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은 태어난 곳의 풍광, 그리고 그곳의 사람들을 닮은 맛과 향을 가진다. 누구나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잘 익은 블루베리 같은 과일향. 뾰족한 곳 없이 포근하게 입안을 감싸주는 타닌. 와인을 삼키고 나면 은은하게 퍼져 나오는 얼그레이 티를 연상시키는 여운. 이런 요소들이 한 데 모여 어우러진 산타바바라의 피노 누아는 뜨거운 햇살. 시원한 바닷 바람. 언제까지나 게으름 피우고 싶게 만드는 따듯한 분위기를 가진 산타바바라의 풍광을 꼭 닮았다.
산타바바라에 처음으로 Santa Barbara Winery라는 이름의 와이너리가 세워진 것은 1962년, 그리고 그보다 조금 늦게 Uriel Nielson에 의해 처음으로 포도밭이 조성된 것이 1964년의 일이다. 캘리포니아 북부의 소노마와 나파가 19세기부터 유명한 와인 산지였다가 20세기 초의 금주령 때문에 그 명맥이 끊겼던 것과 달리, 산타바바라는 원래부터가 와인과 인연이 없는 동네였다.
하지만 처음으로 와인과 인연을 맺은지 50년이 지난 지금, 산타바바라는 캘리포니아에서 손꼽히는 와인 산지가 되었다. 특히 이곳의 피노 누아를 주제로 촬영하여 2006년 개봉한 영화 《사이드웨이》는 출연진은 물론 제작자조차 예상하지 못했을 정도로 엄청난 흥행 성적을 거두며 수 많은 와인애호가들을 산타바바라로 불러 모았다.
보통 이런 사건이 벌어진 다음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땅값이 오르고, 와인 가격도 오르고, 점점 더 와인 그 자체보다는 "이름"이 더 큰 의미를 갖는 시대가 도래하게 마련인데 다행히 산타바바라의 와이너리 주인장들은 "사업가"보다는 "농부"의 마인드를 지닌 사람들이 대부분. 먼저 유명세를 탄 북쪽의 소노마, 나파에 비하면 산타바바라의 와인들은 여전히 현저하게 낮은 가격을 유지하고 있다. 유명세를 타고 거품이 낀 평가가치에 편승해 비싼 가격으로 대기업에 매각된 와이너리 역시 그리 많지 않다.
여전히 산타바바라는 농사를 짓고, 와인을 만들고, 이를 멀리서 찾아온 손님들과 나누는 행위 그 자체가 주는 순수한 즐거움이 아직 많이 남아있는 땅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와인. 언덕 하나, 길 하나를 넘을 때마다 급격히 달라지는 기후가 가져다 주는 다양한 품종. 유쾌한 사람들. 그리고 도시 전체에 흐르는 편안한 공기.
이것이 내가 산타바바라를 찾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