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14일 화요일
몇 달 전, 가족 단톡방에 사촌 여동생의 모바일 결혼 청첩장이 올라왔다. 10월 19일 일요일 오후 4시에 신도림의 한 웨딩홀에서 결혼식을 올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로부터 몇 달 후인 오늘 오전 11시, 나는 사촌 여동생의 계좌로 20만 원을 보냈다. 그러고 나서 가족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알리자마자,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는데, 아버지는 불같이 화가 나 계셨다. 아버지의 얘기 인즉은, 바보같이 왜 축의금을 보냈냐는 것이다. 네 동생 결혼식에도 안 오고, 축의금도 안 한 애한테 뭐 하러 돈을 보내냐고. 게다가 명절 때도 얼굴 잘 비치지도 않는데, 그런 애한테 뭐 하러 저자세로 나가느냐고. 너는 배알도 없냐고.
아버지의 전화가 끊어지고 나서 이번에는 내 여동생에게서도 전화가 왔다. 동생은 베풀고 싶은 오빠 마음은 알겠는데, 오빠가 우리 가족을 호구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오빠를 위해서 돈을 써도 모자랄 판에 도리도 제대로 다하지 않는 사촌을 위해서 그 큰돈을 쓰냐고 얘기했다.
동생의 전화 뒤로, 마지막으로 엄마의 전화가 이어졌다. 엄마는 아직도 세상 살 줄 모른다고 한탄하셨다. 네가 그렇게 선심을 베풀어도 걔네가 알아줄 것 같냐고, 자존심은 지키면서 살아야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앞으로 생각 좀 하면서 살라는 당부를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일하다가 세 통의 전화를 받으니, 마치 폭풍이 휘몰아친 것처럼 도통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내가 축의금 한 것이 그리도 문제가 된다는 말인가. 내가 축의금을 낸 것이 사촌 여동생에게 생색내는 것도 아니요, 인사치레 받기 위한 것도 아니요, 내 욕심을 채우려고 했던 것도 더더욱 아니다. 그저 난 내 할 도리를 했을 뿐이었다. 상대방이 나를 호구로 생각하든, 나를 모자라게 보든 그건 중요치 않았다.
그저 나는 유년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사촌 여동생의 결혼을 축하해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사촌 여동생이 내 동생의 결혼식에 오지도 않고, 축의금도 보내지 않았으며, 명절에 자주 얼굴을 비치지 않는 건 그 여동생의 문제일 뿐이었다. 여동생의 문제를 나의 문제와 결부시켜야 하는가. 인간관계를 꼭 등가교환으로 측정해야만 할까. 내가 준 만큼 반드시 받는다는 생각은 뭔가 냉정하고, 비인간적인 것은 아닐까.
내 진심이 전달되지 않아도 상관없다. 설사 내 진심이 왜곡되어 내가 호구가 되고, 병신(아버지의 표현이 그랬다)이 될지언정, 나는 나대로 진심을 표출했으면 그만이다. 그걸로 족한 것이다. 현명하게 사는 게, 내 이득을 먼저 생각하는 거라면 나는 내 이득만이 아니라, 모두가 이득이 되는 길을 택하고자 한다. 두루두루 더불어 어울려 사는 것이 좋지 않을까. 설사 상대가 나를 용납하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상대를 용납하면 되지 않을까.
부모님과 여동생의 마음이나 입장은 알겠다. 너 자신부터 생각하라는 말씀도 알겠다. 그러나, 축의금 20만 원 하나에 이렇게 불같이 성을 낼 일인가 싶다. 물론, 20만 원이 나에게는 큰돈이고, 나에게 뭔가를 해 줄 수도 있는 돈인 것은 맞다. 그러나, 내가 조금 아껴 쓰고, 내 할 도리를 다한다면 그것으로도 내 마음은 풍족한 것이다. 돈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돈에 실린 나의 마음가짐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돈에 욕망을 실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고 생각한다. 내가 한때 유흥에 돈을 탕진한 것처럼 돈에 나의 욕구와 욕망을 실어버리게 되면 돈은 도리어 나를 이용하려 한다. 돈을 현명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돈을 현명하게 적재적소로 쓰는 게 중요하다. 앞으로 내 돈을 씀에 있어 될 수 있으면 아껴 쓰고, 차츰 저축해 나가면서 나 자신과 주변 사람들, 그리고 사회에 적절히 베풀 수 있는 관용의 재테크를 해보려 한다. 그를 위해 이번 축의금 사건(?)은 내게 또 다른 기회가 되기도 했다. 성실한 수입과 현명한 지출, 그리고 상생의 씀씀이를 이룰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