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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노 Jun 21. 2022

42 선한 기억

김영석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템북

“찾으시는 선생님 퇴직하였네요.”


“아…. 네 알겠습니다.”


결국, 그렇게 물어보지 못했습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아픈 기억


처음에 발령받자마자 초등학교 3학년 시절 담임 선생님을 찾았습니다. 저에게 인생 처음으로 귀싸대기를 선사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 제가 다니던 학교는 아마도 방송교육을 주제로 한 연구학교를 운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정은 모르겠지만 각 교실에 넣을 TV와 스피커 시스템을 각 반에서 돈을 모아 마련해야 했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담임 선생님께서는 할당된 돈을 가지고 오지 않은 학생들을 앞에 세우고는 볼을 꼬집으며 돈을 가지고 오지 못한 이유를 물으셨습니다.

맨 처음 학생이 “집에 돈이 없어서”라고 답했습니다. 돈이 없다고 말하니 선생님께서는 그냥 넘어가셨습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다음 순서 아이들도 돈이 없어서 못 가지고 왔다고 답했습니다.


드디어 제 차례가 왔습니다. 저 또한 친구들이 말한 것처럼 집에 돈이 없어서 가지고 오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앞서 친구처럼 저도 그냥 넘어갈 줄 알았는데 저에게 돌아온 것은 번쩍하는 따귀였습니다.

“이렇게 멀쩡히 옷 입고 다니는 놈이 집에 돈이 없다고!” 선생님은 저에게 소리치셨습니다. 저는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집에 가서 어머니에게 이야기하니 한참을 우셨습니다. 그리고 돈 대신 장문의 편지를 저의 손에 들려 보내셨습니다.

아마도 집안 형편은 어렵지만,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 옷을 잘 입힌 것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선생님이 되어 기억하는 선생님


선생님이 되어 그분을 찾았습니다. 지금이라면 인제 와서 찾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며 찾지 않았겠지만, 스물네 살의 갓 선생님이 되었던 저는 그분의 행방을 찾았습니다.

찾아서 묻고 싶었습니다. 그때 왜 그러셨냐고? 육성회비를 안 낸 것도 아니고 폐품을 안 가지고 온 것도 아니고, 학교에서 들고 오라는 것 다 들고 왔는데 딱 한 번 안 가지고 온 돈 때문에 꼭 초등학교 3학년 학생에게 따귀를 선물해야 했냐고….


다행히 그분이 퇴직하시는 바람에 만남은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만났어도 별말 못 했을지도 모르고 차라리 만나지 못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저의 초등학교 선생님에 대한 기억은 그렇게 끝이 났습니다.

중고등학교에 올라가서도 좋은 선생님보다는 기이한 선생님들에 대한 기억만 남아 있습니다. 오히려 저에게 좋은 선생님에 대한 모델은 학교가 아닌 교회 주일학교 선생님들과 목사님, 전도사님 그리고 대학교 시절 만난 선교단체 간사님이었습니다. 그래서 교사가 되었어도 어린 시절 선생님들에 대한 기억보다는 주일학교를 통해 경험한 가르침을 떠올리며 아이들을 만나왔습니다.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오늘 소개해 드릴 책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누구 덕분에 잘 지낸다는 것일까? 생각하며 책장을 넘겼습니다. ‘지금의 내가 있도록 가르쳐 주신 선생님에게 … 이 책을 바칩니다.’라는 첫 장의 글을 읽으며, 아! 이 책은 나랑은 상관없는 책이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최소한 글의 다른 부분은 다 동의가 되었지만, 지금의 내가 있게 된 데에 선생님들이 역할을 했다는 것에 대해 저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런 제 마음을 알고 있는 듯 저자는 저에게 말합니다.

김영석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템북


우리의 기억은 왜곡되기 쉬워서 어떤 기억은 더 좋게,
어떤 기억은 더 나쁘게 남아 있기도 합니다.
나에게 도움을 준 사람보다 상처를 준 사람을 더 잊기 힘들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학창 시절 나를 힘들게 했던 선생님에 대한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p7




덕분에 기억난 선생님


저자의 말처럼 나를 더 힘들게 했던 선생님만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생각하며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책은 27개의 에피소드로 되어 있습니다. 각각의 에피소드는 짧지만, 우리의 학창 시절 기억을 떠올리기 충분한 내용입니다.

특히, 학생의 눈으로 본 선생님의 모습을 어른이 되고 교사가 되어 다시 바라보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학생 시절에는 학생들의 놀림감으로 치부되었던 선생님의 행동이 사실은 학생들에 대한 배려가 담긴 행동이라는 것을 알게 된 저자의 고백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슈퍼맨 선생님은 자신이 가르치는 ‘수학’이라는 과목을 좋아했고, 여전히 수학을 공부하고 계신 것이었다.
공부를 해야 할 우리가 오히려 시끄럽게 떠들며 선생님을 방해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이거 쉬운 문제는 아니지만, 같이 좀 풀어보자.
나도 이렇게 열심히 풀고 있잖아!’ 하는 메시지를 늘 보내셨지만
우리는 그 메시지를 매번 외면했다. p18~19


한 꼭지씩 읽어나가며 한분 한분 선생님들과의 기억이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가정 방문을 한 뒤로 저를 보면 늘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그분은 복도나 교실에서 만날 때만 머리를 쓰다듬은 것이 아니라 지하철역에서 만날 때도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올라간 뒤에도 거리에서 만날 때도 반갑게 어깨를 두드리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그때는 그냥 반갑기만 했기에 멋쩍게 인사만 드렸는데 돌아보니 그분 나름의 격려를 계속해주셨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수업시간마다 생생한 역사의 현장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신 국사 선생님이 생각났습니다. 그 선생님 덕분에 저는 국사책을 소설책 보듯이 볼 수 있었고 지금까지 역사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책 덕분에 잊고 있었던 선생님들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났습니다. 12년간 만난 수십 명의 선생님 모두가 저에게 상처만을 남긴 것이 아니었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상처를 준 선생님만큼이나 지금의 저를 만든 선생님들이 계셨습니다.


교사이기도 한 저자는 학생에서 교사로 입장이 바뀐 상황에서 이제는 어떤 교사로 살아가야 할지 고민합니다. 그리고 먼저 그 길을 걸어갔던 학창 시절 만난 선생님들을 통해 가르침과 배움에 대해 통찰합니다.

저 또한 교사이기도 하고 저자와 같은 세대이기에 많은 부분을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선한 기억이 위로를 줄 때


사실 우리의 기억은 언제나 왜곡됩니다. 과거에는 힘들었던 기억이 시간이 지나면서 미화되기도 하고 과거에는 별생각 없었던 기억이 어느 날 갑자기 고통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학생 시절의 일들은 우리 마음속에서 다양한 기억으로 변주됩니다.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는 우리에게 왜곡된 기억을 일정 부분 바로잡아줌과 동시에 현재의 눈으로 과거의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해 줍니다. 분명 저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읽는 내내 저의 삶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저자와 함께 카페에 앉아 함께 이야기하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하는 것이 이 책의 매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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