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rC May 11. 2018

열패인간 양성 사회, 대한민국

열패인간 양성 사회, 대한민국


“금번에 실시한 ABC 모집에 관심을 가지고 지원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다만 귀하의 뛰어난 역량과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금번 채용에서는 아쉽게도 함께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비록 이번에는 좋은 만남을 이어나갈 수 없게 되었지만, 이후 더욱 성장한 모습으로 건승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이메일로 전달받은 ABC 회사로부터의 불합격 통보 내용이다. 벌써 약 2개월 동안 9번의 불합격 통보이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이제는 잘 모르겠다.     


지금보다 조금은 더 어렸을 적에는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지?”라는 생각으로 두렵고 겁이 가득했었다. 그러다가 계약직 일자리라도 얻게 되면 “그나마 다행이야.”라는 안도감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다시 짬짬이 이력서를 최신화하고 조금은 더 신분에 대한 안정감을 가질 수 있는 정규직의 자리를 제공해 줄 수 있는 회사들로 그 이력서를 보내보곤 했다. 하지만 세상은 녹녹지가 않은 것 같다.     


지금은 새벽 2시 36분을 지나고 있다. 사실 조금 이른 시각 잠을 청하였다가 가슴이 너무도 답답해지는 악몽을 꾸고 깨었다. 잠을 다시 청할 수가 없다. 답답함이 온몸을 짓누르고 숨을 죄여 오기 때문이다.     


내 방의 어둠이 가득한 창을 내다본다. 그리고 아주 흐릿한 빛에 창으로 반사되는 나의 모습을 마주한다. 나는 오늘도 나의 모습을 마주하면서 다짐한다. “결혼에 대한 생각은 아직도 가질 수도 없는 현실이지만, 혹시라도 나중에 누군가를 만나 결혼을 한다고 하더라도 아이는 가지지 않으리라.” 이렇게 각박하고 숨 막히는 세상에 자신이 선택하지도 않은 생명을 부여하여 살게 하기란 너무 무책임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누군가를 책임지며 보호해줄 정서적·경제적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나는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를 항상 의심하게 만들다가 결국은 “나는 잘하는 게 없어”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만들고 비참한 Loser가 되어버린다. 불과 4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무엇이든 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잘 해나가고 있었다. 꿈은 그 자신감과 나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항상 활기가 넘쳤고 도전적이었다. 그리고 살아가는 것이 항상 감사했었고 즐거웠었다.  
    

그 결과 내가 지금까지 노력해온 나의 이력은 예비역 소령, 주요 대학에서의 공학박사, 4편의 도서를 집필한 작가, 10여 편의 국내·외 학술지를 게재한 연구자이자 학자, 최근 4년 동안 8회의 수상 실적을 가진 청년 등이다. 매사 노오력 하고 쉼 없이 살았다. 그러면서도 소외된 이웃들을 뒤돌아보려고 했고, 삶을 자의로 일찍 마감하려는 사람들을 다소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아니다. 내가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지 나의 생각뿐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잘하는 것으로 인해서 수상을 하고 논문이 게재되고 초청을 받아 강의를 몇 차례 했었던 것은 단지 그들에게 일용만 할(?) 양식이었고, 나에게는 신기루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한국에서 약 100곳 정도의 회사와 기관들에 문을 두드려 보았다. 정규직은 안 되고 계약직으로는 됩니다. 같은 업무를 하고 같은 포지션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많이 혼란스럽다. 그리고 이제는 혼란스러움마저도 익숙해지고 있다.     


한 번은 친한 형과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형, 이전에는 미처 생각을 하지 못했었는데. 지금 내가 계약직으로 있고 또 직장을 못 구해서 어려워해보기도 하니까 그런 생각이 드네. 뭐냐 하면 박사나 변호사 같은 우리도 이렇게 힘이 든데 일반 우리네 동생들이나 친구들은 더 얼마나 힘이 들까? 얼마나 부당함을 감수하면서 단순히 생계를 위해서 살아가는 걸까?”

그때의 그 형은 “글쎄, 나도 하루하루가 살기 힘들어서 그것까지는 생각하기가 어렵네.”라고 답했었다.  

   

최근 몇 년 동안은 조금씩 생활비를 줄이고 하면서 매년 100만 원씩은 소외계층 후원금으로 기부를 했다. 하지만 올해는 실직을 한 이후로 나의 생계에 대한 문제로 그 기부를 잠정적으로 중단하고 있다. 세상이 불공평하고 정의롭지 못하여 사람들이 살기가 어려워지면 확실히 곁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을 살펴볼 여유마저 사라지는 것 같다. 이러한 나 자신이 너무도 비열하고 한심하게 생각된다.     


오늘은 호주의 104세 생태학자 구달 박사가 스위스에서 안락사했다는 신문기사를 보았다. 예전 한동안 죽음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했던 적이 있다. 특히 자살에 대해서.     


당시 나는 자살을 종교적인 입장, 특히 천주교나 기독교의 관점에서 자살을 죄악시하는 입장에 대해서 깊은 생각을 했었다. “왜, 자살은 죄악인가? 왜, 자살은 지옥에 갈 행동인가?” 이 질문들로 자살에 대한 생각은 깊이를 더해 갔었다.      


고대시대부터 최근 근·현대까지 지배계층의 노동력의 확보에 대한 관점에서 차근히 유추를 해보기 시작했었다. 사실, 고대시대에는 애니미즘이나 토테미즘, 샤머니즘 등 모든 종교의 뿌리를 두고 있는 무속적인 신앙은, 그리고 그 신앙인들(즉 사제들)은 한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이자 지배계층이었다. 중세시대까지 세계 각지에서 제정일치의 모습을 보였던 것과 제정분리가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십자군과 같은 무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당시 교황의 권력을 보면 알 수가 있다. 지금의 경우에도 미국은 자신들의 헌법 이념에 종교적인 이념이 담겨 있으며, 아랍권의 국가들의 경우에는 종교법이 아직도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지배계층은 무력과 사회의 안정적 지배 등 여러 방면에서 시스템을 구축하고 지배하려는 노력을 기해야 했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다만 그 과정이 민주적인 방식으로 시민에 의한 권력이 반영되는 정도가 다를 뿐이다. 지배계층은 이러한 노력을 기하면서 그 근본이 되는 경제적인 노력도 함께 기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사실, 무력이나 사회의 조직 및 재정비는 경제 권력의 획득과 확장으로부터 나왔고, 그 경제 권력으로부터 무력의 확장과 사회의 조직 및 재정비가 보다 강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런데 우리 인류가 농업혁명을 기점으로 하여 많은 경제력을 지배계층이 얻을 수 있는 요인은 바로 노동력의 확보였다. 그리고 그 노동력의 확보가 커질수록 지배계층의 권력은 더욱더 공고해지고 커졌다. 이것은 역사를 한 번이라고 접해본 사람이라면 금방 알 수가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지배계층은 그다지 노동계층에게, 즉 피지배계층에게 있어서 관대하지 않았던 것이 일반적이다. 보다 깊게 이야기하자면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심리는 인간의 본성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진화심리학에서부터 사회심리학, 진화생물학 등의 학문들로부터 매우 복잡한 고증 등이 필요하기 때문에 배제하겠다. 여하튼 관대하지 않은 지배 행위는 피지배계층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도록 하였다.     


그 극단적인 선택은 바로 ‘자살’이다. 사실 지배계층의 사회로부터 달아나는 행위는 결국 피지배계층에게 경제적인 고립으로 이어지거나 다시 잡혀 와서 혹독한 형벌을 받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차라리 자살을 하는 선택하는 경우가 나았으리라. 하지만 이 자살까지는 지배계층이라 하더라도 막을 수는 없는 행위였다. 피지배계층의 자살이 많아지면 노동력은 감소하고 지배계층의 경제력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러한 부분은 지금의 한국 사회가 저출산 그리고 인구의 고령화로 노동력이 부족해진다고 호들갑을 떠는 것과 매우 닮았다. 피지배계층은 고민 끝에 이와 같은 방안을 내어 놓는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는 결코 죽어서도 좋은 곳을 못 간다. 끝없는 형벌의 굴레가 이어지는 세상, 즉 지옥으로 간다.” 바로 이 종교적인 믿음을 심어 자살을 방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들을 창조주의 대리인, 아들, 하늘의 자손, 하늘로부터 선택받은 자 등으로 칭하며 종교적인 권력도 함께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믿음을 심기는 매우 쉬운 일이었다.     


사람들은 결국 그 프레임에 갇혀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래서 자살을 한다고 하더라도 죄악이라고 지금은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나의 믿음이 틀리고 사후에 정말 지옥이라는 것이 있어 그러한 곳으로 간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나는 죽음은 그냥 그것으로 끝이 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불가사의 한 기억력과 음성 등을 접하는 것은 우리를 구성하는 입자물리학적인 또 근본적인 입자 수준의 물리화학적인 현상일 뿐이라고 믿는다.     


나는 자살 찬성자는 아니다. 하지만 그 이유가 있다면 104세가 되어 자신의 삶의 의미를 못 찾아 존엄한 죽음, 자신의 선택에 의한 안락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절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 선택에 대한 거리낌이 지금은 심적으로 거의 없다고 말하고 싶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어느 종교에서 말을 했듯이 고행(苦行)이 되어버린 사회이다. 그리고 다양한 가치와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정말 극단적으로 말을 해서 이원화 구분(성공한 자와 실패한 자)되어 버리고 다수의 국민들이 열패감에 스스로를 괴롭히는 사회이다. 나 역시 그 구분되어져 버린 사람들 중 하나이다.     


도저히 답이 나지를 않는다. 나 스스로를 포함한 청년들에게 힘을 내라는 개소리마저도 미안하기만 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은 얼마를 지불할 의사가 있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