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연희는 내게 이야기를 하는 동안 우주의 탄생 모습부터 지금 인류의 과학기술로는 도저히 확인이 어려운 개념적 수준의 미립자와 에너지 등을 보여주었다. 대부분은 내가 평상시 가지고 있던 생각들과 다르지 않았지만, 어떠한 것들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모습들이었다.
연희의 말에 따르면, 고타마 싯다르타는 종교인이나, 선각자, 신이라기보다 우주와 존재들의 본질을 탐구했었던 과학자 혹은 과학철학자에 가까웠다. 나름의 방식으로 가설을 세우고, 끊임없는 사유실험과 직접적인 체험을 하여 진리를 밝혀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 연희가 속한 우주에서도 우주의 진리를 밝히는 과학자로서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지구에서는 불교의 창시자, 성인, 선각자, 신으로 추앙받고 있지만 말이다. 기원전 6세기 경 고타마 싯다르타가 밝혀낸 것들은 놀랍게도 현재 물리학자들이 입증한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9
“이제 제 손을 잡으세요.”
“어디로 가는 건가요?”
“네, 박사님께 보여드릴 것들이 있어요. 제 손을 잡으세요.”
나는 연희의 손을 잡았다. 어디론가 미끄러져 내려가는 느낌이다. 연희는 내게 도착했으니 눈을 떠도 된다고 말했다.
“여기가 어딘가요?”
“도축장 입니다. 이제 곧 인간들이 와서 저기 보이는 돼지들을 도축할 거예요.”
“도축이요? 왜 저를 이런 곳에?”
“그 이유는 나중에 알려드릴게요. 지금은 조용히 도축하는 모습을 보세요.”
몇 분이 지난 후 4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 두 명이 나타났다. 그들은 우리에 갇힌 돼지들을 한 마리씩 꺼냈다. 그리고 전기 충격을 가하여 돼지들을 차례로 기절시켰다. 기절한 돼지들은 마치 물건들처럼 자동이송장치로 옮겨졌다. 돼지들이 특정한 지점에 도착했을 때, 한 남자는 날카로운 가위로 돼지들의 정․동맥을 끊었다. 돼지들은 피를 콸콸 흘렸고,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며 죽어갔다.
“이건 너무 잔인해요.”
“다 끝났습니다. 이제 다른 곳으로 이동할까요?”
“다른 곳으로요?”
“네. 제 손을 잡으세요.”
다시 연희의 손을 잡았고, 이내 도착한 곳은 1431년 프랑스였다. 우리 앞에는 많은 군중들이 모여 있었고, 화형대가 놓여 있었다. 나는 연희에게 누구를 화형에 처하는 것이냐고 물어보았다. 연희는 백년전쟁의 프랑스 영웅 잔 다르크라고 답했고, 이제 곧 화형식이 이루어지니 조용히 지켜보자고 말했다. 화형식 집행관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잔 다르크가 묶여 있는 화형대에 불을 붙였다. 순식간에 불길은 그녀를 휘감았다. 처참한 비명소리가 하늘을 찢어놓는 듯 했다. 몇몇의 사람들은 그녀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애도를 표했다. 그렇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그녀가 마녀였다며 그녀의 죽음을 무덤덤하게 지켜보았다.
“이제 마지막 장소로 이동할게요.”
“또 갈 곳이 있어요? 이제 더 이상 이런 장면을 보고 싶지 않아요.”
“이제 마지막이에요. 제 손을 잡으세요.”
연희와 함께 이동한 곳은 1939년 일본군 731부대다. 이 부대는 많은 사람들을 반인륜적으로 생체실험한 부대로 악명이 높다. 실제로 행해진 생체실험은 임신한 여자의 자궁을 드러내어 태아를 꺼내고 해부한다든지, 뜨겁게 달구어진 방에 넣고 사람을 죽인다든지, 인간을 치사율이 높은 세균에 감염시키고 관찰한다든지, 사람의 신체 일부를 잘랐다 붙인다든지 등이다. 일본군 731부대가 생체실험 대상으로 삼은 사람들은 마루타라고 불렸고, 마루타는 다수의 조선인들과 일부 타국의 전쟁 포로들로 구성되었다. 연희는 내가 생체실험들을 목격하도록 했다. 나는 현기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구토를 시작했다.
“박사님! 괜찮으세요?”
“그만 됐으니, 제발 돌아가죠. 더는 못 보겠어요.”
“네, 알겠어요. 제 손을 잡으세요. 바로 돌아가도록 하죠.”
나는 연희의 손을 잡고, 바로 내 처소로 이동했다. 벌써 해가 많이 기울었다.
“죄송해요, 박사님. 힘들게 하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괜찮습니다. 다만 휴식이 좀 필요할 것 같네요.”
“네. 그러면 저는 이만 가도록 하겠습니다.”
연희는 내 처소를 금세 떠났다. 충격적이고 혐오스러운 모습들을 본 탓일까? 마음이 쉬이 가라앉지를 않는다. 잠시 천불전에 들러 마음을 가라앉히고 와야겠다. 그나저나 스님께서 천불전의 문을 걸지 않으셨어야 할 텐데…….
#10
“박사님, 몸 상태는 좋아지셨어요?”
“네, 괜찮아졌어요. 하지만 어제와 같은 여행은 다시 못할 것 같습니다.”
“어제는 많이 죄송하게 됐어요. 그래도 박사님을 돕기 위해서 다녀온 곳들이니 너그러이 이해해 주세요.”
“저를 돕기 위해서 라고요?”
“네, 보다 정확하게는 박사님과 나눌 오늘의 대화 때문이죠.”
“저는 어제 그 모습들을 떠올리기 싫습니다. 오늘은 다른 대화를 나누도록 하죠.”
“박사님, 일단은 이거 드셔보세요.”
연희는 내게 엄지손가락만한 작은 유리병을 건넸다. 그 병에는 액체가 담겼는데, 너무도 맑고 투명했다. 그리고 햇살이 그 액체를 비출 때마다 보석처럼 강렬하게 반짝였다. 예사로운 액체가 아닌 것 같다.
“이거는 무엇인가요?”
“장미성운에서 담아온 물질이랍니다. 박사님이 걱정 되서 챙겨왔어요. 우주방사선은 인체에 영향을 미칠 수준이 아니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유리병의 뚜껑을 열고, 그냥 마시면 되는 건가요?”
“네, 쭉 마시면 됩니다.”
나는 연희의 말대로 유리병의 뚜껑을 열고, 그 액체를 마셨다. 미각과 촉각, 후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온 몸에 활력이 돌고, 머리가 개운해지는 느낌이다.
“연희 씨, 이거 느낌이 좋네요. 뭔가 좋아지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실 거예요. 생기를 불어넣는 일종의 에너지 응축물질이거든요.”
“그렇군요. 정말로 좋네요.”
“다행이에요. 이제 기분은 좀 어떤가요?”
“좋습니다. 즐겁고 상쾌한 기분이 드네요.”
“약효가 잘 드는 것 같네요. 그러면 이제 대화를 시작해 볼까요?”
“그렇게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