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눈을 붙인다는 게 한 시간을 자고 말았다.
“다음 정거장은 유현사거리입니다. 다음 정거장은 유현사거리입니다.”
이 반복된 안내 멘트가 아니었다면, 나는 미처 내리지도 못하고 꼼작 없이 몇 정거장을 지나쳐 갔으리라.
창밖을 보니 이화사거리가 보인다. 지금쯤 좌석에서 일어나 버스의 머리맡으로 나가 있어야 하차하기가 비교적 수월하다. 언제 사람들이 이리도 많이 탔는지. 버스 좌석 사이로 비좁은 통로에는 사람들이 가득이다. 그래서 버스 머리맡까지 가기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나는 7번째 좌석에 앉아있었는데 걸어 나가려니 한참이다. 이게 다 사람들 탓이다.
걔 중에는 배가 남산만큼 나온 중년의 아저씨도 있었고, 아주 짧은 초초 미니스커트를 입은 가슴이 아주 풍만한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도 있었다. 이 사람들을 지나쳐가기가 아주 곤란스럽다.
배가 남산만큼 나온 중년의 아저씨는 사람이 지나가는데 이건 뭐 배에 힘을 주고 집어넣는 시늉도 안 한다. 어릴 적 친구들과 오랜 된 건물들 사이의 좁은 틈을 지나가던 느낌이다. 어휴, 불편해.
그 아저씨를 지나쳐 몇 걸음을 더 내디디니 초초 미니스커트에 가슴이 아주 풍만한 20대 초반의 여성이다.
아, 쓰벌. 이걸 어떻게 지나가나?
요즘은 세상이 아주 흉흉하여 조심해서 그 여자를 지나쳐 간다고 하더라도 얼핏 내 몸이 젖가슴에 닿아 자극이라도 한다면, 또는 내가 그 여자 가슴의 촉감 때문에 자칫 자지가 발기라도 한다면 차내 비명소리는 물론 낯짝에 시뻘건 손바닥 자국이 나기 십상이다. 아니, 재수 없으면 인근 파출소에 끌려가겠지. 그것도 아주 억울하게 말이다. 썩을. 언제부터 세상이 이렇게 팍팍해졌단 말인가? 아주 불안 불안해서 못살겠다. 나는 그래서 회사에서도 여직원들과 눈도 안 마주치며 지낸다. 그런 탓에 여직원들은 나를 싫어하거나, 아주 특이한 놈 취급을 한다. 뭐, 그것도 나쁘지는 않다.
여하튼 나는 아주 무사히(?) 좁디좁은 차내 인림(人林)을 헤치고 버스 머리맡까지 왔다. 제일 앞에는 어깨 밑으로 한 15센티미터 정도 내려오는 염색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검은 생머리를 하고, 아이폰에 이어폰을 꼽고 노래를 들으며, 하늘색 골이 굵은 스웨터를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는 버스가 달리고 있는 방향, 즉 정면을 바라보고 서 있어 나는 그녀의 뒷모습만을 보며 서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었던 탓인지, 아니면 조금 몸에 불편한 정장을 입고 있었던 탓인지 나는 몸을 조금씩 계속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온 몸이 좀이 쑤시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제 유현사거리에 거의 다 도착했다. 버스는 유현사거리 신호등 앞에 정차하여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곧 좌회전 신호가 켜지고 버스가 좌회전을 하면 버스정류장까지 약 1~2분이면 도착한다.
내 앞에 정면만을 응시하고 있는 검은 생머리의 그녀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녀 바로 뒤에 서 있으니 은은한 향수 냄새가 난다. 그리고 머리칼 사이로 살포시 희디흰 그녀의 뒷목이 보인다. 궁금해진다. 어떻게 생겼을까? 예쁠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채워간다.
버스가 좌회전 신호를 받으면서 몸이 한쪽으로 기운다. 나뿐만 아니라 차내 복도에 서서 있던 사람들은 버스의 기울임 때문에 몸이 쏠렸다. 물론 그녀도 몸이 기울어졌다. 아니, 그녀는 왼쪽 어깨만을 제일 앞자리 좌석에 기대고 서서 있던 터라 자칫 넘어질 뻔했다. 그래서 흠칫 놀랬던 것 같다. 그녀는 순간에 몸을 추스르고 잠시 뒤를 돌아봤다. 그 찰나에 바로 뒤에 있던 나와 눈이 마주쳤다.
세상에! 하느님, 부처님. 사람이 저렇게 예뻐도 되는 겁니까?
정말 예뻤다. 티 없이 검고 맑은 눈동자를 가졌다. 그리고 콧날은 오뚝하면서도 매끈했다. 얼굴은 귀여운 형인데 미소를 머금고 있었고 나름 여성스러운 면이 물씬 풍겼다. 나의 시선은 그녀의 가슴으로 옮겼다. 아! 아주 찰진 복숭아 같다. 키는 겨우 163cm 정도 될 듯해 보이고, 비교적 날씬한 체형인 것 같은데, 가슴은 제법 잘 여물었다. 골이 큰 박스 타입의 스웨터를 입고 있는 상태에서도 젖가슴이 저렇게 위로 봉긋이 솟아올라 있다니! 잠시라도 이성의 끈을 놓기라도 한다면 나는 그녀의 가슴을 한 손으로 덥석 잡았을지도 모른다.
너무도 예쁜 여자. 그리고 가슴이 아주 탐스러운 흰 목덜미를 가진 여자. 가슴이 순간 몇 번이고 덜컹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눈웃음을 쳤던 것 같기도 하다. 아, 썩을. 이제 곧 내려야 한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내 운명의 여인은 또 이렇게 찰나의 인연만 맺고서 다음 생을 기약한다.
그녀와의 마주침. 겨우 0.3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