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함께한 2,000일
지고지순한 사랑은 소설에서나 봤다. 장난같은 연애는 늘 짧았다. 애정은 덕질로만 배워서 상호작용엔 영 서툴렀다. 감정은 양 끝단에서 널뛰어 만성피로였다. 그게 뭐가 됐든 매번 끝을 정해놓고 시작하는 버릇은 지랄 맞아서 끝을 말하는 쪽은 언제나 나였다. 딱 한 번이었다, 저가 먼저 끝을 말한 건. 그래놓고 보고싶단 한 마디에 달려온 것도 저였다. 그 이후로는 끝을 말하지 않았다.
연차가 차면서 주위 친구들은 하나둘씩 뭐가 되기 시작했다. 너도 착실히 살면서 뭐가 되어 가는 동안 나는 지루하게도 그자리에서 죽음과 실랑이했다. 아, 끝을 정해놓고 시작하는 건 늘 삶이다. 염라대왕 하이터치회의 1열 관객이었다. 여섯 살 때도, 열 살 때도, 열 한 살 때도, 스물 한 살 때도, 서른 두 살 때도. 스마트폰을 처음 가졌던 2011년 부터 액정은 단 한 번도 깨본 적이 없는데 신체는 갖가지 이유로도 바스라졌다. 깨진 멘탈을 부여잡고 살았다 약정은 끝나지도 않는데. 부처님이 그랬으니까.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지.
외래에 줄지어 앉아있던 환자들에 비하면 감사한 수준이었다. 요르단 강물이 턱 밑까지 차오른 게 몇 번이었는데도 여전히 사고할 수 있었고, 앞이 보였고, 말을 했고, 두 발로 걸을 수 있었다. 조금 멍청해진 건 논외로 하자. 그러면서도 분에 넘치는 생각을 했다. 아, 죽었으면 편했을 텐데. 왜 나는 다시 살아서. 산산조각을 하고 사는 건 썩 멋있지 않았다. 파편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아무데나를 찔렀고 멘탈은 이윽고 뼈가루가 됐다. 전기가 나간 공장. 충전기를 잃어버린 폰. 친구들의 에너지를 수혈받아야 겨우 호흡할 수 있었다. 하나둘씩 뭐가 되어도 되기 시작한 애들 사이에 멈춰있는 내가 초라해서. 그래서 한동안은 내가 친구들을 끊었다. 글쓰는 일도. ***문턱은 넘어서면 어지러워 내 세상은 15평 짜리가 되었다. 너는 그 좁은 세상의 좀비였던 날 유기견처럼 보살폈다.
포크질도 제대로 못했으면서 펜을 쥘 수 있게 되자마자 종이 위에 휙휙 빗나가는 글자를 자필로 쓰고 서명까지 했다.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들어놓은 예금 비밀번호는 뭐고 내가 반 넣은 전세 보증금 너 다 가져 따위의 내용이었다. 선생님은 울망한 눈을 하고서 그런 짓 좀 하지 말랬다. 나의 생을 기적이라 말했던 분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돌연사가 만연한 세상이었으니까. 기적과 사고는 같은 얼굴을 하고 오니까. 사고가 나지 않았다면 기적도 필요하지 않았겠지. 무슨 일이든 ‘왜’가 중요했던 나는 그쯤 인정했다. 벌어지는 많은 일이 꼭 원인이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원인 없는 결과가 훨씬 많았다. 그래서 묻지 않았다. 왜 이런 나를 만나니. 다만 물었다. 내가 이렇게 고장나버렸는데도 계속 만날 수 있겠니. 너는 그랬다. 내가 사지를 못 쓰게 되어도 업고 다닐거라고. 너는 이미 그랬다. 인공호흡기 안에서 검은 피를 울컥울컥 토할 때도, 장기를 얼려서 어쩌고 저쨌다는 치료를 했을 때도, 준비를 해야할 것 같다는 의사의 말에도. 아, 소설로 써도 설정과잉이라고 욕 먹을 문장이었다 방금은. 떠나려면 떠날 기회는 많았고 너는 지금도 옆에 있다. 하여튼 이번에도 살았다. 너가 나를 살렸다. 너를 너무 많이 울렸다.
완전히 고장났다고 생각했는데 인지하지 못한 사이 악력이 돌아왔고 말에서 어눌기가 사라졌고 갈비뼈도 안아팠다. 사람은 이유도 없이 죽을만큼 나약하면서 살려놓으면 또 어떻게든 회복해낸다. 알 수 없다. 너는 이제 지나가는 구급차 소리에 놀라지 않고 티비에 나오는 응급구조사나 응급실 의사들을 보고도 울지 않는다. 일상이 굴러가고 있었다. 기왕 예쁜 원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만 또 그게 7956각형이라한들 어떠하리.
그니까 나의 이 지랄염병같은 롤러코스터를 동승한 사람은 너밖에 없어서. 버거울 수 있었으면서. 내려달라 할 수도 있었으면서. 그러니 너는 내게 빛이자 빚이다. 앓으니 죽지란 말은 농으로라도 하지 않게 되었다. 지고지순한 사랑은 소설에서나 봤다. 나는 지금 소설 속에 살고 있나 보다.
*방탄소년단 - Save me
**정호승 산산조각
***타블로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