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쓰다. 그리고 글을 쓰다

by 작가C

"글은 쓰디쓴 삶을 경험하고 나서 써진다."

몇 해 전 어느 온라인 게시글에서 읽은 누군가의 말이었다. 20대를 지나 30대 초반까지 글을 쓴다는 것은 나에게는 너무도 생소한 일이었고, 누군가의 이 말 역시 낯선 말이기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말을 종종 깊이 있게 생각하곤 한다.


나는 대학부터 박사과정까지 공학과 이학을 전공한 소위 말하는 공돌이다. 그래서 글이라는 것은 연구를 통해 발견한 새로운 현상, 이론 등을 표현하는 수단이라고만 여겼다. 글을 쓰다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인지하고는 있었지만, 그 글의 대상은 내가 아닌 우주와 자연, 또는 어떠한 실존의 현상일 뿐이었기에 누군가에게 지식을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수단 정도로만 여겼다. 아마도 이것은 공학자들이나 이학자들, 의학자들 대부분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30대 중반이 될 무렵, 그 글은 나에게 전혀 새로운 무엇으로 재정의 되기 시작했다. 그 이유를 말하기 이전에 포근하지만 아리고, 아련하지만 지금도 생생한 사랑하던 사람의 기억을 살짝 가슴속 추억의 방 한켠에서 꺼내야 할 것 같다.


글이 나에게 재정의 되기 시작할 무렵인, 30대 중반의 겨울이었다. '정말 인연이라는 것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 날이기도 했다. 영어 동호회에서 얼굴만 알고 지내고 아주 가끔은 인사 정도만 하고 지내던 4살 밑의 여자 A와 카톡 메시지를 통해 하루 안부를 주고받게 되었다. 그것도 정말 우연히 말이다. 동호회에서 다른 한 남성 회원이 그룹방을 만드어 평상시에도 영어 대화를 나누면 영어 수준이 향상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하여 그 남성 회원에게 연락처를 넘긴 일이 있었는데, 단체 방을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A와 카톡 친구를 맺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하루 안부를 주고받게 된 것이다. 안부를 주고받고서 나도 참 무슨 생각이었는지, 혹시 주말에 이태원의 터키식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같이 하지 않겠느냐는 말을 꺼냈다. 그런데 정말 운이 좋게도 A는 나의 제안에 응했고, 그 주말에 이태원에서 저녁식사를 계기로 연인이 되었다.


1년 하고도 반년은 더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만났던 것 같다. 하루하루가 달콤했고 행복했다. "아, 이래서 사랑을 하는 거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사실 A는 내 첫사랑 이기도 했다. 가끔은 친구들이 "A가 첫사랑이면 끝까지 잘 안되는 거 아니야?", "원래 첫사랑은 잘 안 이루어지는 법이야!", 등등의 말들을 나에게 했었다. 그럴 때면 나는 "내가 너희들 주변에서 처음으로 보여주겠어. 첫사랑이랑 결혼하는 커플을 말이지!"라고 기세 등등하게 말을 받아치고는 했었다. 지금 당시의 날들을 생각해보면 아픈 기억들까지도 모두 아름답기만 하다.


하지만 결국은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나는 A와 이별을 하게 되었고, 그 후로 한 1년 동안은 이성을 놓기도 하고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문득 눈물이 흘러 내 기리도 하고 어디론가 미친 듯이 달려가고도 싶었다. 심장이 모두 현탁 한 눈물이 담겨있는 느낌이었다. 모든 것들이탁 하게 느껴졌으며 가끔은 내가 수조 안에 들어가서 세상의 소리들을 듣는 것처럼 멍멍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의 한 서점에서 사랑에 관한 시집을 접하게 되었다. 내가 내 손으로 처음으로 집어 든 시집이었다. 그리고 한 100여 페이지밖에 안 되는 시집을 펼쳐 들고는 그 자리에 서서 두 시간 동안 꼼짝도 안 하고 시들을 읽어 내려갔다.


아,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당시의 그 감정과 생각과 느낌을 말이다. 뭐라고 간결하게 답변을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나의 1년 6개월 간의 삶을 마치 파노라마를 펼쳐놓고 있었던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아마 이 정도로 밖에는 표현을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타인인 시인이 쓴 시들이었지만, 나는 그 시들을 읽는 내내 내가 나에게 해주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심장을 둘러싸고 있던 현탁 한 눈물들은 조금씩 걷어져 나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 이후부터 나에게 있어서 글은 공학자로서, 과학자로서 새로운 지식 전달의 수단이 아닌 나의 삶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 되었다. 무턱대로 글을 쓰고 싶었다. 내 안에 있는 내가 나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들을 말이다. 그래서 나는 사랑과 이별에 대한 시들을 썼다. 누구에게 보여줄 만한 번듯한 시는 아니지만, 정식으로 문학도의 길을 걷던 사람의 아름다운 시는 아니지만 나는 내가 쓴들을 매일 나에게 읽어주었고 또 읽어주었다.


생각해보면 쓰디쓴 삶을 경험하고서 글은 새롭게 내게로 왔다.


삶이 쓰다. 그리고 글을 쓰다.

매거진의 이전글0.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