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20대, 30대, 그리고 이제 막 마흔이 된 나에게까지 FLEX는 언젠가부터 우리 일상에 깊게 스며든 일종의 문화가 되었다. 나도 이제는 꼰대내지는 아재라 불릴만한 연령대에 있는 사람인지라 각 매체들에서 셀레브리티 그리고 방송인 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사용하던 FLEX란 단어 자체가 처음 접했을 당시 꽤나 생소했었다. 이렇게 생소함을 느꼈던 것은 2021년 말인 지금으로부터 2~3년이 채 안된 시점의 일이다. 사실 그 당시에는 ‘N포세대’라는 신조어와 함께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가 젊은 층에서 많이 사용된 단어였기에, 누군가 “FLEX 했다”라고 말할 때면 나는 ‘뭐, 욜로를 위해 뭔가 했나보다’라고 이해하는 척 했었다.
누군가 나에게 어떤 음악을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서슴없이 힙합과 소울, R&B라고 말한다. 물론, 판소리와 민요, 발라드, 째즈 등도 고르게 듣는 편이라 음악적 편식은 없다. 다만, 그 중에서도 이 세 장르를 특히나 좋아한다. 힙합과 소울, R&B는 흔히 블랙뮤직(Black Music)이라 불린다. 그렇게 불릴 이유는 이 장르들의 기원과 주류 소비층이 ‘흑인(Black Persons)’이기 때문이다. 특히 아메리카 대륙에 이주되어 자신들의 커뮤니티와 문화를 구축하고 살아가는 흑인 말이다.
힙합과 소울, R&B의 기원은 아메리카 대륙(보다 정확하게는 미국)에서 살아가는 흑인들의 ‘저항’과 ‘고난한 삶’이란 두 단어로 응축하여 설명할 수 있다. 지금은 미국과 캐나다, 멕시코, 아르헨티나, 브라질, 베네수엘라 등 수개의 나라들로 구성되어 있는 아메리카 대륙, 나라의 수는 많지만 흑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된 시기는 거의 유사하다. 누군가에게는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있는 역사적 시기이지만 서구식 교육을 주입받은 한국 등에서는 거리낌 없이 ‘대항해시대’라고 부르는 15~17세기, 포르투갈과 스페인, 영국, 프랑스 등 현재의 유럽 강국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신대륙이라 칭하며 점령하고 원주민들을 학살하며 그 지역에 매장된 은과 금 등의 자원을 수탈했던 그 시기에 거의 무임에 가까운 노동력이 크게 필요하자 아프리카 대륙의 흑인들을 인신매매나 노예거래 등을 통해 강제 이주했었다. 그 주체들에 따라 아메리카 대륙 내의 이주지만 달라졌을 뿐 사실 이들의 뿌리와 이주된 시기는 거의 동일했다.
아메리카 대륙에 이주된 당시 흑인들은 그 곳에서의 목적 자체가 비인간화된 존재로서 강제된 노동이었다. 근대를 지나 현대에 이르러서도 흑인들의 삶은 미국 등 아메리카 대륙에서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물론, 흑인이 주류로서 사회를 구성하게 된 아메리카 대륙 내 국가가 몇몇 있지만 그들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몹시 어려운 상황을 지속적으로 직면하고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한 나라, 어느 시점부터 아메리카 대륙(특히 북아메리카)과 동일시되고 있는 나라 미국(United States of America)은 노예제가 폐지되고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시장경제체제를 크게 발전시키면서 이 곳의 흑인들에게도 큰 삶의 변화가 왔다. 스스로 알아서 찾아온 변화는 아니다. 미국의 흑인들이 미국 내 주류 세력인 백인들을 대상으로 치열하게 투쟁하고 또 저항하며 얻어낸 결과였다. 아직 흑인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수준의 삶의 변화는 아니지만 말이다.
유튜브(YouTube)나 틱톡(Tiktok) 등에 올려져있는 미국에서의 영상들을 보면 일반 시민으로 보이는 흑인이 백인 경찰에게 범죄자 취급을 받거나, 혹은 인종차별주의자 백인이 흑인에게 해서는 안 될 언행을 너무 서슴없이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미국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현상이 미국 내에서 흑인에 대해 인종차별주의자 백인들이 만들어 놓은 부정적 이미지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나 역시 이전에는 깊이 생각하고 보지는 않았지만, 기억해보면 어린 시절 그리고 성인이 된 이후에도 접했던 상당수의 미국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 비춰진 흑인들은 총기를 휴대한 갱단이거나 마약을 파는 등 불량한 시민이었다.
현재까지도 미국에서 흑인들은 사회 상류층으로 갈 수 있는 수단이 그다지 없다. 특히, 양질의 고등교육 등을 통해서 상류 사회로 진출하기는 더욱이 어렵다.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고 공화제를 채택하고 있는 미국에서 봉건·왕정제와 같은 공공연한 신분의 구분을 하여 양질의 고등교육을 못 받게 하거나 상류 사회로의 진출 자체를 법적으로 막아서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학 또는 교육사회학에서는 구조적인 사회 불평등을 고착화하는 요인으로 자본 및 비자본적 유산의 대물림을 지적하는 데, 현재 미국 내 흑인 사회가 그러하다. 즉, 미국 내 적지 않은 흑인들은 교육을 지속해서 받기 어려운 환경에 어린 시절부터 노출되어 있고, 성인이 된 이후에도 정계나 경제계 등의 상류 사회로 진출하기 위한 인적·사회적 인프라가 취약하다.
그래도 미국 내 억만장자 반열에 오른 흑인들도 적지 않다. 다만, 이들의 상당수는 가수나 스포츠스타 등으로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 성공하고 막대한 부를 이루었다. 지금 한 번 떠올려 보자. 미국 내 성공한 흑인을 생각하면 그들의 직업이 대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말이다. 부르노 마스, 제이 지, 비욘세, 오프라 윈프리, 마이클 조던, 코비 브라이언 등 이들 대부분이 래퍼나 가수, NBA농구스타, 유명 방송인이다. 버락 오바마와 콜린 파월 등 고등교육을 받고 정계에 진출하여 성공한 정치인들도 있지만 흑인 전체 인구에 비하면 소수이다.
흑인들은 미국 사회 내에서 아직도 수많은 차별을 받고 있다. 아직까지 미국의 인구 구성이 다수의 백인으로 되어있기 때문인지라, 이는 흑인과 히스패닉, 아시안 등 다양한 인구가 점차 증가하면서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찌 되었든, 흑인들은 미국 사회 내에서 여전히 차별을 받고, 건강과 생명의 위험에 늘 노출되어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된 흑인들, 특히 흑인 래퍼들이 주류 백인들을 향해 ‘너희 더 이상 나를 무시하지 말아라. 너희 백인 말고 잘난 것이 뭐 있어? 나는 내 여친에게 10캐럿 다이아몬드반지도 생일마다 사주고, 나는 부가티 슈퍼카만 집에 3대야. 나를 더 이상 무시하지 말아라. 쥐뿔도 없는 백인들아.’라며 자신들의 부를 일종의 신분처럼 과시하기 시작했다. 이는 부를 크게 이룬 흑인 래퍼나 스포츠스타 등에게 일종의 유행이 되었다. 그리고 2000년대 즈음까지 갱스터랩을 통해 저항하던 힙합의 장르는 이 같은 상황과 맞물려 FLEX랩을 통해 저항의 방식이 리뉴얼되었다.
“결국 지금의 미국 내 FLEX 문화는 흑인들의 저항 문화이고, 수백 년 미국과 함께한 흑인들의 역사적 파생물이다.”
_ 다음 화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