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창희야, 그런데 너 그거 알아?”
“응? 어떤 걸?”
“죽고 난 후 이런 말의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마는, 매희가 너 좋아했었다.”
“에이. 그게 무슨 말이야. 매희가 어떤 남자를 좋아했는지 내가 잘 알고 있는 데. 나는 아니다.”
“아니. 사실이야. 너를 마음에 두고 있었어. 네가 캐나다로 이민을 떠날 때 상심하기도 했었고. 이제는 네게 좋아한다는 말을 할 기회가 사라져 버렸다고 말이지.”
“정말? 한 번도 그런 낌새를 눈치 채지 못 했었는데…….”
“너 혹시 기억할지 모르겠다.”
“어떤 기억?”
“우리 종종 동네 D호프집에서 모이고는 했었잖아. 기억하지?”
“당연히 기억하지. 우리 그 호프집 참 많이 다녔었잖아.”
“매희가 취기가 오르면 네게 간간이 이런 말을 했었어. ‘오빠는 어떤 여자를 만나고 싶어요?’라고.”
“응. 기억난다. 그런데 그 말 나는 의미를 두지 않았었는데. 진지하게 했었던 말은 아니었잖아. 내가 연애조차 안하니까 동생으로서 그냥 걱정이 되어 했었던 말로 기억하는데. 우리 워낙 허물없이 지내던 사이들이었잖아.”
“당시에는 나도 그런 줄 알았었지. 그런데 뒤늦게 매희가 내게 그런 말을 하더라. 창희 오빠는 연애나 결혼 생각은 전혀 없는 것 같다고. 그래서 자기가 좋아한다는 말을 꺼내기가 어렵다고.”
“아……. 그런데 당시에는 결혼은 말할 필요도 없고 연애를 할 엄두도 못 냈었어. 너도 잘 알잖아. 내가 직장이 계속 불안정하니까 결혼은 생각도 하지 못했었던 것을 말이야. 물론 나중에는 결혼에 대한 생각이 줄어들기는 했었지만. 그것 때문에 내가 어머니와 많이 언쟁을 하기도 했었잖아. 남들 다 하는 결혼 너는 왜 박사까지 받고서 못 하느냐고 나무라셔서 말이야.”
“기억하지. 그때 우리 얼마나 세상 한탄을 했었냐. 나도 당시에는 너처럼 결혼 엄두도 못 내면서 살았었지. 뭐, 그렇다고 지금 상황이 좋아져서 결혼을 했다는 말은 아니야. 지금 애 엄마를 만나서 결혼하기까지 생각하면 참 신기하기만 해. 나 같은 남자 무엇을 보고 와서 살아주는지. 정말 고마운 사람이야. 그래서 죽을 듯이 힘들어도 애 엄마하고 애 생각을 하면 버틸 수밖에 없어.”
“지금의 너를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 반면에 나는 뭔가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고.”
“대단하긴. 그냥 살아야 하니까 사는 거지. 그런데 넌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네가 왜 비겁해. 너 만큼 정직하고 바르게 사는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아무리 세상 살기가 힘들다고 말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너처럼 결혼하고 가정 꾸리면서 살아가잖아. 그런데 나는 한국에서 있을 때 그럴 엄두를 못 냈었어. 그렇다고 지금은 다르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야. 아직 내가 한국에서 살고 있었다면, 당시와 마찬가지로 연애조차 엄두도 못 내고 있었을 테니까. 캐나다로의 이민을 누군가 내게 도피라고 말하다 하더라도 나는 딱히 변명을 할 수 없을 거야. 틀린 말은 아니니까.”
“나 같은 사람이 볼 때는 이민을 가는 사람들은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야. 나 같은 사람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거든. 나도 갈 수만 있다면 가족들 데리고 한국을 떠나고 싶어. 내 집이 없어서 1~3년 단위로 떠돌아다니는 상황도 싫고, 언제 잘릴지 몰라 하면서 불안하게 직장생활을 하는 것도 싫고, 내 개인 생활은 물론 가장으로서 역할을 전혀 할 수 없는 근로환경도 견디기 힘들어. 그래서 한국을 떠나야지, 또 떠나야지 하지만 지금까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어. 이민을 가려면 그 나라의 말도 배워야 하고 여러 준비들도 해야 하는 데, 당장 생계활동을 중단하고 그것들을 준비할 수는 없으니까 그냥 생각으로만 그칠 뿐이야. 내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한국을 떠나고 싶은 데 말이지.”
“승진아, 너무 어렵게만 생각하지 말고 차근히 알아보면서 준비를 해 봐.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은 도울게.”
“말이라도 고맙다, 친구야.”
“야, 말만 하는 게 아니야.”
“알았어. 고마워. 그런데 나와 와이프는 그냥 이렇게 한국에서 살아가야 할 것 같아. 대신에 내 아들 캐나다로 보내게 되면, 네 도움을 좀 받을 게. 아들만큼은 꿈이라는 걸 꾸면서 살게 해주고 싶거든.”
나는 최근 2년 동안 한국 소식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고 살아왔다. 캐나다로 이민을 온 그 순간부터 나는 내 조국 대한민국을 잊기로 마음을 굳게 먹었기 때문이다. 헬조선, 이민을 오기 전까지 나의 한국은 이 단어 그대로였다. 정말 지옥에서 살아가는 것 같았다.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삶. 그것은 정말로 평범한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신기루와 같은 것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사회, 그 사회가 바로 내 조국이었다. 그런데 승진이의 말을 듣고 있으니, 대한민국은 여전히 그대로인 것 같다. 아니! 정말 지옥인 것 같았다.
#4
벌써 새벽 4시 13분이다. 내일 오전에 있을 발인을 위해서 우리는 대화를 마치고 잠시 동안이나마 잠을 청하기로 했다. 나는 문상객실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눈을 감았다. 피로감으로 인해 금세 잠에 들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너무 몸이 힘들면 잠을 청하기가 어렵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여하튼 그렇다. 그래서 너무도 지치고 힘든 상황이 반복되면 나는 긴 어둠 속에서 지난한 시간을 오롯이 견뎌야 한다. 과거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승진이는 빈소 입구 부근에서 이미 잠에 든 모습이다. 내 친구 승진이, 그리고 고인이 된 매희. 지금 그들의 표정은 슬픔도 아픔도 고통스러움도 괴로움도 없다. 평온함만이 있을 뿐이다. 깊게 잠들고서야 이런 평온함을 가질 수 있는 이 나라가 나는 너무도 싫다. 저주스럽기까지 하다.
#5
많은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채워가고 있다. 잠을 청하지 못하여 그러한 것인지, 생각들로 가득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머릿속 생각들은 밤새 나를 괴롭힐 것임이 분명하다. 자신의 꼬리를 물고 끝없이 뱅뱅 제자리를 도는 뱀처럼 말이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혼란스럽다. 불현 듯 한국행 비행기 안에서 읽었던 신문의 기사들이 떠오른다. 이미 2년 전에도 그와 유사한 내용의 기사들이 신문의 지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지만, 어제 그 신문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니, 더욱 악화된 내용의 기사들로 지면이 채워져 있었다. 대한민국 인구소멸의 시작, 초고령화 사회로의 본격 진입, 극심한 사회양극화 및 부의 편중 등. 신문의 기사들은 한국이 이미 넘어서는 안 될 한계를 넘어버린 것처럼 보도하고 있었다.
각 분야의 교수들, 정치인들, 전문가들이라 직함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지면을 통해서 나름대로의 해법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모두 무의미하다. 국민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자들의 그럴듯한 말들, 그것들은 그 옛날 중국 사회를 좀먹었던 아편과 다름이 없다. 현실에서 국민들이 어떠한 고통과 어려움을 겪으며 살아가는지를 직접 단 1년도 겪어보지 않고 책상머리에서 알량한 지식으로 그럴듯한 말만 꺼내는 자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하긴, 그런 자들이 한국을 좌지우지하는 기득권 세력이니 이 모양 이 꼴이 되었겠지만.
“어차피 대중들은 개, 돼지입니다. 거 뭐 하러 개, 돼지들한테 신경을 쓰시고 그러십니까? 적당히 짖어대다가 알아서 조용해질 겁니다.” 2015년 개봉된 영화 <내부자들>에서 한 주인공이 한국 국민들을 대상으로 내뱉은 대사이다. 그 주인공은 한국의 주요 언론사 간부로 재직하고 있는 사회지도층으로 구분되는 자였다. 이 대사는 그 주인공 혼자만의 독백이 아닌 재벌대기업의 총수와 대선 유력후보로 추대된 정치인이 함께 있을 때 내뱉어졌고, 그 대사에 그들 모두는 동의하며 맞장구치는 모습이 그려졌었다. 비록 영화의 한 장면이었지만 나를 비롯한 상당수의 국민들은 섬뜩할 수밖에 없었고, ‘정말로 그러하지 않을까?’라는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2016년 현실에서 그 영화와 같은 사건이 발생했다. 교육부 소속 고위공무원인 나도진 기획관의 발언에서 비롯된 사건이었기에, 국민들은 그 사건을 일명 <나도진 사건>이라고 불렀다. 그는 명문사학 F대학교를 졸업한 후 20대에 행정고시를 합격하여 공직생활을 시작한 세간의 호칭으로 엘리트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특권의식, 공감능력 부족, 인성문제 등으로 기자들과의 회식자리에서 “민중은 개, 돼지와 같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였고,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킨 이후에도 “내 자식과 남의 자식은 다른데 어떻게 내 자식 같은 생각이 드느냐. 그것은 위선이다.”라는 말을 하여 더욱 큰 공분을 일으켰었다. 대한민국 기득권층의 민낯이었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대한민국 기득권층에 대한 환멸을 크게 느끼기 시작했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었다. 나는 그 이후 캐나다로의 이민을 서둘렀었다. 한국에서의 삶은 더 이상 희망적이지 않다고 판단했었기 때문이다.
출산율이 급속도로 감소하는 문제를 걱정하기에 앞서, 왜 한국의 청년들이 연애조차 하지 않는지에 대해서 깊게 고민해 본 적이 있을까? 한국에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일이 평범한 국민들에게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OECD 청년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벗어내고자 함에 앞서, 왜 한국의 청년들이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한 적이 있을까? 고독사로 삶을 마감하는 노인들을 보면서 한국의 청년들이 어떠한 생각을 가지는지, 또 어떠한 두려움을 느끼는지 공감하려 한 적이 있을까? 전혀 없었다. 단지 선출된 권력을 얻기 위하여 보여주기 식의 제스처만 취했을 뿐, 진심이 담긴 행동은 전혀 없었다. 나는 확신한다. 만일 그렇지 않았더라면 한국이 이런 지옥 같은 나라가 되지는 않았을 테니까.
가끔 나는 ‘비겁하게 조국을 등지고 떠난 도망자’라는 생각으로 괴롭다. 그렇지만 내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지금까지의 한국을 보면서 나는 더욱 그렇게 생각한다. 다만, 이곳에 남겨진 내가 사랑하는 또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벌써 아침 6시가 다 되어간다. 잠시 밖에 나가서 바람을 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