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있어도 도망치고 싶은 날

프롤로그

by 수안

아침 8시 반, 언제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고 불쾌하기만 한 기계음에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다. 전날 마감을 치고 새벽 네 시가 넘어 겨우 잠들었다. 아침 10시에 일어나기로 계산을 끝내놓고. 그 때 쯤이면 업무 하기에 늦지 않고, 수면 시간도 6시간 정도 채우는 셈이니까. 그런데 타의에 의해 깼다. 창문 밖이었다. 우리집은 15층, 그럼 보통 하나다. 사다리차 소리. '위잉' 하는 둔탁한 모터음과 함께 육중한 쇳덩이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에 용수철처럼 튀어나가 베란다 밖을 내다보았다. 은색 사다리차가 우리집 바로 아래층 베란다를 향해 목을 걸쳐놓은 채였었다. 아랫집이 이사를 하는 날인가 보다. 이 집에 2년 반을 사는 동안 아랫집은 세 번이 바뀌었다.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보금자리를 꾸리는 설레는 시작이겠지만, 내게는 재난의 서막이다.

아니나 다를까, 큼지막한 가구들이 빠지기 시작한다. 이사의 가장 큰 원수는 에어컨이다. 에어컨은 설치할 때도 시끄럽지만 철거할 때도 난리법석이다. 기본이 드릴 소리부터 출발이다. '드르르륵' '위이이잉' 요란한 파열음과 진동은 콘크리트 벽을 타고 올라와 발바닥을 거쳐 뇌리를 직접 때렸다. 이건 나가는 세입자가 본인의 에어컨을 철거하는 소리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노이즈캔슬링 모드를 켜도 무용지물이다 뼈를 울리는 진동 앞에서는. 계산한 만큼 못 잔데다가 소음으로 깼으니 컨디션이 좋을리 없다. 불쾌한 기분은 차치하더라도 업무에 집중이 안된다. 모니터 화면의 글자들은 드릴의 박자에 맞춰 춤을 추는 듯했고, 머릿속에 간신히 붙잡아두었던 문장들은 파편처럼 흩어졌다.


결국 나는 백기를 들었다. 노트북과 충전기, 다이어리를 주섬주섬 가방에 쑤셔 넣고 쫓기듯 현관문을 나섰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피란민이다. 가장 안전하고 편안해야 할 내 집에서, 나는 도망나온다.


콘센트와 와이파이가 잘 되어있는 동네 어귀의 프랜차이즈는 이미 만석이다. 자전거를 굴려굴려 옆 블록으로 옮긴다. 여긴 다행이 자리가 있다. 카페 구석 자리에 앉아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쭈우욱 들이키고 나서야 요동치던 심박수가 잦아들었다. 카페에는 나처럼 노트북을 펴놓고 무언가에 열중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그들 틈에 섞여 백색소음을 들으며 안도감을 느끼는 내 처지가 퍽 우스웠다. 수억 원의 빚을 지고 마련한 안식처에서 쫓겨나, 커피 한 잔 값을 지불하고 빌린 타인의 상업 공간에서 평온을 찾다니.


문득, 이 모든 피로감과 억울함의 근원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본다. 한 층에 4가구가 사는 15층 짜리 복도식 아파트는 하루가 멀다하고 이사를 드나들며 공사 동의서를 받으러 온다. 이 집이 끝나면 저 집이 시작이다. 3일에서 한 달 반까지 다양하다. 새로운 이웃이 이 30년 된 구축 아파트에 얼마나 애정을 쏟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지난 달에는 바로 옆집이 한 달 동안이나 리모델링 공사를 했다. 무려 한 달. 누수가 원인이었다. 어디서 시작되는지 몰라 집을 갈아 엎고, 그 김에 도배며 뭐며 새로 싹 했다고 했다. 덕분에 나는 무서움에 벌벌 떠는 고양이를 진정시키며 이어폰 소리를 최대한 올리고 일을 했다. 내 비극은 어디서 오는 걸까? 이웃의 문제라고 볼 수 없다. 더 좋은 곳에서 살고 싶은 건 모두의 기본 권리다. 그럼 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수백 세대가 닭장처럼 연결된 아파트라는 기형적인 주거 형태 때문일까? 물론 그것들도 훌륭한 핑곗거리가 되겠지만, 내면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집에서 일하는 사람, 즉 재택노동자라는 사실이었다.


만약 나에게 매일 아침 정해진 시간에 출근해야 할 번듯한 직장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랫집의 이사 소음이나 인테리어 공사는 그저 내가 집을 비운 낮 시간 동안 일어나는, 나와는 무관한 타인의 일상이었을 것이다. 저녁 늦게 퇴근하고 돌아왔을 때 복도에 남은 약간의 먼지나, 엘리베이터에 붙은 양해를 구하는 쪽지 정도로 끝날 해프닝이었을 테다.


하지만 내게 집은 곧 사무실이자 치열한 생계의 현장이다. 타인의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의 궤적이 내게는 생존과 밥벌이를 위협하는 폭력으로 둔갑하는 기적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아파트라는 밀집된 공간에서 프리랜서로 살아간다는 것은, 타인의 삶이 내는 온갖 소음과 진동을 온몸으로 막아내며 고요와 집중을 사수해야 하는 끝없는 방어전과 같다. 왜 작업실을 구하지 않느냐는 질문은 핵심이 아니었지만, 이번 주를 기점으로 작업실을 구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하게 됐다. 아랫집의 이사는 서서히 차오른 컵에 이윽고 떨어진 한 방울이다. 이제 나는 돌이킬 수 없이 넘쳐흐르고 만다. 그간 참아왔던 모든 타격들 - 어느 집인지 모를 아이가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 서툰 피아노 소리, 드릴 소리에 이어 오늘 비롯된 아랫집의 이사가 마지막으로 떨어져 넘쳐 흐른 한방울이다. 나는 백기를 든다. 이 모든 생활음은 '집'이라는 공간의 용도가 '휴식'에서 '노동'으로 치환되는 순간, 결코 견딜 수 없는 소음 공해로 변한다. 물론 휴식을 취하는 동안에도 이런 공해는 있어서는 안될 재앙일 테지만, 저녁과 주말에만 집에 있는 사람과 굳이 외부 일정이 없는 한 두문불출 집에서 휴식과 노동을 모두 소화하는 사람에게 이 타격은 다른 차원의 일이다.


결국 내가 겪는 아파트 생활의 모든 고통과 슬픔은 어쩌면 이 직업적 특성에서 출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공간의 경계가 무너진 삶 일터로 변해버린 집은 나를 무조건적으로 품어주는 따뜻한 안식처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외부의 자극에 가장 취약하게 노출된, 언제든 짐을 싸서 도망쳐야 할지도 모르는 불안한 최전선일 뿐이다.

카페의 웅성거림 속에서 다시 타자를 치기 시작하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일과 휴식의 경계가 지워진 나에게 진정한 의미의 '집'은 도대체 무엇인지. 도망치듯 빠져나온 그 네모난 콘크리트 상자 안으로 저녁이 되면 다시 돌아가야만 한다. 돌아간 그 곳은 부디 일터가 아닌, 온전한 나의 집이기를 바라면서.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