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여자 연애 고백사 6
가끔 학원에도 직장을 다니면서 취미로 영상을 배우는 어른들이 찾아온다. 일을 마치고 저녁 시간을 포기하고 자신의 새로운 취미를 위해 매일 학원에 오는 그들을 보며 한 번씩 감탄하기도 한다. 누구나 영상에 대해서는 막연한 호기심과 영상제작자에 대한 부러움 같은 것들이 있다 사실을 종종 발견하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내가 이제껏 했던 대부분의 일들은 남들이 보기에는 신기하게 비춰지곤 했다. 3D 광고 제작자, 작가, 유튜브 등 내가 했던 것들을 이야기할 때면 다들 이런 반응이다.
“우와. 나도 한 번 해보고 싶었는데. 그거 어떻게 시작해요?”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한다.
“그냥...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바로 이것저것 찾아보고 시작했어요.”
이 자리까지 오기까지의 그 여정이 너무나도 길고 힘들었고, 외로움과 절망과 질투 등 수만가지의 감정 널띄기 속에서 버텨 온 세월을 다 말하기 힘들어 ‘그냥 시작했다‘라고 이야기하며 끝낼 수 밖에.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무조건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시작했고, 일단 시작하면 끝까지 노력해보는 끈기가 합쳐지니 이런 나의 성격에 겉은 멀쩡한데 자존감 낮은 남자들이 꼬였다. 그들이 나에게 항상 했던 말은 이렇다.
“너는 쪼끄만한 애가 참 멋있어.”
처음에는 멋있다는 말이 좋았다. 내 덩치보다 몇 배의 값을 하고 있는 것 같았고, 그 멋있음이 나를 커보이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자존감 지킴이가 되어가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나도 상대가 멋있다는 느낌을 받고 싶어 사귀기 시작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뒤로 갈수록 찌질한 모습만 보이는 그들의 모습에 신물이 날 즈음이었다.
때는 가을에서 겨울로 막 넘어가는 어중간하게 쌀쌀한 시기였다. 학원에서 새 기수의 첫 수업 날이었다. 사람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공기가 살짝 후끈해진 강의실을 둘러보니 중간 즈음에 30대의 준수하게 생긴 남자 수강생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수업이 끝나자 내 눈을 지긋이 마주치며 싱긋 웃었다.
“안녕히 계세요.”
뭔가 느낌이 달랐다. 보통 인사하면 눈을 마주치지 않고 그냥 고개만 숙이거나 하는 게 대부분인데 이 남자는 내 눈을 똑바로 보며 인사한다. 그는 그 날 이후로도 나에게 그렇게 인사했다. 그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 남자는 따듯한 사람이라는 걸. 하루는 수업을 마치고, 그가 컴퓨터를 정리하며 말했다.
“학원 오길 진짜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게 제가 딱 배우고 싶었던 거였기도 하고, 인사이트를 진짜 많이 얻었어요.”
학원 강의를 하면서 수강생으로부터 이런 말을 직접 듣는 게 처음이었다. 그의 표현 방식에 놀라기도 했다. 서스름없이 좋으면 좋다에서 끝나지 않고 왜 좋았는지까지 상대방에게 이렇게 잘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라 좋았다. 나도 학원 다닐 때 강사에게 그렇게 말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좀 더 적극적으로 다가왔다.
“쌤 지브리 좋아하세요?”
“지브리 좋아하죠.”
“그럼 영화 보실래요?”
그 날 처음 우리는 학원이 아닌 밖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드는 영화를 좋아하는 그는 영화가 끝나고 나서 그 장면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자신의 생각을 계속 말했다. 엄마나 여자인 친구가 아닌 남자와 이렇게 영화에 대해 깊게 이야기한 적은 처음이라 내 마음이 말랑꼴리해졌다. 우리는 근처 맥주집으로 가서 간단하게 한잔했다.
“쌤 인스타그램 보니까 글도 쓰시던데요? 쌤 진짜 멋있는 것 같아요.”
‘흠... 이 남자도 나를 멋있다고 하네.’
그의 말에 살짝 흥미가 떨어지려 했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이렇게 말하며 다가왔기 때문이다.
“아... 그래요?”
그는 내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네. 왜냐면 저는 쌤에 비하면 진짜 단조로운 삶을 살았거든요. 그냥 무난하게 고등학교 다니고, 대학교 다니고, 시험공부해서 취직하고. 그래서 쌤처럼 열심히 자신의 길을 만들어나가는 사람이 멋있어요.”
그 말에 나는 달달한 시럽이 들어간 하이볼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짭쪼롬한 오징어입을 하나 입에 넣고 말했다.
“음... 나는 내가 멋있어보이고 싶다기보다는... 이렇게 안 하면 못 살겠더라고요.”
“왜요?”
“그냥 지루해서요.”
“아...”
“무언가 다른 사람과 조금 달랐으면 좋겠고, 성취감도 계속 느끼고 싶고. 그게 아니면 내가 사는 의미를 잘 못 느껴요. 그래서 뭔가를 계속 이뤄나갔나 봐요. 편한 길 놔두고.”
“저랑 진짜 다르네요.”
남자는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그에게 살짝 씁쓸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안정적인 사람이 부럽기도 해요. 제가 가졌던 직업들은 한때 반짝인 것들도 있고, 계속 새로운 것들을 사냥하지 않으면 먹고살 게 없거든요. 그래서 스스로는 멋있다고 느껴지기 보다는 항상 떠도는 느낌도 들고, 불안정하죠.”
그는 내 말을 듣고 맥주잔을 만지작거리더니 말했다.
“생각해보니까... 멋진 것들은 다 불안정한 거더라구요. 또 불안정해서 멋진 거기도 하구요. 불안정한데도 계속 달려가니까 멋진거죠.”
그의 말이 좋았다. 자신의 깊은 생각들을 꺼내 나에게 보여주는 방식도 좋았다. 나는 그날 스스로를 인정하게 되었다. 불안정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불안정 속에서 안정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란 것을. 나도 삶에 스토리가 있는 사람을 좋아하고, 동경한다. 나도 상대로부터 그런 이야기들을 듣고 싶은데 이 남자는 평범한 삶을 살았다고 하고, 내 이야기에 감탄만 한다.
그렇게 우린 깊은 대화로 그냥 친구가 되었고 연락은 끊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