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님이 제 글에 '좋아요'를 눌러주실 때마다 제 휴대전화에 알람이 울렸습니다. 처음엔 '한 두 꼭지 읽으시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며칠에 걸쳐 맹렬히 울리는 '좋아요' 알람을 보고 쑥스럽기도 하고 멋쩍기도 한 오묘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독자님이 '긴 여운을 느꼈다', '이 글과 함께 한 번 더 이별한 것 같다'라고 말씀해 주신 게 어떤 칭찬보다 기쁘네요.
가끔 이런 상상을 합니다. 어디로 닿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바다에 유리병 편지를 흘려보내는 거예요. 이게 바위에 닿거나 별로 필요 없는 사람에게 발견되면 그저 병 속에 담긴 편지겠지만, 펼쳐서 읽어보면 누군가에게는 글씨 이상의 의미가 되기도 해요. 거기에 적혀있는 것들은 어디론가,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것들 이거든요. 내심 들키고 싶었던 비밀 일지도 모르고요. 저에겐 글이 그런 역할인 것 같아요.
전에도 썼듯, 저는 사랑을 사랑으로, 혹은 아픔을 아픔으로 두고 싶어서 글을 씁니다. 분명히 내 안에 그런 마음들이 있는데 모른 척 덮어두면 조금씩 저를 삐걱대게 만드는 것 같거든요. 너무 오래 방치해 두면 나중에는 완전히 녹슨 양철인간처럼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있어요. 그런 감정들은 마치 응달에서 켜켜이 쌓인 눈 같아서 제대로 걷어내서 햇빛을 쬐어주지 않으면 응어리로 남아있는 거죠.
그걸 녹이기 위해서 저는 조금 아프거나, 슬프거나, 그립더라도 나의 시간을 바로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슬픈 일이었는데 기쁜 일인 척한다든지, 욕심인데 사랑인 척한다든지, 좋아했었는데 미움인 척한다든지, 그렇게 해서는 해묵은 마음을 제대로 녹일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예전의 일이나 아직 오지 않은 일들을 부러 현재로 불러와 마주하는 일을 하곤 합니다. 그러면 감정이나 상황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제야 제대로 그것들과 작별하는 시간을 갖고요. 나의 일을 각각에 맞는 보자기로 잘 감싸놓는 일, 그러니까 쓰는 일을 하면서요. 슬픔은 슬픔으로 감싸고, 사랑은 사랑으로 감싸서요.
막상 사랑에 빠져있거나 이별이 눈앞에 닥쳤을 때는 그것이 너무 크게 느껴져서 제대로 봐줄 겨를이 없는 것 같아요. 저는 그랬거든요. 독자님은 혹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어떤 작가님께서 ‘사랑 옆에 한자리 내어줘야 사랑에 대해서 제대로 쓸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아마 이런 걸 두고 말씀하신 게 아닐까? 하고 감히 추측해 봅니다.
언젠가 제가 사랑을 앞두고도, 혹은 슬픔을 앞두고도 그 옆에 한자리 내어줄 수 있을까요?. 그래서 진짜 사랑을 하고, 진짜 울음을 우는 어른이 될 수 있을까요? 그때쯤이면 픽션은 무엇이고 논픽션은 무엇인지 알 게 될 수 있을까요?
오랜만에 장문의 댓글을 받아서 마음이 싱숭생숭했네요.답변이 너무 길어져서 댓글이 아니라 이렇게 글로 올리는 것을 양해해 주세요. 제 남루한 글을 읽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