 내게 물었던 말이 떠올라. 내 어떤 점이 좋냐던 물음말이야. 내 기억이 맞다면 당신의 물음에 난 대답해주지 않고 장난을 쳤던 걸로 기억해. 그런데 있잖아, 어떤 점 때문에 당신이 좋았었는지 나는 잘 모르겠어. 누가 좋아진다는 거, 사실 그건 점보다 면에 가깝고 면보단 입체에 가깝잖아. 그렇다고 내 어떤 입체를 좋아하는지 말해보라는 것도 웃긴 일이니까, 그러니까 당신에게 말을 못 했던 거야. 어디서부터 당신이 좋았는지에 대해서는 말이야.


나는 그보다 어디까지 당신이 좋았는지 말해 보려고 해. 그것에 대해서라면 조금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종종 몸서리치게 외로워하는 당신의 모습까지 사랑했다고 생각해. 당신이 혼자 밥을 먹게 될 모습이나, 아무도 없는 현관을 열고 들어갈 모습, 좁은 방 침대에 살포시 눕는 모습에 대해 생각하곤 해. 때때로 돌아가신 엄마를 그리워하거나 엄마가 꿈에 나왔다고 흐느끼던 모습 같은 것들, 그렇게 온통 슬퍼하고 일어나서 조촐하게 아침을 차려 먹는 모습까지도 그 어느 것 하나 당신과 관련된 그리움을 떠올릴 때 눈물 나지 않는 것이 없었어.


비가 오면 유독 쓸쓸한 기분이 들곤 하잖아. 특히 비에 젖어서 선명해진 거리의 색깔 같은 걸 볼 때 말이야. 나는 정류장에서 당신을 집에 돌려보낼 때 혼자 우산을 쓰고 걸을 당신의 모습에도 퍽 눈물이 났어. 왜 그런지는 묻지 말아 줘. 나도 그런 이유까지는 잘 모르니까. 아무튼 그래서 나는 비가 오는 날에는 꼭 당신을 집 앞까지 바래다주고 싶었어. 아마 당신의 말대로 이건 당신이 슬퍼서가 아니라 나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 쏟아낸 마음일지도 몰라.


나도 참 신기한 일이 있어. 나는 누군가의 외로움에 내가 꼭 필요한 사람이 되길 내심 바라고 있었던 것 같아.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나는 정작 다른 사람의 외로움에 별 관심이 없어. 누군가의 외로움에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면서 말이야. 당신 말마따나 참 아리송한 일이지? 나는 그저 당신이 외로워할 때만 유독 가눌 수 없이 가여움을 느끼게 되는 거야. 심지어 그게 나를 날카롭게 할퀴어버린 지금까지 말이야... 혹시 당신의 외로움을 달래면 나의 외로움까지 같이 달래 져서 그런 건 아닐까 싶어. 이거 사랑이지 않았을까...? 다시 한번 만날 수 있다면 꼭 당신에게 이걸 물어보고 싶었어.


잘 가. 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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