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우리치오 카텔란 <WE> 를 보고 남긴, 개인적인 감상과 해석입니다.
지하 1층, 지상 1,2층. 총 3층에 걸쳐 전시되고 있던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작품들은 대부분 살아있지 않거나, 정지되어 있는 상태였다. 인위적인 방식으로 죽어있는 동물들의 순간이나 작가 본인의 모습에서 다양하고도 강렬한 외침을 들을 수 있었다. 수많은 작품들의 제목이 ‘무제’였던 만큼, 나만의 해석을 더하는 과정에서 가공되지 않은, 스쳐가는 생각을 최대한 많이 만들며 작품을 감상하고 싶었다. 지하 1층에서부터 2층으로 올라가며 감상했다.
그의 작품을 보는 내내, 기괴함, 두려움, 공포를 느꼈다.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불쾌’였다. 딱딱하게 굳어 천장에 힘없이 매달려 있는 말의 모습, 동화로 알려진 브레멘 음악대의 모습이 실은 모형이 아닌 실제 동물을 박제하여 만든 형상이었다는 점, 작가가 극사실적으로 표현한 인간의 모습이 생생하면서도, 경직되어 보이는 아이러니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미묘한 두려움과 공포를 느꼈다. 마지막 층인 2층에서 작품을 관람하던 중, 나는 약 2분 동안 불규칙적으로 전시장 전체를 울려 퍼지는 북소리를 들었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보니, 작가의 얼굴을 한 어린아이가 양철북을 두드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때, 나는 문득 이강백의 ‘파수꾼’에 나오는 해설자가 떠올랐다.
파수꾼 이야기의 중간에 뜬금없이 등장하는 해설자는, 이야기에 관객이 과하게 몰입하지 않도록, 이야기와는 별개로 본인이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인격체임을 상기시키며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역할을 한다. 나는 ‘무제’라는 이름을 갖고 있던 양철북을 두드리는 소년이, 파수꾼에서의 해설자 역할을 수행한다고 생각했다. 지하 1층에서부터 올라가면서 전시를 보다 보니, 죽음과 공포의 느낌이 점점 고조되어 격양된 감정을 갖고 전시를 관람하게 되었으나, 북을 반복적으로 두드리는 행위와 청명하게 들려오는 북소리에 집중하게 되면서 차분한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전시를 보며 느낀 두려움, 움직이지 않는 것에 대한 동정, 생기를 잃고 차갑게 식어버린 피사체들에게 받은 비탄에서 한 발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죽어있고 순간으로 굳어져버린 형상들로부터 느꼈던 죽음에 대한 공포는, 불현듯 우리에게도 다가오는 순간이 있다. 현존재인 우리는 삶, 생명을 품고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나도 모르게 맞이할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임을 자각하고 살아간다. (바쁜 일상에 치여 비록 잊을 때도 있지만..) 죽음을 전시장이라는 공간에 가둬 전시하는 것에서 생경한 느낌과 복잡하고도 미묘한 감정을 느꼈지만, 어디선가 들려오는 북소리를 통해 내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존재임을, 생명을 지닌 존재로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북소리를 들었던 2층에서는 지하 1층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북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반대로 아래층의 사람들은 모두 북소리가 나는 위쪽을 동시에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여기에서 ‘통제’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각자 본인이 즐기고 있던 관람을 중단한 채, 북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 모두가 바라보는 모습을 보고 생경한 느낌을 받았다. 작가가 2층에 올라가야 겨우 눈높이가 맞을 정도로 높은 곳에 (천장에 닿을 정도로 높은 위치) 북소리를 내는 작품을 설치한 이유가 ‘통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했다.
작가는 때로는 익살스럽게, 때로는 냉소적으로 사회를 맹렬하게 비판하고 풍자한다. 그래서 나는 작가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북소리로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을 순간적으로 멈추고 소리 하나로 통제되는 상태를 만들어, 자유를 누리고 있는 순간에서도 자신도 알게 모르게 통제될 수 있는 사회의 현상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 같다. 이 사실 자체가 나에겐 관객들로 인해 비로소 완성되는 예술로 느껴졌다. 2층에선 정면에 가까운 시선들이, 지하 1층에선 위쪽을 향한 여러 갈래의 시선들이 북소리를 내는 아이의 형상으로 모이며 짧지만 강렬한 ‘통제’의 순간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전시에서 경험했던, 개인적으로 재밌었던 일화로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장안의 화제가 된, 테이프로 고정된 바나나를 보았을 때였다. 이 바나나 작품의 제목이 ‘코미디언’이라는 사실 자체가 코미디라고 생각하던 중, 지나가던 사람이 얼핏 말하는 것을 들었다. 지나가는 행인 1은 자신의 일행에게 "지금 내가 전시장까지 와서 바나나를 사진 찍고 가는 게 너무 웃겨"라고 말을 했다. 이 말을 들은 나는 깊은 공감을 하며 다다이즘과 개념미술을 떠올렸다.
처음 다다이즘이나 개념미술 작품들을 접했을 때, 일상의 흔한 생필품이나 기성품이 작가에 의해 채택되어, 전시장에 갔다는 이유만으로 위대한 미술사적 의의와 가치를 거머쥐게 되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이 바나나 작품 또한 하나의 개념미술로써 작가가 ‘코미디언’이라는 의미를 더해 기존 대상의 의미를 재구성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나가는 행인 1이 했던 말처럼, 작가의 의도대로 그다지 싱싱하지 않던 바나나 작품이 코미디적인 상황을 연출함으로써 재미를 이끌어냈다고 생각했다.
이 전시장에 작가인 마우리치오 카텔란 본인은 없었지만, 그는 전시 공간 어디에나 있었다. 작가의 어릴 적 얼굴을 한 채, 북을 치며 아래를 내려다보는 작품, 지하 1층 미술관 바닥 속에서 정확히 2층을 응시하고 있는 작가 본인의 조각상을 통해 그는 여러 시선으로 관람객들의 모습을 관찰하며 소통하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 것 같았다. 이 외에도 비록 죽어있고, 멈춰 있는 작품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작품에 녹아들어 자유롭게 표출되고 있던 메시지들을 통해 작가의 철학과 생각을 생생하게 전달받았던 좋은, 가공되지 않은 날 것의 생각을 많이 이끌어낼 수 있던 전시였다.
결국 나의 시선이 머문 곳은 작품 곳곳에 숨겨진 작가의 메세지와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전시장으로 꺼내 작품에 대입해보기 전 응시했던 전시장의 허공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