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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C Oct 05. 2017

행복결여사회

※ 이 글은 2018년 1월 3일 출간된 '우리의 일자리는 어디에 있는가?(내하출판사)'에서 그 도서의 전반적인 성격과 다소 이질감이 있어 배제한 원고이다. 박근혜 전 정권까지 지나오면서 최근 10여 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우리가 읽어버린 '행복'이라는 가치에 대해서 화두를 던져보고 싶은 생각에 작성한 원고이다. 한 권의 책의 한 Chapter로 대중들에게 찾아갈 수 없다는 아쉬운 마음에 내 개인 블로그를 통해 원고를 공유하오니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이 생각이 공유되기를 바란다.

                                                                                              -2017년 10월 4일(수), 김포시 유현마을에서 -




   “현재의 대한민국은?”

   이 질문에 어떻게 답변할 수 있을까? 막연한 느낌만이 든다. 그래도 이 질문에 답변을 해야 이야기를 이끌어 갈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래도 저자는 실수를 한 것 같다. 왜 이렇게 무겁고, 어려운 질문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했는지,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온다.

   2017년 2월 20일 오후 10시를 막 지나고 있다. 저자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시각이다. 아마도 이 시각을 기준으로 답변을 해야 할 것 같다. 아, 뭐라고 해야 할까? 또 막상 답변하려니 적절한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런데 ‘현재의 대한민국’이라는 문구로 인하여 가슴 가득히 차오르는 감정들이 있다. ‘답답함, 분노, 좌절, 패배감, 우울, 등등’ 바로 이와 같은 감정들이다. 아마도 이 글을 읽고 있는 다수의 독자들에게 이 감정들이면 “현재의 대한민국은?”이라는 질문에 충분히 답변이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저자는 왜 현재의 대한민국을 생각하면서 ‘답답함, 분노, 좌절, 패배감, 우울, 등등’이라는 감정이 떠올랐을까? 지금부터 그 이유를 차근히 설명하도록 하겠다.      


#1. 그리움 속에서 사는 한국 청년들, ‘집밥 열풍

   어느 순간부터 ‘열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대한민국의 청년들은 집밥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집밥 열풍의 시작은 2015년부터 방영된 MBC의 ‘마이 리틀 텔레비전’과 tvN의 ‘집밥 백선생’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이 방송 프로그램들의 출연자는 성공한 요리연구가이자 요식업 프랜차이즈 기업의 대표인 백종원 씨였다. 그가 선보인 음식들은 기존 방송 프로그램들에서 유명 셰프들이 선보이던 요리들과는 다른 평범한 것들이었다.

   “어머니가 예전에 손수 만들어 주시던 음식 맛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난다.”

   “예전의 그 맛을 혼자서도 쉽게 낼 수 있는 조리법이다.”

   백종원 씨는 자신의 음식들을 소개하고, 그 조리법들을 공개할 때 이러한 말들을 자주 사용했다. 실제로 그가 운영하고 있는 음식점들의 대다수 음식들은 가격이 비교적 저렴하고 소주 한 잔을 편안하게 기울이며 식사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 음식들의 풍미와 영양가 등을 따지고자 한다면 미식가들이나 맛 칼럼니스트들에게 호평을 받기가 어려울 것이다.(맛 칼럼니스트인 황교익 씨는 백종원 씨의 조리법들로 만들어진 음식들이 건강에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고 우회적으로 비판한 바 있다.[1]) 하지만 백종원 씨가 방송 프로그램들에서 ‘집밥’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한 음식들은 대중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켰고 감성을 자극했다. 결국 ‘집밥 열풍’이라는 사회적 현상을 만들어냈다.

   “집밥, 도대체 집밥은 무엇인가?”

   집밥은 ‘집에서 즐겨 먹는 밥’을 의미하는 줄임말이다. 단어의 의미만을 본다면, 집밥은 새로운 음식이 아닌 우리가 어제도 먹었고 오늘도 먹으며 내일도 먹을 평범한 음식인 셈이다.

   “그런데, 왜 청년들은 집밥에 열광하게 된 것일까?”

   아마도 그 이유는 한국의 청년들에게 집밥은 단순한 음식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 때문일 것이다. 음식 이상의 의미……. 아마도 그것은 그리움과 따스함, 좌절 속 한 줄기의 빛, 등등. 바로 이러한 것들이 아닐까?

결국, 집밥 열풍은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사회구조적인 문제들과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청년들의 경제적·정서적 문제들이 서로 화학 작용을 일으켜 발생한 사회적 현상이라고 볼 수가 있다.

   세계일보의 김현주 기자[2]는 “이렇게 집밥이 그리운 것은 실제 맛보다 정서적인 느낌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을 조금 더 빌리자면, 현재는 바야흐로 ‘평범한 일상이 그리워진 시대’인 것이다.

   평범한 일상이 그리워진 시대…….

   “무엇이 한국의 청년들로 하여금 평범한 일상이 그리워지게 하는가?”

   이 질문에 답변하기에 앞서 [그림 1.1]과 [그림 1.2]를 보도록 하자.

   ‘가족형태의 구성 비교([그림 1.1])’를 보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1인 가구(1인 가족)가 상당히 증가(2010년 15.8% → 2015년 21.3%)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2017년 1월 국회의장실의 의뢰로 한국갤럽이 설문 조사한 ‘연령별 체감경제고통지수([그림 1.2])’를 보면, 19~29세의 체감경제고통지수(26.7%)가 60세 이상(체감경제고통지수 38.7%) 다음으로 높은 수치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 두 결과들을 단 몇 마디의 말로 단정 짓기는 어렵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상당수 한국의 청년들이 경제적인 문제에서 기인하는 심각한 수준의 체감고통을 겪고 있으며, 이러한 이유 등으로 1인 가구 생활을 하고 있는 상당수 한국의 청년들이 외로움과 그리움 같은 정서적 갈증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한국의 청년들에게 ‘집밥’은 행복해지고 싶고 포근함을 느끼고 싶다는 열망이 투영된 일종의 투영체(投影體)인 것이다.        


                                               

  [그림 1.1] 가족형태의 구성 비교[3]



자료: 국회의장실이 한국갤럽에 의뢰한 설문조사 활용

 [그림 1.2] 연령별 체감경제고통지수(2017년 1월 조사)[4]     


   오찬호는 그의 저서 「대통령을 꿈꾸던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를 통해서 “한국 사회는 죽도록 노력해서 평범해지는 것을 목표로 한다.[5]”고 지적한 바 있다. 죽도록 노력해도 평범해질 수밖에 없는 사회. 이러한 사회에서 ‘집밥 열풍’은 ‘평범한 일상이 그리운 한국 청년들의 울부짖음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2. 어쩔 수 없이 혼자가 편해진 사회

   지금의 대한민국은 상당수의 청년들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혼자가 되어서 “어쩔 수 없이 혼자가 편해요.”라고 자기 위안밖에 할 수 없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저자는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어쩔 수 없이 혼자가 편해진 사회

   도대체, 왜 한국이 이런 사회가 된 것일까?

그 시발은 국내 경제상황의 악화일 것이다. 국내 경제상황의 악화는 ‘N포 세대’라는 사회적 현상을 출현시켰고, 이 사회적 문제가 개선될 여지없이 장기화되면서 ‘나 혼자’라는 또 다른 사회적 현상이 파생되기 시작했다.

   N포 세대는 2015년 취업시장에서 생겨난 신조어이다. 무한을 뜻하는 ‘N’과 포기하다의 앞 글자 ‘포’에서 그 의미를 가늠할 수 있듯이, N포 세대는 사회·경제적 상황의 악화로 인하여 연애와 결혼, 내 집 마련, 출산 등 많은 것들을 포기한 세대라는 의미를 가진다. 사실, N포 세대라는 신조어가 근래에(2015년부터) 바로 생겨난 것은 아니다. 기존의 3포 세대(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와 5포 세대(연애, 결혼, 출산, 내 집 마련, 인간관계), 7포 세대(연애, 결혼, 출산, 내 집 마련, 인간관계, 꿈, 희망)에서 더 나아가 숫자의 정함이 없이 보다 더 많은 것들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자 생겨난 단어이다.

   꿈과 희망을 넘어서 그 이상의 것들까지 포기해야만 하는 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N포 세대를 발생시킨 국내 경제상황 악화는 시간이 더 지나면서 프리터족과 니트족, 패러사이트싱글족, 초식남 등의 증가라는 사회적 현상들을 발생시켰다. 이 사회적 현상들은 국내 경제상황 악화에서 기인되었지만, 국가 경제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사회적 문제들도 보다 많이 발생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미혼이 아닌 비혼 인구의 급증과 출산율 급감으로 인한 인구절벽, 노동인구의 부족 등이 그 대표적인 문제들이다. 결국, 이러한 문제들은 꼬리를 물고 있는 뱀처럼 반복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든다.

   헬조선과 탈조선, 이 단어들을 독자들은 한 번쯤 접해봤을 것이다. 현재 한국의 청년들 사이에서 이 단어들은 많이 그리고 자주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헬조선은 지옥을 뜻하는 영단어 ‘헬(hell)’과 대한민국의 옛 국호인 ‘조선’이 합해진 신조어이다. 그리고 탈조선은 벗어나다의 뜻을 가진 한자 ‘탈(脫)’과 대한민국의 옛 국호인 ‘조선’이 합해진 신조어이다.

   OECD 회원국들 중 최대 청년 자살률을 보이는 국가, 대한민국!(OECD 국가 자살률 결과를 보면, OECD 회원국들의 평균 자살률(표준인구 10만 명당)이 12.0회인데 비해 한국은 25.8회로 가장 높은 수치를 나타냈다.[6])

   이제는 “어쩔 수 없는 혼자가 편해요.”라는 자기 위안이 아닌, 지옥 같은 대한민국 사회를 벗어나고 싶다는 간절함만이 한국의 청년들에게 남은 것 같다.

   자살, 어쩌면 이것이 지옥 같던 그들의 상황을 벗어날 최후의 방법이 아니었을까?     


#3. 2016년 겨울부터 2017년 봄이 오기까지,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푸른 하늘을


                         김수영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저자가 근래에 즐겨 읽고 있는 시다. 이 시는 김수영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억압하던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을 향해 내뱉었던 비판이었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한 갈망의 표출이었다.

   1968년 6월 16일 김수영이 세상을 떠나고 48년이 조금 더 지난 2016년 겨울, 대한민국의 광화문 광장에서는 촛불이 들불처럼 번졌다. 누웠던 풀이 일어나듯 민중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권을 향해서, 또 기득권 세력들을 향해서 외쳤다.

   “박근혜를 탄핵하라!”

   “재벌도 공범이다!”

   “이게 나라냐!”

   “박근혜·최순실·재벌을 구속하라!”

   정권을 향한 이 성난 외침들 이면에는 “세상을 바꾸자!”는 대다수 국민들의 요구가 있었다.

   세상을 어떻게 바꾸자는 것인가?

   프랑스 시민혁명(1789~1794년)과 러시아 혁명(1917년), 중국 혁명(1949년), 쿠바 혁명(1959년), 등등. 이러한 혁명들처럼 국가의 이데올로기와 통치체제 등을 급진적으로 송두리째 바꾸자는 것은 아닐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세상을 바꾸자!”는 외침은 수정되어야 한다. 사실, 그 본래의 의미는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모이게 한 당사자의 대선공약이었던 ‘비정상의 정상화’와 같기 때문이다. 다만, 그 사람이 생각했던 비정상의 정상화가 아닌 대다수 국민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비정상의 정상화라는 차이가 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 사건의 심각성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남용 및 악용하여 자신들의 사욕을 채웠다는 데 있다. 이전에도 기득권자들이 위임받은 권력을 남용 및 악용하여 자신들의 사욕을 채운 일들이 다수 있다. 하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그것들과 본질적인 측면에서 또한 심각성 측면에서 다르다. 왜냐하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하고 유린했기 때문이다.

   ‘정유라의 이화여자대학교 부정입학’과 ‘국민연금관리공단의 삼성그룹 특혜지원’, ‘최순실·차은택의 (주)포레카 강탈 시도’, ‘최경환 국회의원실 비서의 중소기업진흥공단 특혜 입사’,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 등등. 이 사건들만 보더라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기회의 균등과 사유재산의 침해, 표현의 자유 등 헌법적 가치를 얼마나 부정하고 유린했는지 알 수가 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사건인가!

   대한민국의 대다수 국민들은 이러한 비정상들을 이제는 바로 잡자고 촛불을 들고 광화문 광장으로 나선 것이다.

   환부에 염증이 생겨 고름이 들게 되면 모두 짜내고 소독을 하는 등 완전히 치료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환부는 계속 곪게 되고, 심각해질 경우 생명에 위협이 되기도 한다. 지금은 대한민국 사회에 든 고름을 모두 짜내고 소독해서 다시는 곪지 않도록 해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중요하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사회!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국가!

   지금의 환부를 잘 치료하면, 대한민국은 바로 이러한 사회와 국가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 저자는 믿고 있다.

    

#4. 행복한 사회? NO! 대한민국은 행복결여사회!

   “행복결여사회!”

   저자는 지금의 대한민국을 이렇게 부르고 있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국민들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행복이 빠져서 없거나 모자란 사회이기 때문이다. 사전을 찾아보면, 결여는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빠져서 없거나 모자람’이라는 뜻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래서 마땅히 있어야 할 행복이 없거나 모자란 사회, 즉 대한민국은 행복결여사회이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앞의 내용들은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전문’과 ‘제2장 제10조’이다. 간략히 요약하면, 국민들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고 국가는 국민들의 행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헌법은 지금의 대한민국 현실과 다소 괴리감이 있다. 국민들은 행복을 추구할 여유조차 없으며, 국가는 국민들의 행복을 위한 노력을 다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5.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다수의 사람들은 이 질문에 선뜻 답변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 이유는 개인마다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감정, 삶의 가치 등이 달라서 행복도 각자 다르게 느끼기 때문이다. 즉, 개인마다 느끼는 행복이 다르기 때문에 행복을 정의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이 무엇인지를 정의하고, 무엇으로부터 행복을 느끼게 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국민은 국가에게 보편적인 행복을 누리기 위한 국가 차원의 노력들을 요구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한 국가의 국민으로서 또는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개인이 개인적 요인에 의해서만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국가 또는 사회가 개인의 행복에 미치는 영향이 작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와 독자들을 포함한 우리들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행복’이 무엇인지를 정의하고, 그 행복을 위해 필요한 정치·사회·경제·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국가 또는 사회의 노력들을 요구해야 한다.

   그러면, 지금부터 행복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고대 그리스 시대의 사람들은 행복의 개념을 신으로부터 주어진 행운을 통해서 누릴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 당시의 사람들은 행복이 인간의 의지와 행위에 의해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닌 신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라고 믿었다.[7,8]

   중세기에 들어서는 행복에 대한 인식이 다소 변화하기 시작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행복이 온전히 외부적 요인인 ‘행운’에 의해서 느낄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했던 데 반해, 중세기에는 인간의 내면적 요인도 행복을 느끼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행복에 대한 생각을 잘 드러낸 사례가 13세기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Tomas Aquinas)의 주장이다. 그는 “인간은 신을 닮고자 하는 삶을 추구하는 과정을 통해서 완전하지는 않지만 부분적 행복을 얻는 것이 가능하다.”라고 주장했다.[9]

   이후 시간이 더 지나, 19세기 초반 공리주의(Utilitarianism)가 등장하면서부터 행복의 근원에 대한 논의가 온전히 인간 내면을 중심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당시 공리주의자들은 행복을 효용이고 쾌락의 극대화라고 주장했다.(공리주의는 공리성을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하는 사상이다. 곧 어떤 행위의 옳고 그름은 그 행위가 인간의 이익과 행복을 늘리는 데 얼마나 기여하는가 하는 유용성과 결과에 따라 결정된다고 본다. 넓은 의미에서 공리주의는 효용·행복 등의 쾌락에 최대의 가치를 두는 철학·사상적 경향을 통칭한다.[10])

   현대에 와서는 행복에 대한 정의가 보다 구체적이고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최근 심리학자들은 행복을 개인의 ‘쾌락주의적 입장’과 ‘자기실현적 입장’에서 정의하고, 그 행복의 근원을 찾고 있다. 쾌락주의적 입장에서의 행복은 ‘주관적 안녕(subjective well-being)’을, 자기실현적 입장에서의 행복은 ‘심리적 안녕(psychological well-being)’을 말한다. 즉, 그들은 행복을 경험과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얻어질 수 있는 것으로 본다.

   신득렬은 행복을 쾌락적인 측면과 상태적인 측면으로 구분하여 정의했다. 쾌락적인 측면의 행복은 행복한 감정을 느끼는 심리적인 것이나, 상태적인 측면의 행복은 일정 기간 지속되는 마음이 행복한 상태이다.[11] 최관경은 행복을 ‘과정에서 얻는 행복’과 ‘결과에서 얻는 행복’으로 구분해서 정의했다. 그는 ‘살맛’을 과정에서 얻는 행복으로, ‘보람’을 결과에서 얻는 행복이라고 정의했으며, 행복이 개별성과 다양성, 간접성, 활동성, 가변성, 평등성, 전환성의 특징을 가진다고 주장했다.[12] 마틴 셀리그만(Seligman, M.E.P.)은 행복을 즐거운 삶(pleasant life)과 유덕한 삶(good life), 의미 있는 삶(meaningful life)으로 구분해서 정의한 바 있으며[13], 그의 정의는 앞에서 언급한 행복의 정의들을 포괄하는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상기한 행복의 정의들을 종합하면, 행복이란 개인이 내면으로부터 느끼는 삶의 의미와 만족감, 즐거움 등이다. 그리고 행복은 순간순간의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단기적 행복’과 삶의 의미와 만족감을 느끼게 하는 ‘장기적 행복’으로 구분된다.     


#6.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가?, 행복의 조건

   행복은 결국 개인의 감정과 기분 등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감정과 기분 등은 개인의 마음가짐과 생각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개인의 마음가짐과 생각은 사회제도와 경제적 상황, 거주환경, 사회구성원들과의 관계 등 외부적 요인에 의해 상당한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행복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마음가짐과 생각 등 내부적 요인도 중요하지만, 외부적 요인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다음과 같은 예를 생각해보자.

   나행복은 모든 일들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30대 중반의 남성이고, 현재 지방의 작은 중소기업에서 생산직 직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매일 하루를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외치며 시작한다. 또한 간혹 사고를 당하거나 나쁜 일을 겪게 되더라도 나행복은 “이만하길 다행이야!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야!”라고 말하며 넘기곤 한다.

   여기서 나행복이 다니고 있던 기업이 경영상 어려움을 겪다가 도산을 했다고 가정을 해보자. 그리고 그 역시도 실직자가 되었다고 가정하자. 나행복은 실직자가 된 후 1~2년 동안은 긍정적인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실직 상태가 5년 이상 지속되어 생계유지까지 어려운 경제적 상황으로 내몰리게 된다면, 나행복은 그때도 긍정적인 마음으로 생활하며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다!” 저자는 분명 그렇지 못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재열은 외부적 요인에 해당하는 ‘경제상황’과 행복 간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 바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를 전후해 경제성장과 행복감 간에 질적인 변화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국민소득 1만 달러 이하의 국가군에서는 행복감과 국민소득 간에 매우 가파른 상관관계가 있지만, 1만 달러 이상 국가군에서는 그 기울기가 현저히 낮아지는 반면, 같은 소득군 내에서도 행복감의 격차가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질적인 변환점이 존재하는 것으로 읽힌다.[14]

   이재열의 이 주장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시사한다. 첫째, 저소득 국가에서는 소득수준과 행복감 간에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 둘째, 생계에 어려움을 겪지 않는 소득수준이 되면 소득수준 이외의 다른 요인들이 행복감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어스털린 패러독스(Easterlin Paradox)는 후자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말할 수 있다. 앞의 내용들을 종합해 볼 때, 국가는 국민 행복을 위해서 경제상황과 그 외의 외부적 요인들을 함께 고민하고 노력해야 할 필요가 있다. (Easterlin은 객관적 경제상황과 주관적 삶의 만족도가 서로 불일치하는 현상을 밝힌 바 있다. 그 현상은 Easterlin의 이름을 따서 ‘Easterlin Paradox’라 부르고 있다.[15])

   2017년 1월의 어느 주말 오후, 저자는 Youtube에 업로드된 서울대학교 최인철 교수의 강연 하나를 시청한 적이 있다. 그 강연의 제목은 ‘행복하고 싶다면, 행복한 사람 옆으로 가라’였다. 최인철 교수의 강연은 저자에게 흥미로움 그 자체였다. 그래서 그 내용들 하나하나를 곱씹으면서 시청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저자를 한동안 생각에 잠기게 한 내용이 있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버드 대학교에 재직하고 있는 니컬러스 크리태키스(Christakis, N.A.)와 제임스 파울러(Fowler, J.H.)가 저술한 「Connected : The Surprising Power of Our Social Networks and How They Shape Our Lives」에서는 다음과 같은 연구결과를 밝히고 있습니다. …(중략)… 한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의 SNS(Social Network Service)를 분석한 결과, 행복한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들과 모여 있었고, 불행한 사람들은 불행한 사람들과 모여 있었습니다. …(중략)… 내 친구가 행복하면 내가 행복해질 확률이 15%, 내 친구의 친구가 행복하면 내가 행복해질 확률이 10%, 내 친구의 친구의 친구가 행복하면 내가 행복할 확률이 6% 증가한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결국, 내가 행복하고자 한다면 행복한 사람들 곁으로 가십시오.”

   내가 행복해지고 싶다면 행복한 사람들 곁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행복한 사람들이 많아야 나도 행복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행복한 사람들이 많아야……. ‘어떻게 해야 행복한 사람들이 많은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을까?’ 저자는 다시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무엇이 우리들을 행복하게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되돌아 가보자.

   ‘매일 생계를 걱정하지 않을 정도의 소득수준 보장’과 ‘단위 공동체(Community)의 조성’은 “무엇이 우리들을 행복하게 하는가?”라는 질문의 답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지는 국가’와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국가’,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국가’ 등 대한민국 헌법적 가치의 실현이 우리들을 행복하게 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라고 저자는 믿는다.

   헬렌 켈러(Hellen Keller)는 “태양을 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고, 볼 수 없는 사람은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마음속에 빛을 갖는 일입니다. 힘과 용기를 가지세요.”라고 말한 바 있다.[16]

   맞는 말이다. 그리고 분명히 옳은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이 지금의 한국 청년들에게는 피부로 와 닿지가 않는다. 대한민국은 그 이유를 지금부터라도 깊이 있게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

   행복결여사회가 아닌 행복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



References

[1] 이진욱(2016), 황교익 “나는 ‘백종원 방송’ 조리법 권하지 않는다”, 노컷뉴스: 10월 23일.

[2] 김현주(2015), [김현주의 일상 톡톡] 우리가 원한 건 정말 집밥이었을까?, 세계일보: 12월 27일.

[3] 윤정아(2016), [그래픽]가족형태의 구성 비교, Newsis: 2월 4일.

[4] 연합뉴스(2017), 실업률 3.7%·물가상승 1% 맞아?…체감경제고통, 공식지표의 12배: 2월 2일.

[5] 오찬호(2017), 대통령을 꿈꾸던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믿을 건 9급 공무원뿐인 헬조선의 슬픈 자화상), 위즈덤하우스.

[6] 한상희(2016), 죽음으로 본 한국, 사망원인 1위 암…청년층 자살률 최다, 에너지경제신문: 9월 27일.

[7] Kesebir, P. and Diener, E.(2008), In Pursuit of Happiness : Empirical Answers to Philosophical Questions, Perspectives on Psychological Science, 3, 117-125.

[8] Oishi, S., Graham, J., Kesebir, S., Galinha, I.C.(2013), Concepts of Happiness Across Time and Culture,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Bulletin, 39, 559-577.

[9] McMahon, D.M.(2006), Happiness : A History, Atlantic Monthly Press: New York.

[10] NAVER 지식백과 ‘공리주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63244&cid=40942&categoryId=31528>

[11] 신득렬(2000), 행복과 교육, 교육철학, 제18집, pp. 191-208.

[12] 최관경(1999), 교육 목적으로서의 행복, 교육사상연구, 제8집, pp. 1-26.

[13] 마틴 셀리그만(Seligman, M.E.P., 2004), 긍정심리학, 김인자·우문식 역, 물푸레.

[14] 이재열(2015), 사회의 질, 경제, 그리고 행복, 아시아리뷰, 제4권 제2호(통권 8호), pp. 3-29.

[15] Easterlin, R.(1974), Does Economic Growth Improve the Human Lot? : Some Empirical Evidence, In David, P. and Reder, M.(Eds), Nations and Households in Economic Growth, Academic Press: New York.

[16] 박영신·김의철(2009), 심리적, 관계적, 경제적 자원 : 한국인의 행복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한국심리학회지: 사회문제, 제15권 제1호(특집호), pp. 95-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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